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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의 공공사사(公共私事)] 글자 없는 글, 그림 없는 그림

자연경(自然經), 자연이 곧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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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4호 김연수⁄ 2016.10.07 18:17:39






(CNB저널 = 김집사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文來堂) 운영자, 생존인문 팟캐스트 ‘너도 고(古)양이로소이다’ 진행자)

한자, 글자이면서 그림

“예전부터 제가 어떤 형상을 본떠 그리면, 생명력을 갖게 돼요.” 우루시바라 유키(漆原友紀)의 애니메이션 ‘충사(蟲師)’에 등장하는 한 소년은 붓으로 무엇이든 쓰거나 그리면 그 모양 그대로 흐물흐물 꿈틀거리며 실제의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글씨와 그림이라는 ‘작품’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글씨와 그림은 자연을 모사한 인공의 것이지만, 다시 생명을 얻어 모사 이전의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생명체로 변하는 글자는 로마자나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아니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상형문자인 한자(漢子)다. 여기서 생명체로 변하는 그림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근대의 회화가 아니다. 대상의 형상이나 특징을 약호화한 상형문자와 같은 그림이다. 새 조(鳥)와 벌레 충(虫)이라는 한자는 글자이면서 그림이다. 글자가 그림이고 그림이 글자다. ‘한자=그림’은 자연을 닮았지만 자연이 아니고, 자연이 아니지만 자연을 닮았다.

글자로 쓰인 자연, 글자로 쓰이지 않은 경전

조선 후기의 작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천지 사방과 만물에 문장의 정신과 뜻이 펼쳐져 있으니, 천지자연이야말로 ‘글자로 쓰지 않은 문장(不字不書之文)’”이라고 했다. 그래서 연암은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뜰에 여름새들이 울고 있는 광경을 보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이렇게 외친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날아가고 날아온다(飛去飛來)’라는 글자고, ‘서로 울며 화답한다(相鳴相和)’라는 문장이구나! 갖가지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문장이라고 한다면, 저보다 나은 문장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진정 글을 읽었노라.”


▲치달, '조충'. 2016년 10월. 문래당.



청나라 초기의 작가 몽성(夢醒) 요연(廖燕)은 천지 만물이야말로 ‘글자 없는 글(無字書)’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천지가 실로 육경(六經, 중국 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이 된다. 해와 달, 별이 찬란하게 펼쳐진 것과 바람과 비, 천둥, 우레가 진동하는 것과 산천과 초목, 금수와 물고기가 크고 작고 신령스럽고 우둔한 것이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에 밝게 드러나 있으니, 이 모두가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의 문장으로 변화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름새들이 나는 광경이야말로 ‘비거비래(飛去飛來)’라는 글자이고, 여름새들이 우는 광경이야말로 ‘상명상화(相鳴相和)’라는 문장이다. 해(日)와 달(月)과 별(星), 바람(風)과 비(雨), 천둥(震)과 우레(雷), 산천(山川)과 초목(草木), 금수(禽獸)와 물고기(魚) 등은 자연 그 자체이면서 자연을 닮은 한자다. 천지자연의 살아 약동하는 삼라만상이 곧 글자이고 문장이다. 천지자연의 살아 약동하는 삼라만상이 곧 육경으로 변화했다. 글자 없는 글이 천지자연이고, 글자로 쓰인 천지자연이 유가경전(儒家經傳)이다.

▲치달, '산천목월'. 2016년 10월. 문래당.


그래서 연암의 후배 작가인 서유구(徐有榘)는 ‘자연이 곧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자연경(自然經)’이라고 지칭했다. 글자로 쓰인 것만이 텍스트가 아니라 글자로 쓰이지 않은 자연 그 자체야말로 가장 본원적 텍스트라는 말이다. 원래 자연은 천공(天工)이고 경전은 인공(人工)이다. 자연이 가장 본원적인 경전이라면, 천공은 인공이 지향하는 가장 본원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근대의 문명과 달리 중세의 문명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중세의 인공, 곧 유가 문명의 근저에는 항상 ‘자연’이라는 텍스트(經)가 있었다.

문장과 음악, 그림에서의 자연 또는 ‘역경’

명나라 말기의 어록 ‘채근담(菜根譚)’도 ‘글자 없는 글’에 주목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글자 있는 글(有字書)’이나 읽을 줄 알았지 ‘글자 없는 글(無字書)’은 읽을 줄 모르며, ‘줄이 있는 거문고(有絃琴)’나 뜯을 줄 알았지 ‘줄이 없는 거문고(無絃琴)’는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거문고(琴)와 글(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글자 없는 글’이 자연이라는 천공의 문장이라면, ‘줄이 없는 거문고’는 자연이라는 천공의 소리이다. 문장뿐만이 아니라 가장 본원적인 음악 또한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한다. 문장과 음악뿐이겠는가? 문장과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남조의 양나라 문인 유협(劉勰)은 자신의 문론(文論)인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해와 달, 산천은 모두 자연의 규율이 만들어낸 ‘무늬(文)’이기에 “말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것은 우주의 기본 정신”이라고 했고, 남조의 송나라 화가 왕미(王微)는 자신의 화론(畵論)인 ‘서화(敍畵)’에서 “그림은 예술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역경’의 괘(卦)의 무늬와 같은 체(體, 몸)를 이루어야 한다”며, “한 자루의 붓으로 태허(太虛, 하늘)의 체를 본떠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무늬(문장)를 만들어내는 것이 자연의 규율이라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경’이다. 그런데 자연의 규율 곧 그 변화의 원리가 응축된 경전이 ‘역경’이고, ‘역경’이라는 유가 경전의 본원적 토대를 이루는 경전이 ‘자연’이다.

자연이 글자로 쓰이지 않은 경전이라면, 경전은 글자로 쓰인 자연이다. 자연이 그려지지 않은 경전이라면, 경전은 그려진 자연이다. 따라서 지고의 문장이 글자로 쓰이지 않은 ‘자연=경전’이라면, 지고의 그림은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자연=경전’이 된다. 어떻게 글자 없는 글을 쓰고 그림 없는 그림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죽어 있는 글과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연’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충사’의 소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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