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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금강산 관광 20년, 비운의 현대家를 말하다

한반도 新경제시대…현정은 회장 “역사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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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15호 도기천 기자⁄ 2018.11.26 10:31:37

금강산관광 시작 2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 참석차 북한을 찾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오른쪽)이 지난 18일 금강산호텔에서 리택건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사진 = 현대그룹 제공

(CNB저널 = 도기천 기자) 금강산 관광이 최초 시작된 지 20년을 맞으면서 당시 남북경협의 첫발을 내디뎠던 현대그룹이 다시 조명 받고 있다. 그동안 숱한 위기와 곡절을 겪은 남북의 교류 역사만큼이나 현대가(家)의 지난날도 평탄치 못했다. 형제 간 경영권 승계 다툼으로 그룹이 여러 갈래로 나눠졌고, 대북사업도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다. CNB가 영욕의 지난 세월을 돌아봤다.

현대그룹은 지난 18~19일 양일 간 금강산 현지에서 ‘금강산관광 시작 20돌 기념 남북공동행사’를 개최했다.

대북 제재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과 선(先) 비핵화를 당론으로 내세운 일부 야권의 따가운 눈총 속에 열린 이날 행사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현직 국회의원 6명 등 남측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현 회장의 방북은 올해 들어서만 3번째다. 지난 8월 남편인 고(故) 정몽헌 전 회장의 15주기 행사와 지난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 자격에 이은 것이다.

남북관계가 최근 들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유효한 데다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협상도 당초 기대와는 달리 난항을 거듭하고 있어, 금강산관광 재개는 아직은 안개속이다.

통일부도 이번 금강산 행사에 대해 “사업자 차원의 순수 기념행사로, 금강산관광 재개와는 관련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남북경협의 재개를 간절히 바라는 현대그룹의 바람과는 달리 금강산의 시계는 느리게 가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모습,  1998년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출항, 2003년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 2006년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금강산 내금강 답사. 사진 = 현대그룹 제공

남북경협의 역사, 현대아산

지난 20년은 현대가(家)와 남북 모두에게 굴곡 많은 세월이었다.

최초의 남북경협은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83세의 정 회장은 자신의 충남 서산 농장에서 기르던 소 1001 마리를 이끌고 해방 후 처음으로 육로 방북했다. 외신들은 소떼가 북상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며 “남북의 휴전선이 열렸다”며 흥분했다.

정 회장은 당시 방북을 통해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에 합의했고, 1998년 11월 18일 현대상선의 ‘금강호’가 북으로 첫 출항을 했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고,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은 한때 150여개에 이르렀고 북측 근로자수는 5만명에 달했다. 2010년 9월에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또 금강산관광은 중단되기 직전인 2007년 한해에만 34만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치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3년~2007년 사이에 3차례 금강산을 다녀온 이모 씨(72)는 CNB에 “갈 때 마다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했다. 첫 방문 때는 북측의 감시가 심했고 현대아산 직원들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2007년 방북 때는 금강산호텔에 노래방과 포장마차가 들어섰고 관광지 곳곳에 노점이 즐비했다.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13년 7월 고 정몽헌 회장 10주기 사진전에서의 현정은 회장. 사진 = 연합뉴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을 위해 설립한 현대아산이 있었다. 현대아산은 남북경협의 역사 그 자체였다.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 체결 등을 통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등을 도맡아 왔다. 현대아산이 당시 대북사업에 투자한 자금은 2조원에 이른다.

북한은 이런 공로를 인정해 남한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내 시설물에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0년 7월 착공돼 2003년 완공된 평양의 ‘류경정주영체육관’이다. 이 체육관은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았고, 북측은 원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북 합작사업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후 남북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금강산관광은 전면 중단됐고 남북 간 대치 국면이 이어졌다. 현 회장은 2009년 8월 평양을 찾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업지구사업 활성화, 백두산관광 시작, 이산가족상봉, 우리 국민의 체류 안전보장 등 5개항에 합의하고 돌아왔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북한은 2011월 4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했다. 2016년 2월에는 개성공단마저 가동이 중단되면서 남북 간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현대그룹은 이로 인해 경영위기를 맞았다. 경협 중단 이후 누적 매출손실이 1조5000억원에 육박하면서 핵심계열사인 현대증권은 KB금융지주에 매각됐고, 현대상선 등은 채권단(산업은행) 손에 넘어갔다. 그룹의 자산규모는 중견기업 수준으로 줄었다.

경영위기·적통논란…현대가 수난사

특히 분단 이래 북으로 첫출항을 했던 현대상선을 잃게 된 것은 현 회장에게 큰 아픔이었다. 그녀에게 ‘친정’ 같은 기업이었기 때문. 현 회장의 부친 고 현영원 회장은 현대상선의 모태인 신한해운을 1964년 설립했으며, 이후 이 회사는 정부의 해운산업 효율화 조치에 따라 1984년 현대상선에 편입됐다. 현 회장은 부친의 유지가 깃든 현대상선을 지키고자 사재까지 출연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내부적으로도 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큰 진통을 겪었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 범(凡)현대가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 사진 = 연합뉴스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 회장의 차남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나머지 계열사들은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해상, 현대백화점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모(母) 기업인 현대그룹의 경영권은 5남 정몽헌 회장에게 넘어갔다.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던 정주영 회장은 그룹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던 와중인 2001년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이후에는 현대가 적통(嫡統)이 누구인가를 놓고 집안 갈등이 벌어졌다.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급작스레 숨지면서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모기업(현대그룹)을 이끌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몽구 회장 등 현대가 형제들은 현 회장으로부터 현대그룹을 되찾으려 했다. 이른바 시숙과 제수 사이의 갈등이 벌어진 것.

2003년에는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집중 매입하면서 현 회장을 압박했고, 2006년에는 시동생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이면 적대적 인수·합병(M&A)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2010년에는 정몽구 회장과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충돌했다.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에 있어 고군분투하고 있음에도 나머지 범(凡)현대가 기업들이 소극적인 이유를 이런 배경과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CNB에 “고 정주영 회장 제사 등 집안의 대사 때마다 현정은 회장과 현대가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지만 서로 앙금이 다 풀린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며 “남북경협에 있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현대가 장손’ 정의선 역할 기대

앞으로 현대가의 대북사업은 어떻게 될까.

현대그룹은 지난 4월 판문점 선언 직후 현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남북경협 테스크포스(TF)를 본격 가동하며 주요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있다. 최근에는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차관을 현대아산 대표이사 사장으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현대아산과 국내 대기업, 공기업, 국제기금 등이 참여하는 ‘글로벌 컨소시엄’을 구상하고 있다.

 

최근 현대차그룹 2인자에 오른 현대가 3세인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 지난 9월 인도에서 열린 ‘무브(MOVE)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금강산에서도 청신호가 연이어 켜지고 있다.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금강산관광의 ‘조건부 정상화’가 합의된 데 이어 이달 들어서만 두 차례나 금강산에서 남북공동행사가 열렸다는 점에서다.

지난 3∼4일 남측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민화협)과 북측 민화협이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연대 및 상봉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이번에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 2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것.

또 남북이 최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금강산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는 등 금강산을 무대로 한 대화와 교류는 민간을 넘어 남북 당국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같은 현대가 기업인 현대차그룹도 여러 가능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최근 현대차그룹 2인자에 오른 현대가 3세인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정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이자 정주영 창업주의 손자다. 현대차는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관세부과 문제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데, 최근 정 부회장은 미국 현지로 건너가 정치권 유력인사들을 만나 민간외교를 펼쳐 주목 받았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한·미 정부와 관세 문제를 놓고 긴밀히 공조해야만 하는 만큼, 우리 정부가 공을 들이고 있는 남북경협 논의에도 적극 나설 가능성이 있다.

북한 입장에서도 철도·건설 등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이 분야 최대기업인 현대차의 참여가 절실하다. 계열사인 현대제철의 경우 국내에서 유일하게 철도레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현대로템은 철도차량을 제작·보급하는 기업이다. 현대건설 또한 북한 내 도로·항만 등 인프라 구축에 있어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마중물’에서 한반도 번영의 중심으로

하지만 남북경협은 현대가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대북제재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 설령 돌파구를 찾는다고 해도 무려 10년간 중단된 경협이 다시 재개되는 데는 상당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현 회장의 신념은 확고하다. 2006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오찬 자리에서 “고객이 1명만 있더라도 금강산관광을 해나가겠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낸 이후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연초 신년사에서 “선대회장의 유지인 남북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반드시 현대그룹이 꽃피우겠다”고 선포한 이후 이어진 방북 때마다 남북경협이 ‘역사적 소명’임을 강조해왔다.

정치권에서도 현 회장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미국 재무부가 ‘세컨더리 보이콧(대북제재를 위반했을때 받는 경제제재)’을 시사하자, (기업들이)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이미 만들어둔 대북사업 테스크포스(TF)까지 축소하거나 없애고 있는 판국임에도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에 대한 의지를 감추지 않고 있다”며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관계에 상당한 자극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대그룹은 대북사업 차원을 넘어 남북, 북미관계에 있어 민간외교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얼어붙은 한반도에 ‘마중물’이 됐다면, 앞으로의 20년은 남북경제번영의 중심이 되겠다는 게 그들의 포부다. 이는 17세 때 월남해 평생을 실향민으로 살았던 고 정주영 창업주의 유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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