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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나모인터랙티브 김상배 대표, “‘이거다’ 말할 수 있는 참 엔지니어 되세요”

난관 극복, 17년간 소프트웨어만 개발한 벤처1세대 토종기업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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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34호 정의식⁄ 2013.07.08 13:35:33

김상배 대표는 1960년 경북 김천 출신이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두 살 많다. 이렇게 된 것은 태어났을 때 너무 허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고향 김천에서 아플 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대구로 나가 살았다. “1년쯤 지난 추석이 돼서야 김천에 돌아온 어머니께서 뒤늦게 생각나셨는지 저를 호적에 등재했지요. 그래서 제 호적 나이는 두 살 어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밖에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없던 어려운 시대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가 IT산업에 몸담게 된 것은 친구들의 조언 덕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1977년 당시 전산이나 IT, 컴퓨터 같은 단어들은 누구에게나 생소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할 무렵 “앞으로 유망하대더라”는 친구들의 조언으로 ‘전산학과’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향후 인생을 결정짓는 변곡점이 됐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황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며 웃었다. 김 대표는 동국대 전산학과에서 소프트웨어를 전공하고, 1982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바로 국책 연구기관인 ‘전자통신연구원(이하 ETRI)’에 들어갔다. 당시에도 ETRI의 문턱은 상당히 높았는데 “뒤늦게 정신차리고 공부 열심히 했더니 들어가지더라”는 것이다. “IT 외길 인생 30년…ETRI·삼성에서 트레이닝 받아” ETRI 근무 경험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이 사회 첫 직장이기고 하고 그곳에서 굉장히 도전적인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첫 직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학 졸업 후 첫 걸음을 사회에 어떻게 내딛느냐에 따라 사회를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번에 취업하는 아들에게도 일부러 더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가라고 얘기했습니다. 일의 가치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큰 조직일수록 그러기가 힘들고, 작은 업적에도 지나치게 많은 보상이 따라와 자칫 편한 환경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첫 직장에 대한 생각이다.

1996년 삼성전자 종합기술연구원(이하 종기원)에 입사했다. 종기원 역시 ETRI처럼 도전적인 연구에 집중하는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비록 돈 버는 직접적인 역할은 못했지만, 외국의 선진 연구기관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았고, 맨땅에 헤딩하는 기세로 연구하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배움은 그에게 가장 큰 자산이 됐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맨땅에 헤딩하는 경험이 많았는데, 지금 하는 일도 그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처음 연구하고 백지에 그림 그려가며 목표를 정하고 역할분담을 해서 일정 시간이 지나 유무형의 제품이 완성되어 나오는 과정은, 가슴속에 품은 꿈을 구체화시켜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지요. 그런 경험이 많다는 것이 제 가장 큰 자산입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전산을 전공했지만 타고난 개발자 타입은 아니라고 한다. 언제나 주변에 더 뛰어난 개발자들이 많았다. 다만 전략을 세우고 끌고 나가는 훈련을 많이 받아서 그걸 가장 잘 하는 게 강점이다. 1992년부터 96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신경영사무국에 근무했다. 신경영사무국은 IT로 그룹의 업무 프로세스를 혁신하는 작업을 맡았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구체적 매니지먼트로 바꾸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당시 그룹 전체의 전산화를 기획하고 체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벤처 열풍 타고 인터넷사업 도전하다 나모 인터랙티브와 인연” 이후 삼성SDS에서 SI사업을 진행하다 2000년 4월 퇴사하고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시작한 회사는 당시 유명했던 인터넷 기업 ‘프리챌’과 함께 만든 ‘현찰닷컴’이었으나 IT 거품 붕괴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약 1년 반 정도 방황하던 차에 2003년 6월 지인의 추천으로 세중나모의 CTO로 선임되며 나모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의 나모는 초창기의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였다. 벤처 거품이 한창이던 2000년 당시 나모의 주가는 주당 13만원을 호가했고, 시가총액은 6000억원에 달해 아시아나항공의 시가총액과 비슷할 정도였다. 하지만 벤처 거품이 꺼지자 주가도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는 사이 경영진들 사이에 내분이 생기고, 사원들도 경영진과 대립했다. 나모의 핵심 사업인 웹 에디터의 버전업은 중단됐고 시장상황도 계속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위기에 몰린 나모의 새로운 주인은 세중그룹의 천신일 회장이었다. 천 회장은 나모를 인수해 ‘세중나모 인터랙티브’라는 회사를 만들고, IT분야 경영전문가로 김 대표를 영입했다. 처음엔 기술분야만 담당하는 CTO였으나, 4개월 후 공동대표로 임명됐다.

김 대표에 따르면, 세중과 함께하던 당시 나모의 형편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맡았을 때는 아주 어려웠지요. 제품이 개발되는 중에 경영권 분쟁으로 핵심 개발자가 다 떠난 상황이라 소방수 역할을 하며 제품 개발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후 차근차근 집중한 결과 자리를 잡게 되었고, 최소한 상장회사로 그럭저럭 유지는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피처폰 시절 모바일 게임 퍼블리싱 사업에 도전한 결과 나모 전체의 규모도 커지고 수익구조도 좋아졌다. 하지만 나모의 핵심 부문이었던 소프트웨어 부문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지속적으로 웹 에디터 시장이 축소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세중의 천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누군가 소프트웨어 부문을 이끌고 죽기살기로 도전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판단으로 소프트웨어 부문의 분사를 결정한 것이다.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중소기업만 살아남는다” 2007년 11월 나모는 5000만원의 자본금과 65명의 직원만 가지고 독자생존의 길로 나섰다. 이전까지는 세중그룹이라는 그늘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광야에서 그늘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초창기의 어려움을 잘 넘긴 것은 “직원들이 잘 도와준 덕분”이라고 김 대표는 설명한다. 그만둔 직원도 더러 있었지만 90%의 직원들이 아무 것도 없는 회사에 남아줬다. “금융권에서 도와준 것도 큰 힘이 됐지요. 나모가 오래전 국민은행 역삼동 지점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몇 백 억씩 예금을 하던 시기였지요. 그때의 의리를 지켜주더군요. 국민은행 지점장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나모가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어려운 와중에도 한 번도 급여가 밀리지 않았습니다. 분사하자마자 증자에 성공했고, 금융권 도움도 받은 덕분입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긴 또 하나의 비결로 김 대표는 자신의 경험을 꼽았다. “최고 경영자가 IT업계에서 30년간 일을 해 IT를 잘 안다는 것이 리스크 감소 요인입니다. SI든 뭐든 나모 직원을 먹여 살릴 자신감은 있었습니다.” 그런 김 대표와 나모가 살아남기 위해 집중한 것은 회사의 아이덴티티(Identity)였다. 김 대표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해야 살아남는다. “저 회사 뭐하는 회사지? 금방 생각 안난다면 그 회사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나모는 IT 조금만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HTML 저작도구 만드는 회사라는 걸. 나모는 HTML 저작도구 만드는 회사의 넘버원으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흔히들 블루오션을 이야기하는데, 블루오션은 실제론 마켓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레드오션에서도 1등하는 자는 살아남지요. 나모는 1등으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업에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나모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왔습니다.” 나모의 2012년도 매출액은 60억원 정도로 흑자는 냈지만 큰 규모는 아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00억원으로 잡았는데, 현재까지의 실적으로 보면 낙관적이다. 나모의 창립은 1995년, 조금 지나면 20년이 된다. 국내에서 순수 패키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례는 흔치 않다. 2000년도에 웹 에디터로 시장을 석권했듯 이번엔 웹저작 솔루션 ‘웹트리’와 전자책 솔루션 ‘펍트리’로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것이 나모의 올해 포부다. 현재까지 매출의 대부분은 웹저작 소프트웨어에서 나오고 있다. 나모의 대표작 ‘웹 에디터’의 발전형들이다. 이들 소프트웨어는 예전엔 개인용 소프트웨어였지만 현재는 기업용으로 판매되며, 국내 유명 대기업 그룹웨어에 대부분 적용되어 있다. 최근 HTML5라는 새로운 웹 표준이 등장했는데, 김 대표에 따르면 이는 “새로운 기회”다. 그 기회를 차지하기 위해 나모는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HTML5를 완벽히 지원하는 에디터와 저작 툴 모두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나모의 두 번째 캐시카우는 전자책 솔루션 ‘펍트리’다. 기존의 전자책 제작 솔루션들과는 달리 최신 전자책 표준 포맷인 ‘epub3’를 완벽히 지원하는 것이 강점이다. “제대로 된 전자책을 만들고 배포하고자하는 기업과 개인은 펍트리를 쓸 수밖에 없다”고 김 대표는 확신하고 있다. 그런 김 대표가 30년간 IT 외길을 걸어오며, 17년간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집중해온 기업의 CEO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식에게 ‘내가 이거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되라”는 것이다. 작가나 예술가처럼 엔지니어들도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냈음을 자랑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 후배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로 꼽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 그것이 김 대표의 꿈이다.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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