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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전시 - ‘징비록’ 특별전]충무와 문충 있었지만…통한의 42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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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44호 왕진오 기자⁄ 2015.08.17 11:38:05

▲‘징비록’ 특별전에 공개된 ‘난후잡록’. 사진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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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조선 최대의 전란으로 기억되는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기록 중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이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징비록’ 관련 전시회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8월 5일 열려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징비록' 특별전은 "징비록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꾸려졌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피난 중에 영의정과 도체찰사(군사령관)를 맡아 7년여 동안 선조 임금을 보좌하면서 국난 극복의 흔적을 남긴 고문서 및 유품 3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국보 제132호 '징비록' 원본과 보물 제160호 '난후잡록', 보물 제460호 '투구와 갑옷' 등이 눈길을 끈다.

전시에선 '징비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그가 제안해 작성한 문서나, 이에 선조가 결정해 내린 문서 등을 모두 이면지를 활용해 필사해두거나, 명나라 책력인 대통력(大統曆) 등에 그 때의 감회 등을 적어두었다.

▲류성룡이 썼던 보물 제460-1호 투구. 사진 = 왕진오 기자

훗날 류성룡은 하회 옥연정사에서 이들 기록들을 참조하면서 그가 경험했던 감회 등을 서술해 처음에는 '난후잡록'이라 했으나, '시경(詩經)' 소비(小毖) 편의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는 내용을 참조해 최종으로 '징비록'이라 명명했다.

이 전시는 풍산 류 씨 집안의 가족 이야기 '충효 이외 힘쓸 일은 없다'의 연계 전시로, 안으로는 '효'를 바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진정한 '충'을 실천했던 류성룡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획이다.

드라마 ‘징비록’의 종영 뒤 서점가에는 '소설 징비록'(이재운, 책이있는마을), '류성룡의 징비록'(장윤철, 스타북스), '징비록'(오제진, 홍익출판사), '징비록 역사에서 길을 찾다'(엄광용, 주니어RHK), '책임지는 용기, 징비록'(최지운, 상상의집) 등 2015년에만 관련 서적 29종이 출간됐다.

▲징비록책판.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그동안 임진왜란과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는 이순신이나 권율 등 전장에 직접 참여해 전적을 세운 장수들이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류성룡은 약방의 감초처럼 잠시 등장하거나 자막으로 그가 주장했던 '제승방략' 체제에서 '진관체제'로의 복귀에 관련한 내용이 있었다는 기록만 비추어졌다.

미래 경계하는 ‘징비’ 있었지만 결국 조선은…

'눈물과 회한으로 쓴 7년의 전란의 기록'을 감수한 김석근 건대 강사는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이 아니다. 하지만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징비(懲毖)’는 시경(詩經)에서 따온 말로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징비록’은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문학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류성룡이 저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 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에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이, 부친 생전의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厓集)’과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보관돼 있는 류성룡의 친필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 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 공개된 국보 제132호 징비록 친필본.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류성룡은 이순신이 전사하고 왜란이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모든 관직을 삭탈 당한 채 고향 안동 하회로 돌아갔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면서 조선의 뒷날을 위해 그가 온몸으로 겪었던 임진왜란의 경험과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그의 ‘충’을 보여주기 위해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징비록’을 썼다.

'징비록'은 7년여에 걸친 전란 동안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상황을 기록하고 일본의 만행을 성토하면서, 그러한 비극을 피할 수 없었던 조선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징비'의 정신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는 없고,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전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임진왜란 같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 비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보물급 유물과 함께하는 징비록”

올 초부터 방송과 출판 분야에서 화제를 모은 '징비록'을 전시로 꾸민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드라마 종영 뒤 전시를 진행한다는, 시점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풍산 류 씨 관련 전시 '충효 이외에 힘쓸 일은 없다'전을 기획하면서, '효' 부분만을 보여준 것 같아 '충'을 주제로 류성룡 유품을 정리해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완성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사진 = 왕진오 기자

드라마 '징비록'을 통해 일반인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그는 전했다. 준비 단계에서 안동 국학진흥원 소장의 국보 제132호 '징비록' 친필본의 전격 대여가 결정되면서, 징비록 집필 시기의 사용 유물들을 통해 징비록의 내용과 의미를 되새겨보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류성룡에 대해 최 학예연구관은 "학자로서 나라를 위해 평생 봉사했음을 징비록을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그의 삶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시호 ‘문충공(文忠公)’에서도 류성룡에 대한 평가를 알 수 있다“며 "하나하나가 소중한 국보와 보물급 유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전시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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