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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 - ‘현대미술, 박물관에 스며들다’] 구석기 유물실에 웬 백남준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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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57호(창간기념호) 왕진오 기자⁄ 2015.11.16 10:40:18

▲강강훈, ‘Smoke Player 3’. 캔버스 위에 유채, 227 x 145cm, 2014. 사진 =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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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고고학적 자료나 전통 유물이 중심이 되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 공간에 현대미술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 콘텐츠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자리다.

경기문화재단 산하 6개 뮤지엄을 통합한 뮤지엄본부가 새로운 위상 구축과 경기도 내 사립 뮤지엄들과 협업을 통해 도내 뮤지엄 활성화를 위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현대미술, 박물관에 스며들다’전을 10월 28일부터 용인시 소재 경기도박물관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전시는 전통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 상설 전시장에 백남준 아트센터와 경기도미술관이 소장한 현대미술이 개입해 들어가는 형태로 박물관의 기존 기능을 교란시킨다. 크로노스(Chronos: 그리스 신화 속 시간의 신. 사람-황소-사자의 세 얼굴을 갖고 있다)의 얼굴처럼 방문자를 놀래키는 방식이다. 

구석기시대 전시실에 놓인 백남준의 ‘TV 시계’는, 그 당시엔 가시화될 수 없었으나 존재하던 시간의 문제를 제기한다. 석기시대 당시의 최첨단 문물이었을 석기와, 오늘날 최첨단 미디어 아트의 상관성을 보여준다고 할까.

▲불경 위를 흐르는 조환 작가의 철제 ‘배’ 작품. 사진 = 경기문화재단

백남준(1932∼2006)의 ‘TV 시계’는 시간의 전개에 따른 연속성을 경험시킨다. 총 24개의 모니터로 설치된 작품은 모니터의 주사선을 조작해 선 하나만이 빛을 발하는 ‘선을 위한 TV’와 같은 원리로 제작됐다. 

하루 24시간을 상징하는 24개의 모니터가 각각 다른 기울기의 선을 보여주며, 한 바퀴 회전하는 그 각도를 24개로 나눠 24시간을 표현한다. 24개의 모니터 중에서 12개는 흑백이고 나머지 12개는 컬러로,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을 전달한다.

신석기실 디오라마(diorama, 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해 하나의 장면을 만든 것)에는 박승원(35)의 ‘원스텝’ 싱글채널 비디오가 놓였다. 비언어적이고 원초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정을 담은 퍼포먼스 비디오를 통해 기존 전시 공간을 시공간 초월의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원스텝’은 현대를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원초적 표현수단인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모습을 새롭게 정의하고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백남준의 ‘TV 시계’가 경기도박물관 구석기실에 설치됐다. 사진 = 경기문화재단

초상화실에는 과거의 초상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물성이 강조된 극사실 묘사기법과 팝아트적 표현으로 인물의 성격과 감정까지 그려낸 강강훈(36)의 초상화가 걸렸다. 전통 초상화의 사의(寫意,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해 그리는 방법)와 전신(傳神, 그려진 사람의 얼과 마음을 느끼도록 그리는 기법)의 문제와는 사뭇 다른 미술 어법의 충돌이다. 

박물관이 현대미술을 품고 소통의 장 펼쳐.
잠자던 유물, 현대미술과 만나 화려한 부활

도자기실엔 청자와 백자의 파편들로 재구성된 새로운 도자기 조형인 이수경(52)의 ‘번역된 도자기’가 배치됐다. 장인정신과 실험적 예술 사이에서 심미성과 예술의 근원적 가치를 제기하기 위해서다. 실제 오브제로서의 도자기와 그려진 화면으로서의 도자기 오브제의 간극을 보여준다. 

출토복식 진열장엔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식 꽃잎이 흩뿌려졌다. 의복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여인의 초상이 함께 등장해 출토복식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조선시대 화가이며 서예가,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며 진취적 시각을 가졌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작품과 실험적 동양화의 병치를 통해 사군자의 사의나 서예의 기운생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다. 

▲박승원 작 ‘One Step’ 싱글채널 비디오가 설치된 전시실. 사진 = 경기문화재단

전통 산수화와 병치된 미디어 작품은 사진과 모니터의 합성을 통해 창밖의 변화하는 풍경을 현대적 산수로 재해석한다. 디지털 이미지로 재해석된 풍경 역시 현대적 산수의 재해석이다. 

‘불경(佛經)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조환(57) 작가의 육중한 철제 나룻배, 한국 여성의 삶을 주제로 익명의 여성들을 가시화한 조덕현(58)의 ‘This Allegory’ 작업도 함께한다.

근대적 인물을 현대적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블랙박스, 우물 속에 투사된 민족들의 언어와 삶을 통해 신화와 언어의 기원을 탐구하는 작품 등 현대 작가 15명의 작품들이 박물관 곳곳에 개입돼 들어갔다.

▲경기도박물관 도자실에 설치된 고영훈 작가의 ‘머루주 4’. 사진 = 경기문화재단

이러한 개입은 충돌이고 낯설게 만든다. 그런 측면과 함께 혼합주의 지향을 보여준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개입물이 드러나지 않는 개입을 통해 기존의 박물관 전시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공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해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는 방식은, 기존 공간을 현재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박물관은 유물의 무덤이 아니다. 미술관처럼 늘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현재적 공간이 돼야 한다. 땅속에서 잠자던 유물을 발굴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듯, 출토 유물에 내재된 현재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것이 박물관의 새로운 사명이라는 현대적 해석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가 눈길을 끄는 이유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김찬동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장 
“다음엔 음악·무용으로 유물 깨울터”

“땅속에서 잠들다 빛을 본 유물들이지만, 시간이 멈춘 듯 죽어 있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박물관의 변화를 꾀하려 했습니다.”

현대적 방식으로 전통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김찬동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장의 포부다.

▲김찬동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장.

김 본부장은 “현대미술 작품을 들여온다는 구상에 대해 박물관 측이 처음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자신들이 일궈놓은 터전을 빼앗는 것 아니냐는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물 전시장 이곳저곳의 유휴 공간에 미술 작품이 설치된 이후 죽은 듯 보이던 유물들에 생기가 돈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그간의 준비 과정을 설명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 4월 재단 산하 6개 기관이 본부로 통합된 이후 나온 아이디어의 결실이다. 새로운 콘텐츠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욕의 산물이기도 하다.

짧은 방문 시간 동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전시를 꾸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김 본부장은 “전통과 유물 사이에 현대미술을 넣어도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작품을 갖고 전시를 만들었다”며 “미술 작품이 가진 의미와 유물이 설명하는 시대성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다”고 자평했다.

“단순히 나열식의 전시는 배제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기도 내 박물관 유물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미술을 우선 적용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공연이나 음악, 무용 등 타 장르와 연합해 유물이 가진 정신을 현대 예술로 변환시키는 시도를 하겠습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도는, 경기도박물관 주변에 추진 중인 뮤지엄 클러스터, 백남준의 거리에 들어설 크고 작은 문화 공간들과 함께 일대를 문화 거리로 변신시키려는 마스터플랜의 신호탄으로 봐도 좋다는 전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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