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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은행·카드사의 미운오리새끼 ‘가상화폐’

거래소, ‘대부업 닮은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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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73호 도기천 기자⁄ 2018.02.05 10:27:15

서울 시내 한 가상화폐거래소 앞에서 한 시민이 가상화폐 시세 전광판을 쳐다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도기천 기자) 정부가 가상화폐(암호화폐·가상통화) 거래를 사실상 ‘투기’로 규정해 전방위적인 압박에 들어가면서 시중은행과 카드사들이 애먼 불똥을 맞고 있다. 이들은 고객서비스와 정부정책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벌이며 숨죽인 모양새다. 관련업계에서는 “돈은 거래소가 버는데 욕은 우리가 먹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CNB가 냉가슴을 앓고 있는 금융사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신규계좌요? 이 분위기에서 신규를 터줄 은행이 어디 있겠어요?”(A은행 관계자)


은행들이 금융당국의 강화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계좌 신규 개설을 꺼리면서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물론 일반 고객들까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CNB가 1월 30일 시중은행 여러 곳에 확인한 결과, 은행들은 가상화폐 거래를 아예 ‘금융거래 목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최근 강화된 금융당국의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금융거래 목적’이 확인된 건에 대해서만 신규계좌 개설이 허용된다. 


예컨대 급여이체 통장을 개설하려면 재직증명서와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을 내야하고, 공과금 이체 목적이라면 본인 명의의 공과금 고지서를 첨부해야 한다. 


가상화폐 거래소 이용은 이런 ‘금융거래 목적’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신규계좌 개설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1월30일부터 시행된 ‘가상화폐 거래실명제’를 두고 일부 언론과 투자자들은 이를 실명확인 절차만 거치면 신규 투자가 제도적으로 허용되는 ‘양성화’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실명이 확인된 계좌를 통해서만 거래를 허용하겠다는 것으로, 기존에 가상화폐를 사고팔던 가상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해주는 것일 뿐이다. 현재 이 시스템이 구축된 곳은 신한은행,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KB국민은행, KEB하나은행, 광주은행 등 6개 은행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1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가상화폐와 관련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단, ‘금융거래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도 고객서비스 차원에서 ‘금융거래 한도 계좌’는 비교적 자유롭게 개설해주고 있다. 하루에 창구에서는 100만원,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는 30만원까지만 출금·송금이 가능한 계좌다. 가상화폐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자라면 사실상 의미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상화폐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각종 편법이 소개되고 있다.  


‘급여통장을 개설해놓고 여기에 투자금을 넣어서 거래하면 된다’, ‘적금을 들면서 연계된 입출금 통장을 만든뒤 적금을 취소해라’, ‘일단 한도 계좌로 만들고 나서 한 달 정도 있다가 일반 자동이체 계좌로 전환하면 된다’ 등 우회 방법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이 검증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어 이런 수법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가상화폐 투자자 정모(47) 씨는 CNB에 “정부가 거래소 폐쇄까지 언급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거래소 이용 자체를 금융거래로 보지 않는다니 황당하다”며 “그렇다면 주식거래 계좌도 다 없애야 형평이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투자자는 “기존 거래계좌는 (실명전환으로) 살려주면서 신규계좌는 막는 게 과연 앞뒤가 맞는 일이냐”며 “국민의 재산권과 직결된 일인 만큼 일관된 원칙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버인줄 알지만 어쩔 수 없어”


이처럼 혼란이 커진 데는 금융당국의 어정쩡한 태도가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를 언급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이때부터 금융당국은 모호한 포지션을 취했다. 


금융위원회는 신규계좌 개설 여부는 어디까지나 은행들이 결정할 사항이라고 밝히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은행들에게 강도 높은 패널티를 주겠다고 밝혀 혼란이 가중됐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1월 23일 “신규 고객을 받는 것은 은행의 자율적 판단”이라면서도 “은행들은 철저히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기획재정부·국무조정실·법무부·금융위원회·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범정부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1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주재 장·차관 워크숍에서도 가상화폐가 주요 화두였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총대를 메고 조만간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정부의 가상화폐 제재 속에 금융사들은 신규거래를 막고 있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 마련된 가상화폐 관련 서적 코너. 사진 = 연합뉴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은행들 입장에선 은행자율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이 치켜뜬 ‘도끼눈’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CNB에 “솔직히 말하자면 은행들이 오버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면서도 “하루 다르게 정부대책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은행들 입장에선 좀 더 보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가상화폐 거래 자체를 금융거래로 인정하지 않는 점은 문제가 있지만, 거래소 폐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다. 

 

카드업계, 우왕좌왕 눈치보기


카드사들도 은행권과 동병상련을 앓고 있다. 카드사들은 금융당국의 가상화폐 거래 규제 방침에 따라 신용카드로 비트코인 등을 구매하는 행위에 대해 결제 승인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거래를 막고 있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카드결제는 이미 차단된 상태에서 점차 해외거래소 결제를 차단해 가고 있다. 


하지만 300만명에 달하는 투자자들의 반발을 살까봐 좌불안석이다. 해외거래소 결제 금지 등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고객의 소송 제기 등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해외거래소 결제 거부가 과연 실효성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페이팔과 같은 글로벌 간편결제 서비스를 거쳐 가상화폐를 구매할 경우, 카드사로서는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거래소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도 한계다. 최근 여신금융협회가 카드결제 차단을 위해 신한·KB국민·삼성·하나·우리·롯데·현대·비씨카드 등 전업계 카드사들과 거래소 리스트 20여곳을 공유했지만 전세계 거래소가 7000여개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카드업계는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길 바라고 있지만, 당국은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알아서 처신하라’는 신호만 보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과거 대부업 규제 때와 비슷하다. 정부·국회는 사채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2002년 대부업법을 제정해 사채업을 제도권내로 끌어들였다. 일정 요건을 갖추면 대부금융업 허가를 내주는 대신 이자율 제한, 불법적인 채권추심행위 금지, 지자체의 정기적인 사업장 실태조사, 세무신고 강화 등 강력한 규제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 대부업체들은 쇄락의 길을 걸었다. 저축은행권에 편입되거나 영세자영업자로 전락했으며, 일본계 대부업체 등 대형자본만 살아남았다.


이번 가상화폐 사태도 이같은 과정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세현 경영컨설턴트는 CNB에 ”정부가 300만 투자자들의 반발에 밀려 겉으로는 양성화 절차를 밟는 듯이 보이지만, 뒤로는 세무조사, 거래차단 등 가능한 방법을 전부 동원에 전방위적인 압박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거래소 또한 과거 대부업체들처럼 스스로 고사(枯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반면 금융사와 연계한 대형거래소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오히려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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