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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알래스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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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42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7.07.03 10:06:30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9일 차 (앵커리지)

알래스카에서 만난 사람들 1

어제 오늘 사이에 숙소에서 독특한 알래스카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우선, 알래스카 백팩커스(Alaska Backpackers) 게스트하우스 종업원인 콩(Kong)이다. 라오스 소수민족 흠몽(Hmong)족 출신인 그는 미국 위스콘신에서 태어나 텍사스부터 알래스카까지 안 살아 본 곳이 없다. 보잘 것 없는 살림에 아이가 네 명이지만 자녀 양육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미국의 사회보장 제도 때문인지 그의 낙천적인 사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삶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접근 방식은 나로 하여금 잠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회계사 브루스(Bruce)는 또 어떤가? 노인인 줄 알았는데 따져 보니 나보다 젊다. 아마도 마약 때문인 듯 대화하는 내내 손을 떤다. 가족과 헤어지고 아내의 행방은 모르는 채 홀로 일자리를 구하러 앵커리지의 거리를 서성인다. 그래도 쉬지 않고 너털웃음을 연발한다. 

뉴멕시코 출신 짐(Jim)은 여기서 자동차 정비사로 일한다. 부모가 대학교수인 그는 형제들도 모두 번듯하지만 자신만 자동차 정비공이라고 자조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한때는 좋은 집, 좋은 차에 풍요롭게 살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한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프론티어, 달리 말하면 알래스카의 ‘막장’ 같은 또 다른 모습이다. 

▲수제 캠퍼카를 타고 여행 중인 호주인 부부 리차드와 줄리. 사진 = 김현주

앵커리지 시내 탐방

오늘은 도시 탐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다. 탐방 코스에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철도역이다. 덩그러니 커다란 역사(驛舍)가 멀리서도 보인다. 어제 방문했던 슈워드와 페어뱅크스(Fairbanks)를 잇는 478마일(765km)의 알래스카 철도는 엄지손가락만 한 모기떼와 험준한 지형, 그리고 잔인한 날씨와 싸워가며 1923년 개통되어 알래스카 내륙 개발을 촉진했다. 열차 역 건너편 작은 언덕 위에는 아이젠하워 알래스카 주 승격 기념비(Eisenhower Alaska Statehood Monument)가 알래스카 철도와 더 멀리 앵커리지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북반구 항공 교통의 요충

방문자에게 의미 있는 앵커리지의 또 다른 랜드마크는 레졸루션(Resolution) 공원이다. 도심 서쪽 끝 바닷가 언덕 위에 조성된 작은 공원 중앙부에는 1778년 인근 지역을 항해한 쿡 선장(Captain Cook)의 동상이 서 있다. 맑은 날에는 이 공원에서 멀리 북쪽으로 디날리 산(Mt. Denali 또는 Mt. McKinley)이 보인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아니다. 그것 못지않게 인상적인 것은 앵커리지가 항공 교통의 요지임을 설명하는 공원 안내 문구였다. 항공기로 서울 9시간, 도쿄 7시간, 뉴욕 8시간, 시카고 6시간, 프랑크푸르트 7시간 등 동아시아, 북미, 유럽 세 대륙의 중심부 어디라도 항공기 9시간 이내 거리라는 내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래스카는 미국의 보배이다.

이제야 존중받기 시작한 원주민 역사와 문화

마지막으로 알래스카 박물관에 들른다. 알래스카의 자연과 역사, 예술을 설명하는 종합 박물관이다. 그중에서도 원주민 역사에 관한 전시물들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의 통치, 그리고 1867년부터 미국이 이어받은 통치 속에서 방치된 원주민 역사와 문화의 고유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뒤늦은 자각의 결과 박물관에 한 자리 차지하게 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원주민이 이 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역사는 1만2천 년이지만 유럽인들이 들어온 것은 고작 300년이다. 그러나 오늘날 원주민은 11만 명으로 알래스카 전체 인구의 15%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우면서도 낯설다. 근대 국가 성립 훨씬 이전부터 살아온 원주민이지만 이제는 살아왔던 곳에 따라서 미국, 캐나다, 또는 러시아의 변방 소수민족으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10일 차 (앵커리지 → 디날리 국립공원 → 페어뱅크스)

디날리 산을 바로 옆에 두고도

디날리 국립공원을 거쳐 알래스카주 내륙의 중심도시 페어뱅크스(Fairbanks)까지 북행을 시작하는 아침, 그러나 굵은 비가 내린다. 페어뱅크스까지는 380마일(608km)의 먼 길이다. 아름다운 대자연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펼쳐진다. 북미 최고봉 디날리를 바로 가까이 지나가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전혀 볼 수 없음을 매우 애통해한다. 어제 앵커리지 시내 레졸루션 공원에서라도 봤어야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으니 아쉬움은 두 배로 는다.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디날리 산은 여름철에는 거의 늘 구름에 가려있다고 한다. 정상은 한 달에 며칠 모습을 드러낼 뿐이니 애당초 6194m 북미 최고봉까지 한 번의 여행길에 보려고 했던 것이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박한 페어뱅크스 도심 풍경. 사진 = 김현주

디날리 국립공원

중간에 마을도 주유소도 없는 도로를 265마일(424km) 달려 디날리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앵커리지를 출발한 지 5시간 지났다. 디날리는 원주민 언어로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공원 안에는 디날리 산을 비롯하여 광활한 자연과 함께 곰, 순록, 무스, 산양, 늑대 등 야생 동물이 많다고 한다. 모든 곳이 야생 동물의 서식지 또는 출몰지이지만 오늘은 비 때문에 그들조차도 자취를 감춘 듯하다. 공원 안은 울창한 타이가(Taiga) 지형과 나무가 작아지는 툰드라(Tundra) 지형이 번갈아 등장하듯이 날씨 또한 변덕스럽다. 수시로 개었다가 비가 오고, 구름이 끼었다가 해가 쨍쨍 나기를 반복한다. 하이킹과 등산복 차림의 방문자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최소한 3∼4일은 묵으면서 셔틀버스로 깊숙한 곳까지 다녀야 하는 거대한 국립공원을 자동차에 앉아 주유하며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각박한 일정과 여유 없는 나의 여행 방식에 스스로 쑥스러워한다. 

북극권 전진 기지 페어뱅크스

공원을 벗어나 두 시간 남짓 더 달리니 페어뱅크스다. 알래스카 내륙의 중심 도시가 찬란한 여름 날씨와 함께 나를 맞는다. 숨막히는 절경의 파노라마로 이어진 환상의 도로 끝에 만나는 페어뱅크스의 하늘은 맑다. 북위 65도, 조금만 더 올라가면 북극권이 시작되는 곳인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햇볕이 따갑다. 올봄 내내 뿌연 먼지를 품은 서울 하늘 밑에서 지낸 여행자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파란 하늘을 만끽한다. 페어뱅크스는 북극권 전진기지이다. 여기서 달튼 하이웨이(Dalton Highway)로 118마일(189km)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극권(Arctic Circle)이 시작되고 그곳에서 더 올라가면 북극해를 만난다. 모험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북극 관광의 베이스 캠프이기도 하다. 6월 하순 하지 직후에는 거의 24시간 해가 지지 않아 밤 11시에 야구 경기를 시작해서 새벽 2시까지 이어질 정도라고 한다. 


11일 차 (페어뱅크스 → 발데즈)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오늘은 남쪽 항구도시 발데즈(Valdez)까지 내려가는 365마일(584km)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한번 움직였다 하면 몇백 km인 알래스카의 도로에는 차량이 드물다. 페어뱅크스에서 출발하여 몇 시간 동안 일망무제의 냉대 원시림을 건넌다. 러시아 캄차카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델타 정션(Delta Junction)을 지나자 평원이 끝나고 알래스카 산맥이 기다린다. 드디어 알래스카 파이프라인(pipeline, 송유관)도 만난다. 알래스카 북부 뷰포드 해(Beauford Sea) 프루도 만(Prudhoe Bay)에서 북태평양 항구 도시 발데즈(Valdez)까지 800마일(1280km) 거리를 잇는 파이프라인이다. 1977년 완성하여 하루 62만 배럴, 미국 전체 소비량의 4%를 공급한다. 지름 1.2m의 송유관이 지형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남쪽으로 뻗은 풍경이 장관이다. 이 송유관을 따라 원유는 시속 5.5마일(9.3km)로 이동하여 프루도 만에서 선적항 발데즈까지 엿새 만에 닿는다.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사진 = 김현주

▲리차드슨 하이웨이(Richardson Highway)를 따라 발데스로 가는 길. 사진 = 김현주

발데즈 행 천상의 드라이브

남쪽으로 더 전진하여 톰슨 패스(Thompson Pass)를 지날 즈음 리차드슨 하이웨이(Richardson Highway)는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에게 천상을 지나는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며 화답한다. 고개마다 빙하가 흘러내려와 있고 폭포와 설산, 산정(山頂)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은 일찍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연출한다. 페어뱅크스에서 발데즈까지 머나먼 길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와버린 것이다. 

엑손 발데즈 사건

도대체 이 아름다운 곳에서 재앙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온 세상을 놀라게 했던 1989년 3월 엑손(Exxon) 유조선 원유 유출 사건 말이다. 좌초로 생긴 배 바닥의 구멍을 통하여 선적한 125만 배럴 중에서 26만 배럴이 바다로 흘러나온 초대형 환경 재앙은 그러나 위대한 자연의 자정 능력과 인간의 복구 노력 덕분에 이제는 흔적이 없다.

그림같은 발데즈 항

알래스카의 또다른 부동항 발데즈는 원유 적출항이자 프린스 윌리암 사운드(Prince William Sound)의 비경과 빙하 피요르드 관광의 관문이다. 자동차로 앵커리지까지는 300마일(480km) 거리이지만 여름철에 운행하는 카페리를 타고 위티어(Whittier)를 경유하면 150마일(240km)로 줄어든다고 한다. 높이 솟은 해안 산맥에 둘러싸인 발데즈는 그 자체가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발데즈의 안온한 품에 안겨 지나온 먼, 그러나 아름다운 길을 돌이켜 보며 알래스카의 아름다움에 감탄, 또 감탄한다.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저 멀리 조국 땅 어느 구석 음험한 공간에서 시시각각 탐욕을 추구하는 무리들도 일생에 한번쯤은 신이 만들어 놓은 대자연의 조화를 와서 직접 보기를 권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오늘 밤 숙소는 가격이 무척 비싼 발데즈 대신 힘들지만 왔던 길을 한 시간 남짓 돌아나가 시골 작은 마을 숲속 모텔로 정했다.  


12일 차 (발데즈 → 앵커리지)

영겁을 흐르는 빙하

서늘한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 알래스카의 마지막 여정에 오른다. 워낙 땅덩어리가 큰 알래스카는 제대로 이곳 저곳 보려면 하루 수백 마일씩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숙소가 있는 카퍼 센터(Copper Center)에서 앵커리지까지는 200마일(320km), 여전히 아름다운 길이다. 중간에 지나치는 작은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차를 멈춘다. 멀리 하얀 빙하가 은하수처럼 흐른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이다. ‘Glacier View’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이다. 영겁의 세월을 그렇게 흘렀을 빙하는 인간이 접근하기 불가능한 아득히 먼 곳에 거대한 빙하 계곡을 만들어 놓았다. 알래스카의 모든 것을 다 보고 더 본 듯한 환희에 젖는다. 

▲아름다운 발데스 항. 사진 = 김현주

알래스카에서 만난 사람들 2

마침 호주 여행자 리차드(Richard)와 줄리(Julie) 부부를 만났다.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수제(手製) 캠핑가를 호주 브리즈번(Brisbane)에서 배에 싣고 미국 LA로 가지고 와 18개월째 미대륙을 여행 중이다.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차를 세워 간이 의자를 펴놓고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그들의 삶에 할 말을 잃는다. 10년 여정으로 길에 올랐다고 하니 일주일 쉬기도 쉽지 않은 한국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래스카에서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렇듯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곪아가는 정강이 상처

앵커리지로 길을 재촉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생긴 문제는 아니고 지난 여러 날 동안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일이기는 하다. 여행 초기 계단에 정강이를 찧어 생긴 상처가 덧나기 시작한 것이다. 곧 낫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다루었기 때문인지 상처가 곪기 시작했다. 상처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뼈가 가깝고 살이 적은 부위라서 좀처럼 낫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앞으로 두 주일이나 남은 여행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되어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한국의 의사 친구에게 보내 원격 진료를 받으니 항생제를 복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미국 병원 신세를 지다

항생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의사를 만나면 최소 수백 달러가 드니 걱정이다. 마침 수소문 끝에 오늘 일요일이지만 문을 연 동네 클리닉을 찾게 되었다. 간단한 처치와 항생제 열흘 분 처방이 약 220달러, 한화 25만원이다. 여기에 약값을 보태야 한다. 한국에서 지불하는 진료비의 80∼9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귀국 후 여행자 보험에 청구해 보기로 하고 치료와 처방을 받는다. 그래도 항생제를 얻으니 크게 마음의 위안을 얻고 안정된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알래스카를 떠나며

앵커리지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렌터카를 반납하니 닷새 동안 1300마일(2080km)을 달렸다. 대륙의 크기를 실감한다. 공항에서 항공기 출발을 기다리는 지금 시각 밤 11시가 넘었지만 하늘이 아직 훤하다. 그동안 지나온 알래스카의 산하가 머릿속에 흐른다. 쉬지 않고 본토에서 도착하는 여객기를 타고 오늘 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알래스카에 발을 디딘다. 닷새 전 미지의 세계를 맞이하는 흥분에 찼던 내 모습과 같다. 수많은 사연들을 감당해 내느라고 앵커리지 공항은 오늘 밤에도 분주하다. 

(정리 = 김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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