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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이홍렬 “성장 끝나면 성숙해져야”

60대 홍렬 아저씨가 전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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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0호 김금영⁄ 2017.11.03 09:28:30

▲2015년에 이어 올해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무대에 오르는 이홍렬.(사진=극단 나는세상)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망태 망태 망망태! 망구 망구 망망구!” “밤에 피는 장미~” 이 개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할머니 분장을 한 개그맨 이홍렬(63)이 다소 섬뜩한 분위기의 산장에서 풀어내는 개그 코너 ‘귀곡산장’은 1990년대 간판 코너였다. 또 다른 히트 프로그램 ‘이홍렬쇼’도 있다. 김희선, 장동건, 고소영, 송혜교 등 당대 최고 인기 스타가 이홍렬쇼를 거쳐 갔다. 요리와 토크를 결합한 쿡방(cook+방송)의 국내 최초 버전으로,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요리는 현실에서도 인기를 끌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친근했던 ‘홍렬 아저씨’가 어느덧 60세가 넘어 연극 무대에 올랐다.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12월 31일까지 계속될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에서 자신의 할 말을 실컷 풀어내고 있다. 개그맨으로서 개그를 하며 많은 말을 하고 살았지만, 이 공연만큼 자신의 속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간 또한 없었단다.


▲이홍렬(왼쪽)은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에서 은퇴 후 집에서 홀로 강아지를 돌보는 60대 가장 영호 역을 맡았다.(사진=(주)문화감성아츠)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김영순이 3개월 동안 직접 서울과 경기 지역의 찜질방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에게 들은 인생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려진 작품이다. 2013년 첫선을 보인 이후 꾸준히 공연돼온 가운데, 이홍렬은 2015년부터 이 공연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돌아온 무대에도 오르고 있다.


공연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자리가 위태로운 40대 샐러리맨 종수, 자식농사 잘 짓고 노후 걱정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외로운 말복, 늦은 나이에 손자를 봐야 하는 갱년기 여성 영자, 세월이 가도 사랑받고 사는 줄 알았지만 아픈 속내를 지닌 춘자, 사춘기 자녀와 날마다 전쟁을 치르는 오목까지. 이홍렬은 은퇴 후 집에서 홀로 강아지를 돌보는 60대 가장 영호 역을 맡았다. 그는 “영호만큼 나랑 닮은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 대표 토크쇼였던 '이홍렬쇼'엔 수많은 스타들이 출연했다.(사진=SBS)

“처음에 출연 제안을 받고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는 순간 이거 웬걸! 완전 제 이야기더라고요. 환갑이 넘어 제 나이 때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과, 복잡하게 느끼는 여러 감정들이 대본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죠. 이거야말로 제 몸과 마음에 딱 맞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연기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요즘은 맞벌이 시대가 대세지만, 극중 영호가 젊었을 때만 해도 여성은 전업주부, 남성은 돈을 벌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영호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은퇴하고 나서 드디어 시간이 많아졌는데, 이제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가족들이 바쁘다. “아빠” 하며 따르던 딸은 어느새 커서 결혼을 했고, 아내는 딸 산후조리를 위해 집을 비웠다. 집에 혼자 남겨진 영호는 아내의 신신당부에 따라 강아지 밥을 챙겨줘야 한다. 이 시대 아버지들의 단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집 한 채 남고… 가족이 없다”


▲'귀곡산장'은 이홍렬의 대표 개그 프로그램이다. 1993년 '오늘은 좋은 날'에서 방송됐고, 2005년 이홍렬이 '돌아온 귀곡산장' 공연을 제작하기도 했다.(사진=MBC)

“영호가 극에서 ‘나는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퇴직하니 집 한 채 남았다’고 하자 종수가 ‘그러면 성공한 거죠, 형님’이라고 답하죠. 그런데 그때 영호가 말해요. ‘그냥 집만 있어. 정작 있어야 할 가족이 없어’라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평생 열심히 살았지만, 그 와중에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은 제대로 갖지 못한 아버지가 많아요. 그래서 은퇴하고 나서 집에 있는 시간이 어색하기도 하고, 이미 커버린 자식들은 독립을 해서 더욱 멀어지죠. 극은 중년의 아버지가 느끼는 이런 허탈한 마음을 대신해 읊어줘요.”


자신의 전성기를 떠나보내 마음이 허한 영호의 모습도 이홍렬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홍렬에게도 인생의 황금기가 있었다. 최고 인기 개그맨이었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개그 프로그램부터 토크쇼까지 이홍렬을 찾지 않는 방송이 없었다. 그러나 방송 트렌드는 변했고, 이홍렬이 방송에서 얼굴을 비추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따금 “왜 요즘 안 보여요?”라는 주위의 말에 상처를 받을 때도 많았단다.


▲이홍렬은 재능기부 활동 또한 펼쳐왔다. 8월 22~23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로 기부 강연을 하는 모습.(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보통 왜 요즘 안 보이냐고 묻는 분들은 사실 관심과 애정이 있어서 그 말을 꺼내는 거예요. 더 많이 보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에서 물어보라는 걸 저도 알아요. 그런데 이 말이 상처로 다가올 때가 있었어요. 방송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이 있으니까요. 저 또한 점점 일이 줄면서 마음이 허탈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내려오는 과정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어요. 영호도 그랬을 거예요. 자신의 전성기가 지나고 달라진 환경과 시선에 고독했겠죠. 하지만 인생은 계속 이어지기에 다시 힘을 내고 살아가요.”


이홍렬은 여전히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CJ헬로비전에서 ‘지금은 로컬시대’ MC를 맡고 있고, 연극 무대까지. 특히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이홍렬의 인생 2막을 여는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이홍렬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활동의 차원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 달 동안 610km를 걷는 도보 횡단으로 2012년 주목받기도 했다. 이 과정 또한 그의 수첩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사진=연합뉴스)

개그 콩트로 연기 생활을 해왔지만, 보다 다양한 폭의 연기에 갈증을 느낀 이홍렬은 서른네 살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서른여덟 살에 졸업했다. 그때 만난 교수가 “1년에 한두 작품은 꼭 하라”고 했지만 정작 무대에 설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드디어 작품을 할 기회가 왔다. 히트 개그 코너였던 '귀곡산장'을 ‘돌아온 귀곡산장’으로 재구성한 뒤 직접 제작해서 선보였고, 2015년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를 통해 10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섰다.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무대에도 올라 연기 열정을 뒤늦게 불태우고 있는 그는 요즘 매일이 힘들기보다는 행복하다.


“저는 무대에 서는 게 정말 행복해요. 악극도 신나게 했고요. 이번 무대는 객석과 가까워 관객과 배우가 함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매력에 흠뻑 취했어요. 또 극 속 역할에 공감하고, 제 감정 해소도 되면서 연극의 매력에 더 푹 빠졌어요.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꾸준히 이어졌으면 하는 공연이자, 언제든 연기하고 싶은 공연이에요.”


이홍렬이 62번째로 무대에 서던 날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기를 좋아하는 이홍렬은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에도 출연했다.(사진=스토리팜)

이야기를 하던 이홍렬은 숫자로 빼곡한 수첩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인터뷰를 한 날엔 ‘6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뜻을 물으니 ‘여보 나도 할 말 있어’ 무대에 62번째로 오르는 날이란다. 이밖에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들의 이름 옆에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숫자는 이홍렬의 인생과 연결된다.


이홍렬은 그동안 수많은 재능기부를 해 왔다.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 위해 재능기부로 강연을 해왔고, 1년에 한 번씩 자선음악회도 꾸렸다. 121쌍을 목표로 결혼식 주례 또한 꾸준히 봐왔는데, 이것은 아프리카 어린이 후원 취지에서다. 주례비 대신 아프리카 어린이 후원에 신랑신부가 이홍렬과 뜻을 모은다. 즉 이름 옆 꼬박꼬박 쌓인 숫자는 이홍렬이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해 온 후원의 횟수다.


“숫자를 쌓아가는 걸 좋아해요. 숫자가 제게 주는 에너지가 있어요. ‘이만큼의 사람들이 좋은 뜻에 힘을 모아줬구나’ 하며 그간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공연 무대에 선 횟수를 보면서 ‘내가 이만큼 무대 위에서 열심히 해왔구나’도 느낄 수 있죠. 그리고 ‘앞으로는 이만큼 더 숫자를 쌓아봐야지’ 하는 새로운 목표가 매일 생기고요. 숫자를 기입하는 습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아직도 수첩에 적고 있고, 항시 보기 위해 핸드폰에 이걸 사진으로도 찍어서 갖고 다녀요. 제게 늘 좋은 자극을 줘요.”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영호(이홍렬 분, 오른쪽)와 종수(안정훈)를 비롯해 중년들의 애환과, 이들이 서로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뭉클하게 보여준다.(사진=(주)문화감성아츠)

62번째로 오른 무대에서도 이홍렬은 연기 열정을 불태웠다. 특유의 개그감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아픈 사연을 감춘 중년의 마음을 어둡게만 풀어내지 않는 게 ‘여보 나도 할 말 있어’의 특징이다. 한바탕 웃음과 코끝이 찡한 감동이 공연 시간을 채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가오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받아들인다. 극에 영호뿐 아니라 40~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중년을 배치시킨 점이 이 부분을 돋보이게 한다. 영호, 종수, 말복, 영자, 춘자, 오목이 찜질방에 모여 서로 대화를 하며 소통과 이해의 과정을 쌓아간다. 종수의 대화상대는 영호다.


40대 종수는 인생이 힘들다. 영호가 젊었을 때처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자식이 먹을 유기농 사과를 먹었다고 아내에게 혼난다. 자식을 돌보는 아내가 이해되면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서럽다. 그렇다고 “서운하다”고 말을 하자니 자신이 쪼잔해지는 것 같아 혼자 속앓이를 한다. “갈수록 아내가 무섭다”는 종수에게 인생을 더 많이 산 선배로서 영호가 조언을 해준다.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김영순이 3개월 동안 직접 서울과 경기 지역의 찜질방을 다니며 들은 인생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려진 작품이다.(사진=(주)문화감성아츠)

여기서 웃음과 감동 코드가 적절히 어우러진다. 처음엔 “원래 인간은 사랑을 하면 눈이 멀어. 그런데 결혼을 하면 눈을 팍 뜨는 거야”라고 말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후에 감동의 조언이 따라온다. “그런데 남자가 나이 들어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나이 먹은 내 마누라야.” 그냥 나이만 먹은 꼰대가 아니라,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직접 느끼고 깨달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전해준다.


“무대 위에 서면 관객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다 보여요. 특히 뿌듯한 광경은 부모를 모시고 온 자식들의 모습이에요.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는 힘든 마음을 토해내는 과정에서 서로 보듬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행복의 여정을 그려요. 저는 이 극에서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간의 소통의 가능성을 봤어요.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하는 시대에 이 극은 좋은 여운을 전해주면서 ‘사람다움’을 스스로 다질 수 있게 도와주는 시간이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홍렬은 “성장이 끝났으면 성숙해져야 하는 시기가 온다”며 “앞선 세대로서 조언과 격려를 전하고, 가정과 사회가 보다 성숙해지는 데 우리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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