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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의 공공사사(公共私事)]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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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4호 문래당 김집사⁄ 2016.12.21 10:06:34







(CNB저널 = 김집사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文來堂 연구원)


자연과 인간, 윤리적 중세와 비윤리적 근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 시대의 고전적인 주제이다. 여기에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과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이 있다. 중세의 인간에게 자연이 문명의 최종심급이자 규제적 이념(지표)이라면, 근대의 인간에게 자연은 문명이 극복해야 하고 나아가 통제해야 할 대상이다. 전자에게 자연이 곧 본원적 텍스트로서의 경전(經傳, 自然=經)이었다면, 후자에게 자연은 곧 인간을 둘러싼 풍경(風景) 내지 환경(環境)에 불과하다.

전자에서 주객은 정신적ㆍ물질적으로 합일되고자 하고 후자에서 주객은 정신적ㆍ물질적으로 분리되고자 한다. 자연 안의 극미한 존재였던 인간이 어느새 ‘자연과 인간’ 내지 ‘인간과 자연’처럼 등위접속사로 상호 대등해지거나, 급기야 만물의 영장으로 자연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은 윤리적ㆍ생태적이며,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은 비윤리적ㆍ반생태적이다. 

자연과 인간, 비주체적 중세와 주체적 근대

한편 여기에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과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이 있다. 중세의 인간에게 자연은 인간사회의 여러 관계와 질서를 연역해내기 위한 원리적 이념(지표)이라면, 근대의 인간에서 자연은 인간사회가 도달한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구습(舊習)의 사고체계이다. 

전자에게 자연은 하늘의 땅에 대한, 양(陽)의 음(陰)에 대한 지배라는 자연계의 원리에 의거하여 유비적으로 군주의 신하에 대한, 아비의 자식에 대한, 지아비의 지어미에 대한 상하귀천의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질서로서 간주된다면, 후자에게 자연은 새로이 등장한 주체적ㆍ작위적 인간사회(근대 문명)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자연=사회’라는 낡은 전근대적 질서로서 간주된다. 후자에게 있어 부분(사회)은 더 이상 전체(자연)를 구조적으로 무한히 닮아가는 자기 유사적 반복의 기하학적 순환계(Fractal Structure)가 아니다. 인간계는 자연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인간계의 자유와 평등은 결코 ‘자연’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은 ‘자연’과의 다툼을 통해 초래된다는 사고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은 비주체적ㆍ체제내적이며,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은 주체적ㆍ체제외적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초상. (사진=위키피디아)


연암의 말똥구리와 마키아벨리의 포르투나

연암 박지원은 ‘말똥구리 시집 서문’에서 “말똥구리는 자신의 말똥을 아껴서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하였다. 이 아포리즘은 한편으로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정대로 삶을 즐긴다는 긍정적 세계감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연계=인간계’의 상하귀천으로서의 불평등한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할 것을 종용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울러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고대 로마의 두 신성으로, ‘비르투(Virtu)’라는 자발적 의지와 역량을 지닌 미덕의 남신과 ‘포르투나(Fortuna)’라는 자연 내지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서의 운명의 여신을 대비한 바 있다. 이 메타포 또한 한편으로는 근대 문명과 함께 탄생한 과학적ㆍ합리적 인간 주체(비르투)가 자연과 운명(포르투나)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반생태적 오만으로 변질될 가능성과 함께, 근대적 인간 주체가 ‘자연계=인간계’의 중세적 신분질서를 내파함으로써 자연과 신이라는 상급자로부터 인간 자신을 분리시켜 스스로에게 주체적 자율성을 부여해내는 긍정적 세계감각으로 사고될 수 있다. 이른바 “기존의 도덕을 거부하고 너 자신의 도덕을 창출하라”(니체)는 근대적 주체를 예고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초상. (사진=위키피디아)


중세에서의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 
근대에서의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

그런데 위의 구도는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과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을 각각 중층적으로 다면화시키고 있음에도, 여전히 전자를 중세의 것으로 후자를 근대의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전자를 긍정하고 후자를 부정함으로써 근대(기술문명)를 반성하든,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함으로써 중세(신분사회)를 반성하든, 결국은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은 중세의 고유한 특질로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은 근대의 고유한 특질로 각각을 고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동아시아의 유가적 세계에도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이 존재하고, 근대 서구의 과학적 세계에도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이 존재한다(혹은 한 명의 인간 안에 이러한 두 가지 속성이 공존할 수도 있다). 먼저 후자에 있어, 근대가 중세를 처음 내파해낼 때와 같이 종교나 신분 등의 어떠한 자연사적 권위와 전통에도 복속당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를 통치하고자 하는 주체적ㆍ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더 이상 다수가 아니다. 가령 근대와 함께 새로이 등장한 가치인 자본(Capitalism)과 민족(Nation), 국가(State) 또한 어느새 자연적이고 자명한 권위와 전통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근래 한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되고 있는 금수저와 흙수저, 헬조선 등의 신조어 또한 지금의 한국이 신분사회였던 조선처럼 출신에 따라 신분이 고착화되었음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은 ‘(헬)조선화’되고 있으며 근대적 개인은 ‘중세화’되고 있다. 근대에서의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이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맞물림과 어긋남

한편 후자의 경우, 중세 동아시아의 자연은 ‘하늘(天)’ 곧 ‘천도(天道)’ 내지 ‘천명(天命)’으로 호명된다. 주지하듯 ‘천(天)’이라는 개념은 양면적이다. 법칙적 의미로서의 하늘이 ‘천도(天道)’라면, 인격적 의미로서의 하늘이 ‘천명(天命)’이다. 기왕의 사상사적 통념으로는 삼라만상의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서의 하늘이든 인격적인 초월적 주재자로서의 하늘이든, 자연 혹은 조물주는 인간 사회 및 인간 개개인과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른바 한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선진(先秦) 시대의 천관(天觀)을 종합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 그것이다. 

천도(天道)가 최종심급의 규제적 원리로서 유가적이면서도 운명론적인 중세 자연철학과 세계인식의 절대적 토대라면, 인사(人事)는 정치사회적 격변과 문명, 역사의 흥망성쇠부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의 궁달과 화복을 모두 지칭한다. 중세 유럽에서 자연철학의 외연과 내질이 단지 자연관만이 아니라 신학과 윤리학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총체적 세계인식으로 사고되어왔던 것처럼, 천도(天道)로 기표화된 중세 동아시아의 자연철학 또한 거시적인 역사의 흥망성쇠와 개별적인 인간사의 궁달과 생사를 운명론적(자연사적)으로 결정짓는 부동의 원리이자 규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인상관적 질서는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일치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중세 동아시아에는 이상의 경우와 달리, 역으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어긋남’이라는 실존적 인식 위에서 천도가 과연 정의로운가를 의심하거나(사마천) 천도와 인사가 무관하다거나(유종원) 나아가 천제(天帝)와 한 선비가 서로 쟁투(爭鬪)를 벌인다거나(유몽인) 급기야 인리(人理 인간의 이치)가 오히려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를 이길 수 있다는 사고(유우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천인관(天人觀)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천도 내지 천명의 선천적이고 본원적인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가치는 절하되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된다. 인간은 선악(善惡)에 따라 하늘에 의해 상서(祥瑞)나 재이(災異)를 받는 유기체적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적ㆍ정치적ㆍ실존적 국면 안에서 끊임없이 천도, 천명, 천제, 천리와 갈등하고 경합하는 주체가 된다. 중세에서의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이다.

천명(天命)에 대항하는 인간(人間)
천도(天道)와 경합하는 인도(人道)

천명에 대항하는 인간은 곧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이다. 중당(中唐)의 문인지식인 유우석(劉禹錫)은 ‘천론(天論)’이라는 글에서 자연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제압하지만, 인간계에서는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 힘이 강한 자보다 더 큰 존중을 받는다 하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자연 상태에서는 비록 성인이나 현인이라 할지라도 강한 자들과 경쟁하여 이길 수 없기에 이것은 ‘하늘의 도(天之道)’가 인간의 도를 이기는 것이지만, 예의와 윤리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비록 힘이 강한 자라도 성인이나 현인과 경쟁하여 이길 수 없기에 이것은 ‘인간의 도(人之道)’가 하늘의 도를 이기는 것이라 하였다. 

독일 태생의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 또한 ‘혁명론’에서 “자연 상태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기에 ‘법’을 통해 자신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인위적인 제도, 즉 폴리스를 필요로 했다” 하였다. 자연 상태는 약육강식의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세계이다. 오로지 ‘문명(文明)’을 통해야만 ‘자연’을 넘어서는 자유와 평등의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곧 ‘천명에 대항하는 인간’형은 근대의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중세 동아시아적 형태이자 서구적 근대가 가닿은 ‘자연과 인간’에 관한 통찰에도 맞닿을 수 있는 중세 동아시아의 자연철학적 세계인식이라 할 수 있다. 천명(天命)에 대항하는 인간(人間), 천도(天道)와 경합하는 인도(人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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