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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작가 – 안젤 오테로] 오일 페인트 긁어 만든 ‘달 표면’ 기억들

리만머핀 서울서 국내 첫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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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14호 김금영⁄ 2018.11.13 10:55:34

안젤 오테로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실제로 달의 표면을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까? 생생한 질감을 지닌 오브제가 뿜어내는 느낌이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달빛처럼 사뭇 포근하기도 하다. 독특한 느낌을 지닌 이 오브제의 정체는 긁어낸 오일 페인트다.

리만머핀 서울이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 안젤 오테로의 국내 첫 개인전 ‘달의 표면(Piel de Luna)’을 12월 22일까지 연다. 시적인 전시명은 작가의 고향인 스페인의 향취를 담아 지은 것으로,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기억이 깃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는 유독 ‘기억의 재현’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할머니의 손에 자란 어린 시절, 일기를 쓰는 건 작가에게 하루하루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 기억을 기반으로 한 페인팅 작업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안젤 오테로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사진=리만머핀 서울)

작가는 “나는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 서툴다.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게 내게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옛날 일을 기억하는 건 내게 중요하다. 기억은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내 어렸을 적 기억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현재의 내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하던 작가는 작업 초기엔 주로 정물화를 그렸다.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늘 집에서 탁자, 과일 등을 흔하게 볼 수 있었고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게 정말 정확할까? 작가는 “사람들은 기억을 토대로 살아가지만 그 기억이 항상 객관적으로 명료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흐릿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의해 변형된 상태로 기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안젤 오테로, ‘달의 표면(Piel de Luna)’. 페브릭 위에 오일 스킨, 269.2 x 203.2 x 7.6cm. 2018.(사진=리만머핀 서울)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기억들이 쌓인 작가의 화면도 점차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기존에 그렸던 정물화에서 특정 대상이 또렷하게 보였다면, 점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형태로 변모한 것. 본격적인 변화는 작가가 대학생 때 이뤄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2007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학사를, 2009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림 그리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괴로울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추상화 수업을 들을 때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 중 일부는 “따라 그린 것 같다”며 “피카소를 따라한 것 같다”고도 “윌렘 드 쿠닝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작가는 “내 그림을 보고 미술계 거장들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는 큰 영광이지만 작가로서는 정체성을 구축하지 못한 것 같아 고민이 컸다. 누군가를 따라한 데 그치는 그림이 아닌 ‘작가 안젤 오테로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찾아봤다. 그 기억이 쌓여 알게 모르게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

개인적 기억과 미술사가 뒤섞인 화면을 긁다

 

안젤 오테로, ‘미러 앤 고스트 댄싱 온 더 옐로우 플루어(Mirrors and Ghosts Dancing on the Yellow Floors)’. 캔버스 위에 오일 스킨, 213.4 x 152.4 x 6.4cm. 2018.(사진=리만머핀 서울)

고민 끝에 작가는 아예 이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기로 했다. 그의 작업은 유리판 위에 두꺼운 오일 페인트를 사용해 다양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인 그림이라면 물감이 마르면 완성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페인트가 거의 다 마를 때쯤 유리표면에서 오일 페인트를 긁어내 조각낸 다음 캔버스에 붙인다.

원래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는 힌트를 담은 채 모아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이어가는데, 이때 그림은 더 복잡한 층위의 추상적 구성 형태를 띠게 된다. 그 결과 본래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화면이 탄생한다.

예컨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여러 점의 신작 중 일부는 윌렘 드 쿠닝과 잭슨 플록과 같은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의 표현과 색상을 참고한 이미지들을 그린 다음 긁어낸 것이다. 작가는 “쿠닝의 추상화의 밝은 붓놀림과 선이 강조된 잭슨 플록의 이미지를 섞으면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두 작가의 작업을 참고한 이유를 밝혔다.

 

안젤 오테로, ‘멜팅 게이츠(Melting Gates)’. 캔버스 위에 오일 스킨, 213.4 x 152.4 x 6.4cm. 2018.(사진=리만머핀 서울)

긁어낸 오일 페인트를 캔버스에 붙이는 작업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캔버스로부터 떼어낸 커다란 스케일의 오일 페인트 자체를 벽에 직접적으로 걸면서 입체적인 조각에 가까운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구상에서 시작된 작업은 점차 추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작가는 “전통적 방식과 소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대로 답습하면 또 따라 하기에 그칠 수도 있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그림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담기 위해,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현재의 방식에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명한 명화를 재해석해 그린 것들을 뒤섞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적 기억에서 비롯된 이미지와 명화를 덧대어 그린 뒤 긁어내기도 했다. 작가는 “너무 개인적인 기억에만 빠져들면 사람들이 공감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작가로서 미술사에 흥미를 느꼈던 부분들을 같이 뒤섞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안젤 오테로의 대규모 작업뿐 아니라 작은 형태의 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화면을 긁어내며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 결과물은 여러 기억이 혼재된 작가의 머릿속과도 같다. 어떤 작가의 화풍인지 감만 살짝 느낄 수 있는 정도고, 그 정체가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건 앞서 언급됐듯 정확하지만은 않은 기억의 재현이자, 작가의 새로 시작되는 기억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일 페인트를 긁어내는 과정에서 본래의 이미지에는 변주가 일어나고, 이 변주가 계속되면서 내 독자적인 목소리가 작품에 들어간다”며 “긁어낸 오일 페인트를 스튜디오에 보관해 놓고, 조각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보고 싶을 때 조합한다. 이건 다양한 기억의 조각들을 재조합해 새로운 기억을 이끌어내는 과정과 같다”고 말했다.

 

안젤 오테로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사진=리만머핀 서울)

즉 이번 전시 ‘달의 표면’은 작가의 개인적 기억과 미술사가 뒤섞인 ‘기억의 피부’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내 그림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기억해야 시작될 수 있다. 기억을 건드리며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리만머핀 서울 측은 “작가는 시대의 이미지를 간직해 과거에 뿌리를 두되, 완전히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작가가 현대미술에서 추상화의 장르를 확장해 나가는 방식은 추상과 표현 사이의 변환을 탐구하는 것과, 작품의 최종 구성요소로 유화라는 재료적 물성을 허용하는 것”이라며 “이런 방식으로 오일 페인트 그 자체는 우연에 대한 개념이자, 변형 그리고 심미적인 언어로써 중요한 개념적 요소로 동원된다. 시각화됐던 이미지와 주제는 재료에 의해 형성된 과거의 파편이자 일부가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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