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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전 美연방 하원의원 인터뷰]김창준의 ‘열정’은 ‘습관’이다

“젊은 청춘이여 세상을 향해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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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5호 정찬대⁄ 2014.02.10 13:58:31

▲김창준 전 미 연방 하원의원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미래한미재단’ 사무실에서 CNB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 이성호 기자

김창준(75세) 전(前) 미국 연방 하원의원은 1992년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 연방 하원의원(공화당)에 당선돼 내리 3선 연임에 성공했다. 지금도 김 전 의원의 이 같은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세워 ‘미국 500대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 ‘끈기’와 ‘열정’을 담보로 미국 정부의 창업 지원금을 받아 창립한 회사를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발판으로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가 아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이주한 한인 1.5세대도 아니다. 1961년 그저 ‘더 큰 꿈’을 좇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한 청년에 불과했다.

부딪히고 또 부딪혔지만 좌절하지 않았고 ‘악’으로 ‘깡’으로 젊은 시절을 버텼다. 서러움에 눈물도 수없이 흘렸고, 곱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견뎌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국인 청년’ 김창준은 미국 내 주류가 됐다. 그리고 이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또 다른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청년 김창준’, 그에게 ‘열정’은 ‘습관’이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과거를 생각하면 회한만 남아요”

김 전 의원이 지난날을 되뇌며 한 말이다. 그는 ‘성공적인 삶을 살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을, 그마저도 후회가 된다”고 강조했다.

백발이 된 김 전 의원의 눈빛은 여전히 ‘청년 김창준’의 모습을 하고 있다. 70 장년의 ‘여유’를 가질 법도 하지만 온몸 곳곳에는 여전히 ‘열정’이 배어있다. 그에게 열정은 어느새 ‘습관’이 된 듯해 보였다.

과거를 회상할 때는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인생역정을 돌이켰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할 때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또 한 번 스스로를 다졌다.

현재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운영하며, 미국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경륜을 조국을 위해 쓰고 싶다는 그는 이 나라를 “가능성이 무한한 역동적인 나라”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향해 좀 더 넓은 가슴과 시야를 갖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젊은 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는 것만 좋아한 젊은이…‘미국’을 택하다

김 전 의원은 ‘미국으로 가기 전 유년시절의 얘기를 들려 달라’는 기자의 물음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교 1학년을 다녔지만, 등록만 했지 공부는 안하고 노는 데만 집중했던 것 같다. 명동에서는 춤을 꽤 추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래도 사교성 하나는 좋았다”며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 늘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모님은 조금한 식당을 운영했지만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1950년대 우리의 시대상은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져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게 버거울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주위 친구들에 비해 조금 나은 형편일 뿐 그 역시 밥 한 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이던 시대를 살던 갑남을녀(甲男乙女)에 불과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김 전 의원은 자신의 나이 23살 되던 1961년 도미(渡美)했다.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가난한 나라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절(寺)에 들어가 고시 공부한다고 야단인데, 나만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21살 때 미군 장교와 우연히 알고 지내 영어를 배웠고(자신은 미군 장교에게 한글을 가르침), 막연히 미국을 꿈꿨다. 그리고 23살 되던 해에 그 꿈을 실천에 옮겼다.


미국에서의 고학…주도적 삶을 일깨우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채피대학(Chaffey College) 입학허가서를 들고 찾은 미국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미국에 떨어졌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 전 의원은 미국에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는 “정말 비장한 각오로 미국까지 왔는데, 막상 오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국에 온 뒤 일주일 만에 갖고 있던 돈이 다 떨어졌다. 완전 고아나 다름없었다”며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부모님께는 ‘제 걱정 말고 두 분이서 행복하게 사십시오’라고 말씀 드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코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 전 의원은 결국 성공을 거뒀고, 훗날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은 밥 한 끼 먹는 것이 급급하던 시대였다. 그렇게 고생해봤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웬만한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설움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아팠다.

김 전 의원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정말 많았다. 인종차별도 심했고, 한국인이라고 걸핏하면 무시했다”며 “그렇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살아야만 했다”고 지난날을 토해냈다.

▲사진 = 이성호 기자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채피대학을 거쳐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 USC,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남가주대학교라고 불림) 토목공학과로 편입학했다. 이후 동(同) 대학원에서 환경공학 석사학위를 받는 등 학업을 지속했다.

김 전 의원은 이에 대해 “성공하기 위해 공부했고, 나이는 어렸지만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해 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부하는 내내 주경야독은 계속됐다. 아침엔 신문배달, 낮엔 학업, 밤엔 식당에서 설거지 등을 하면서 점쳐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일깨웠다.

당시 상황에 대해 “누가 등록금만 대줬으면, 공부 좀 편하게 했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면서도 이내 “‘그래 이건 내 숙명이야,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 가는 거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지역 신문사에서도 일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훗날 국내 한 인터넷신문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포털에 게재된 그의 약력은 지금도 신문인과 전(前) 정치인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면 그래도 운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신문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우연찮다. 대학시절 군중 앞에 연설할 기회가 있었고,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군중들은 한국에서 온 한 청년의 진지한 연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때마침 현장에 있던 온타리오 시(市)의 지역 신문사(The Daily Report) 사장이 단상에서 내려온 김 전 의원에게 ‘무슨 얘길 했냐’고 물었고, 이에 김 전 의원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한국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고 답했다. 당당한 모습에 반했을까? 언론사 사장은 곧바로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월급이나 대우도 백인들과 동등하게 해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잃을 게 뭐가 있나”…‘창업’에 눈 돌리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몇 설계 회사에 다녔다. 하지만 그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이후 공무원 생활도 잠시 동안 했다. 김 전 의원은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국 공무원은 몇 년을 근무해야 한 단계 올라가는데, 미국까지 와서 그렇게 살 순 없었다”고 밝혔다.

결국 창업에 눈을 돌렸다. “맨주먹으로 와서 잃을게 뭐가 있느냐. 몇몇 회사에서 일한 경험과 기술을 통해 내가 직접 회사를 차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무일푼이었다. 경험과 기술만 갖고 미국의 중소기업청(SBA)을 찾았다. 대출을 받고자 했지만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열정’ 하나뿐이었다. 김 전 의원은 “담보가 있느냐고 묻길래 ‘전혀 없다’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경험, 비전, 능력, 그리고 맨주먹으로 와서 고학으로 학업을 마치고 가정을 이뤘는데, 뭘 원하느냐고 했다”며 “그런 나를 보고 미 연방정부와 중소기업은행이 지원을 해줬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미국 500대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된 ‘제이킴 엔지니어링’이다. 1978년 맨주먹으로 시작된 조그만 설계 사무소의 직원수는 250여명으로 늘었고, 각 주에 사무실을 둘 정도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아시아 기업인협회 첫 한국계 회장을 역임했다.

김 전 의원은 “이민자가 오늘날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는 “이민자는 조국이 싫어서가 미국에서 새 살림을 차리기 위해 꿈을 갖고 온다”며 “그렇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살았고, 결국 성공을 거둠으로써 미국의 오늘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성공한 기업인, 정치인으로 변신하다

김 전 의원은 회사가 성장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돈의 욕심보다는 역경을 이겨낸 ‘성공한 한인 1세대’라는 뿌듯함이 컸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가 아닌 실질적 제도개선을 통해 사람과 가까워지는 유의미한 일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정치’다.

그는 ‘여러 직업을 거치는 동안 가장 힘들게 결정한 것이 무엇인가’란 기자의 질문에 자동반사적으로 “정치”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치를 택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정치를 하는 동안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회한이 더 크다.

김 전 의원은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市)의 시의원을 거쳐 91년에는 시장을 지냈다. 그는 “내가 시장이 된 뒤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정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은 물론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공화당 소속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연방 하원의원을 지내는 쾌거를 이룬다.

젊은 시절 병원에서 청소하며 허드렛일 하던 한국인 고학생 청년 김창준은 이곳을 지역구로 3선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당선 후 병원에 찾아갔더니 깜짝 놀라더라.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하니 많은 분들이 나를 기억해 줬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에서 청소하고, 그 근처 아파트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결국 이 곳이 내 지역구가 됐다”며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인생 스토리를 보고 눈물을 흘렀다”고 했다.


유색인종의 공화당 적응기…‘타깃’이 되다

김 전 의원이 공화당의 연방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출 나거나 출중해서가 아니다. 김 전 의원 스스로도 “나는 꼭대기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서민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 ‘슬로건’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김 전 의원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체인지(Change·변화)’를 슬로건으로 제시했고, 빌 클린턴은 부시 대통령보다 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 하나로 대선에 승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화당은 메시지가 없는데, 나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 상대는 주 상원의원 출신 후보로 나보다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나는 ‘professional Polity, 즉 정치만 하던 사람을 그리고 그간의 정치를 통해 뭐가 됐느냐’며 지지를 호소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당시 적자가 심했는데, 정부도 개인 기업처럼 운영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들어맞았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미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지만 유색인종이 공화당 의원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는 “민주당의 경우 아시아계나 흑인들이 좀 있었지만, 공화당에서 아시아계는 나 혼자였다”며 “백인 정당에서 유식인종이 들어오니 금방 타깃이 됐다”고 전했다.

그는 민주당의 정책을 비판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으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고, 이후 선거자금 불법모금 혐의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기적적으로 3선을 했지만, 그만큼 고통도 많았다”며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했던 탓”이라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고 싶다

현재 미래한미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 전 의원은 한국에서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대통령실 국민경제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종심(從心·70세)을 지나 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는 그지만 여전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열정’ 만큼은 젊은 김창준 그대로다.

김 전 의원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길 원한다. 임종도 고향인 서울에서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연어 생각이 난다. 태평양을 거닐다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찾아와 알을 낳고 죽는 연어처럼 그렇게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며 “내가 가진 수많은 경험과 경륜을 조국을 위해 내려놓고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좀 더 일찍 올 것을…”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미국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을 뒤로 한 채 미국에서 온갖 고생과 핍박을 받았던 1960년대 초의 전형적인 한국인 고학생 김창준은 그렇게 또 다른 신화가 되어 미국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담당하고 있다.


김창준

△1939년 서울 출생 △보성고 졸업 △1963년 군 제대 후 도미(渡美) △1967년 남가주대(USC) 졸업 △1969년 남가주대(USC) 대학원석사 △이후 한양대 명예 박사학위 취득 △1978년 ‘제이킴 엔지니어링’ 설립 △1990년 미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시 시의원 △1991년 다이아몬드바시 시장 △1992년 캘리포니아주 연방 하원의원 당선 후 1999년까지 3선 연임 △2011년 귀국 후 ‘미래한미재단’ 설립 △2012년 ‘김창준정경아카데미’ 개설 △현재 대통령실 국민경제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김창준 전 미 연방 하원의원과의 인터뷰는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미래한미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사진 =  이성호 기자』

- 정찬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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