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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속 길 (17) 옥류동~세검정 ⑥] 몽유도원도는 日에 갔지만, 안평이 감탄한 무계동은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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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08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10.08 10:21:56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자신의 꿈을 사흘 만에 완성한 그림을 받자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크게 만족한다. 그리고는 전호(前號)에 소개했듯이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된 내력을 적었다. 이른바 몽유도원도 제발(題跋)인데 그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孟頫) 송설체(松雪體)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씨이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이미 중국의 명가(名家)들을 넘는 수준이어서 명(明)의 사신들도 그 글씨를 얻고자 했고 사은사를 통해서도 그의 글씨를 구하기도 했다 한다. 명나라 황제도 그의 글씨를 보고는 ‘훌륭하다. 진정한 조맹부체구나(甚善 正是趙子昻體也)’라는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일세의 명필이었음이 분명하다. 아쉬운 일은 안평대군의 죽임 이후에 철저히 그 흔적이 말살되어 그의 글씨는 몇 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몽유도원도에 심혈을 기울여 쓴 그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이 그림은 비해당을 찾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그들로부터 제찬(題贊)도 받아 점점 완성도를 높여 간다. 이후 3년이 지나지 않아 21명의 주변 인물들이 써준 제찬이 모였다. 집현전의 신진 학자들을 비롯해 안평과 가까운 중진들이었다.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석만우(釋卍雨), 최수(崔修) 이렇게 21인인데, 지금 살펴보아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수양대군에게는 이들의 인간관계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몽유도원도의 한 부분. 자료사진

이들이 그때 쓴 제찬은 지금도 고스란히 몽유도원도 두루마리로 남아 있다. 자그마치 폭이 41cm, 길이가 상권 8.5m, 하권 11.5m나 된다고 한다.


오언고시(五言古詩), 칠언절구(七言絶句), 칠언율시(七言律詩), 칠언고시(七言古詩), 기(記), 부(賦)들인데 그 중 몇 편을 살펴보자.

 

신숙주는 무려 20편 시로 그림 찬양 


후세 사람들이 변심하기를 녹두나물 쉬듯 했다 해서 숙주나물이라 한다는 신숙주는 무려 20편의 칠언절구를 써서 몽유도원도를 찬(讚)하였다. 그 중 두 꼭지를 읽어 보자.

 

烟蘿掩靄擁山根  
이내자락 은연히 산뿌리 덮고
洞口雲霞常吐吞  
동구에는 구름 노을 늘 피었네
時見落花泛流水  
꽃 져서 흐르는 것 때때로 보았지만 
不知何處是桃源  
도화원은 어디인고 알 길이 없구나

 

遠近交加燒曉風  
멀고 가까운 곳 따슨 바람 비껴 불며,
高低相暎正重重  
높고 낮은 곳이 어우러져 첩첩이네
仙遊更値三千歲  
신선이 노닌 지 다시 3000년이라는데
不是人間一樣紅  
인간 세상 아니구나 붉은(꽃) 세상이니.

 

신숙주, 그도 이 그림에 빠져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고 있다.

 

몽유도원도에 대해 신숙주는 시를, 성삼문은 산문을 각각 남겼다. 자료사진

성삼문 “고고한 이, 안평대군에게만 허락” 


그렇다면 성삼문(成三問)은 무슨 글을 남겼을까? 시를 쓰지 않고 산문, 기(記)를 남겼다.


“아침에 도원도(桃源圖)를 보고, 저녁에 도원기를 읽으니. 비로소 옛부터 있어온 도원과, 신선의 설화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네. 혹여 도원을 신선 세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상에 어찌 한 조각의 도원이 없겠는가? 아다시피 진나라 사람도 그곳에는 이르지 못하고 상상하며 꿈꾸었을 따름이었네. 그렇지 않다면 천 번을 찾고 만 번도 더 더듬었을 터인데, 길을 잃고 다시 이르지 못하지는 않았으리.


가엾다, 천고의 사람들이여!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니 선경이 인간 세상으로 하여 그릇되고 욕되게 되었구나. 어부가 한 번 알아챈 후 도원에 이른 자 아무도 없었다네. 분명 상계의 진인들이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힘껏 비밀이 새지 않게 했으리. 


이런 까닭으로 지금 천백 년이 지나도록, 겨우 고인(高人: 안평대군) 한 사람에게만 잠에서 허락하였다네. 스스로 정신이 세상 밖으로 노닐지 않고서는 신선의 경지 끝내 이르기 어렵다네. 따랐던 몇 사람은, 무슨 공력으로 여기에 이른 것인지 알지 못 했네.


슬프다! 사람들은 잠에 곤하게 빠져서, 티끌세상 만길 구렁텅이로 달게 향하네. 도원도에 힘입어, 사람으로 하여금 혼수에서 깨어나게 하고. 도원기(桃源記)에 힘입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도의 기운을 자라게 하는구나.


아침에 도원도를 보고, 저녁에 도원기를 읽으니. 부드럽고 맑은 바람에 양쪽 날개가 돋는 듯하다네. 푸른 하늘로 학을 타고 아마도 다시 노니는 듯 하고. 솥을 핥고 올랐듯이 또한 날아 올랐다네.(기존 번역 전재, 부분 수정함)


朝見 桃源圖, 暮讀 桃源記. 始信 今古 有桃源, 神仙之說 非誕僞. 若道桃源 不神仙, 世間 豈無 一片桃源地. 固知 晉人迹未到, 想亦夢之而已矣. 不然 千搜 與萬索, 未必迷路不復至. 可憐 千古人! 欲辨有無是與非, 枉辱仙境 爲人世. 漁舟一覺後夢, 得到者 無 一二. 應是上界眞人愛淸淨, 十分秘不洩. 所以至今千百祀, 僅許一入 高人睡. 自非神遊八表, 神仙之境 終難致. 向之陪從者數子, 未知 何脩而至是. 可哀 人間 睡方濃, 甘向 紅塵萬丈墜. 賴有桃源圖, 令人醒昏醉 賴有桃源記, 令人生道氣. 朝見圖, 暮讀記, 習習淸風生兩翅. 靑冥鶴背倘再遊, 舐鼎攀飛 亦可冀.”

 

성삼문도 이 그림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어부 한 사람이 도화원에 다녀온 후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던 그곳 방문을 고고한 이(高人), 안평대군에게만 꿈속일지라도 허락했다는 스토리를 적고 있다. 아니 이 분이 이렇게 노골노골한 남자였던가? 

 

도연명이 쓴 유토피아 이야기 ‘도화원기’


이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읽어야 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이란 곳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작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숲은 강의 양쪽 기슭 안쪽으로 수백 걸음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잡목 하나 없었다.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부는 무척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숲의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숲이 끝나는 곳은 강의 발원지였으며, 바로 그곳에 산이 하나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마치 무슨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려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척 좁아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수십 걸음을 더 나아가니 갑자기 환하게 탁 트이며 시야가 넓어졌다. 땅은 평탄하고 넓고 가옥들은 가지런하게 지어져 있었다. 비옥한 밭,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북과 동서로 난 밭두렁 길은 서로 교차하며 이어져 있었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씨를 뿌리고 농사짓고 있는데, 남녀가 입고 있는 옷이 모두 외지인이 입는 것과 같았다. 머리가 누렇게 변한 노인과 더벅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곳 사람 하나가 어부를 보고 깜짝 놀라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어부는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어부를 집으로 초대했고,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마을에서는 어부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두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마을 사람이 말하길 “선대 조상들이 진(秦)나라 때의 전란을 피해 처자와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세상과 격리된 이곳으로 왔고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물었는데, 위(魏), 진(晉)은 물론 한(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하나하나 자세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해주었고, 마을 사람 모두 감탄하며 놀라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어부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고, 모두 술과 음식을 내어서 대접했다. 며칠간 머물다가 작별을 고하였는데,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어부는 그곳에서 나와 배를 찾았고, 곧 이전에 왔던 길을 따라 곳곳에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군(郡)에 도착하자 태수를 찾아가 이와 같은 일이 있었노라고 알렸다. 태수는 곧장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갔던 길을 따라가 이전에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했다. 그러나 끝내 길을 잃어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南陽) 땅 류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인데 이 이야기를 듣자, 흔연히 찾아가 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곳을 찾지 못하였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후로 아무도 길을 묻는 이가 없었다. 


晉太元中, 武陵人, 捕魚為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 便得一山 山有小口, 彷彿若有光, 便舍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 美池, 桑, 竹之屬, 阡陌交通, 雞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髫, 並佁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 殺雞, 作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來此絕境,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問 “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 晉! 此人一一為具言所聞, 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為外人道也.” 既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即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尚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後遂無問津者.”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되었다. 여기에서 무릉도원을 武陵桃園으로 쓰지 않는 이유는 복숭아 동산(桃園)이 아니라 복사꽃 잎이 물 위에 떠내려 오는 근원지이기에 桃源이라 쓴 것이다. 우리가 꿈꾸어도 이르지 못하는 낙원, 그 근원지(根源地)란 뜻으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그곳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다녀왔고 그림으로 남겼다. 거기에 그림을 포함해 그 시대 23명의 기억에 남을 사람들의 붓 자취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다 아시다시피 일본 천리대(天理大) 수장고에 있다. 아마도 임진란 때 사쓰마번(蕯摩蕃) 시마쯔(島津)에 의해 반출되고, 후지다(藤田), 소노다(園田), 마유야마에게로 넘어간 후 다시 천리대가 소장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다시 찾아올 기회가 있었다 한다. 1951년 부산 피난 당시 일본의 정객 하라(原)가 알려와 3만 달러에 찾아 올 기회가 있었는데 사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랴.

 

현재 일본 천리대가 보유하고 있는 몽유도원도. 자료사진

일본의 보물 중 하나가 된 몽유도원도


이제 이 그림은 일본의 보물 중 하나가 되었다. 천리대는 이 그림을 진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모사하였고 표구도 다시 하였다. 필요할 때 전시를 한다. 연전 국립박물관에서 몽유도원도가 전시되었는데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이 그림을 만난 우리들이다.


안평은 이 그림이 완성된 3년 후, 후삼년 정월일야(後三年 正月一夜; 그 후 3년 정월 어느 밤)에 시를 써서 이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담았다.

 

“世間何處夢桃源 
인간세상 어디메 도원을 꿈꾸었나
野服山冠尙宛然. 
꾸밈없는 모양새 더욱 완연한 것을
著畫看來定好事, 
그림으로 드러내니 정녕 좋을시고,
自多千載擬相傳.  
천년을 이어 전해지기를.”

 

사람은 갔어도 천년(千載) 그의 염원은 이루어지리라.


또 이 그림이 완성되고 3년 되었을 즈음 안평대군은 드디어 꿈꾸던 무릉도원을 가름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그곳이 바로 오늘 탐방하고 있는 부암동 주민센터 안 골짜기 무계동이다.

 

“나는 정유년(1447년) 4월에 도원의 꿈을 꾸었다. 작년(1450년) 9월 우연히 유람길에 올라 국화가 물에 떠 흐르는 것을 보고 등나무 헤치고 돌을 기어올라 비로소 이곳을 찾았다. 이에 그 꿈과 비교하니 풀과 나무의 어우러진 모습과 냇가의 그윽한 모양이 흡사하였다. 이에 올해 몇 간을 짓고 무릉(武陵)이란 뜻을 취해서 편액에 무릉정사(武陵精舍)라 하였다. 진실로 정신을 편안케 하는 은일한 땅이로다. 이에 잡영 다섯 수를 지어 내방객(來訪客)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余於丁卯年四月 有桃源之夢 去年九月 偶乘遊覽 見菊花之泛流 遂攀挽藤石 始得此地. 於是較其夢覩則 草樹參差之狀 川原窈窕之態可髣髴. 乃至今年 結構數間 取武陵之意 扁其戶曰 武陵精舍. 實怡神棲隱之地也, 仍成雜詠五章 以倫來訪之所問.”

 

안평대군이 꿈속에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땅을 찾아 기거했던 무계정사의 남은 터. 사진 = 이한성 교수
무계동(武溪洞) 각자(刻字) 위에 서 있는 한옥 별채. 사진 = 이한성 교수 
누군가가 새겨 놓은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刻字)가 예스럽게 이 자리를 말해 준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무계동은 이제 흔적이 없다. 창의문로 5가길이라는 참으로 정나미 없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좀 나은 것은 ‘동네 골목길 관광 제4 코스 부암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이다. 안평대군이 꿈꾸었던 무릉도원은 계곡수가 흐르고 철철이 꽃 피어 그 물 위에 꽃잎 떨구던 무릉계(武陵溪)는 더 이상 아니다. 계곡은 모두 시멘트로 덮여 길이 되었고 꽃도 친일하던 사람의 별장 담 안에서나 피는 곳이 되었다. 무계정사 터를 다녀 본다. 풍성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고, 오랜 고목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후세에 누군가가 새겼을 무계동(武溪洞)이라는 바위 각자(刻字)가 그래도 예스럽게 이 자리를 말해 준다. 그 위 돌 층계 뒤로는 퇴락한 한옥 별채가 서 있다. 물론 안평대군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샘물도 아닌 것 같은데 물의 수원(水源)은 같을 것이다.  아쉬움에 빈 마당을 다녀 본다. 공깃돌만한 기와 한 조각이 보인다. 무계정사의 흔적일까?

 

300년 전 남구만도 빈터의 황량함을 한탄


남쪽으로는 인왕의 성벽이 변함없이 지켜보고, 서쪽에서는 기차바위와 해골모양 바위가 안평의 그때처럼 무계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계동의 남쪽에 위치한 인왕산 성벽. 사진 = 이한성 교수 
무계정사터의 샘물. 안평대군이 찾은 그 도원(挑源)은 아닐지라도 물줄기는 같을 듯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기차바위 아래 무계동이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300몇십 년 전 이곳을 다녀간 조선의 문신 남구만도 빈터만 남은 무계동과 비우당의 스산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 무슨 흔적이 남아 있겠는가? 남구만의 말대로 유묵으로나마 그때를 어림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몽유도원도가 남아 있음은 큰 축복이다. 

 

무계동 깊은 곳에 새소리도 슬픈데
비해당 높은 집은 터도 찾기 어렵네.
의기는 호화롭기 꿈속 같은데
그저 유묵으로 그때를 알 뿐
武溪深洞鳥聲悲 匪懈高堂不辨基 
意氣豪華如夢裏 只將遺墨認當時

 

옛 맛 그대로의 흑임자 인절미와 동부 인절미를 아직도 맛보게 해주는 부암동의 동양방아간. 사진 = 이한성 교수

자, 아쉬움을 남기고 무계동 골짜기를 떠나 백사실로 향한다. 부침바위골 부암동(付岩洞)은 옛 변두리 마을에서 벗어나 서울의 명소로 뜬 지 오래 되었다. 자하문 밖 화초 장수는 장안에서 유명하였다던데 이제는 커피집, 카페, 음식점 마을이 되었다. 한때 서울에서 제대로 하는 커피집이라고 소문나서 필자도 맛있는 커피는 어떤 것인지 이곳에 올 때마다 좀 비싼 돈을 주고 먹어 보던 커피집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그 시절 이발소는 없어진 지 7, 8년은 되었고 떡이 맛있는 동양방아간 할머니는 오늘도 단아하시다. 언제나 맛있는 떡 두어 팩 사서 하나는 나 먹고 나머지는 가져다가 나누어 먹는 일을 오늘도 한다. 흑임자 인절미. 동부 인절미는 여전히 맛있구나.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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