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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여성 작가 11인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서울대학교 미술관 ‘여성의 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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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2호 김금영⁄ 2019.01.08 10:58:32

‘여성의 일’전에 참여한 (왼쪽부터) 장파, 노승복, 정혜윤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지하철에서 두 여성 사이에 앉아 있는 한 남성. 하지만 차지한 공간은 가장 넓다. 두 여성은 다리를 오므리고 있고, 남성은 다리를 쩍 벌렸다. 이 모습을 또 다른 남성에게 보여주고 여성의 자세를 따라하게 하기도, 어떤 점을 느꼈는지도 물어본다. 조혜정, 조윤경 작가의 공동 작업인 ‘젠더실험’ 영상 중 한 장면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이 ‘여성의 일’전을 2월 24일까지 연다. 전시는 젠더 이슈에 접근한다. 특히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화두가 돼 온 ‘성 평등’에 관한 이슈를 건드린다. 전시를 기획한 김태서 학예연구사는 “201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양성 평등에 입각한 여성주의 운동의 재점화일 것이다. 이는 단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닌 국제적인 흐름이기도 했다”고 짚었다.

 

2층 전시실에는 여성 운동과 관련된 아카이브가 설치됐다. 웹툰을 비롯해 여성 운동 문구가 적힌 티셔츠 등을 볼 수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그는 이어 “여성주의 운동이 이토록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양성 평등이라는 진보적인 의제 아래 정작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반응으로 일관하는 여론전의 모순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미성숙한 현실에 비관하기 쉽다. 하지만 갈등과 출동 속 과거보다 나아지고 성숙해지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며 “이번 전시는 여성이 마주하는 사회적, 개인적 층위의 문제들을 살핀다”고 밝혔다.

전시엔 고등어, 노승복, 리금홍, 박자현, 양유연, 임춘희, 장파, 정정엽(입김), 정혜윤, 조혜정, 홍인숙까지 총 11명의 여성 작가가 참여한다. 여성 작가들이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가시화하는 의도는 좋지만, 젠더 이슈와 관련해 남성 혐오, 여성 혐오 식으로 대립 구도가 치열해지는 현 시대에서 한쪽의 이야기에 치우치는 측면 또한 있지 않았을까?

 

각 전시실 이동 구간에는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등 여성 운동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어 문구들이 보인다.(사진=김금영 기자)

관련해 김 학예연구사는 “성 평등 이슈는 단지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갈등이 어떻게 발생하고 이를 어떻게 치유하고 봉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논의를 거쳐야 한다”며 “이 가운데 지금까지 여성의 발언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자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동시대 여성 작가의 젠더 이슈에 대한 반응을 살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전시가 시작되는 2층 전시실에는 여성 운동과 관련된 아카이브가 설치돼 현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도록 구성됐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고정된 역할과 한계에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사회적 문제로도 거론되는 데이트 폭력 등에 대해 다룬 웹툰 ‘썅년의 미학’ ‘며느라기’ ‘다이아리’ ‘엄마도 땡땡이가 필요해’ 등의 일부도 볼 수 있다.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는 구간에는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등 여성 운동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어 문구들이 보인다.

 

양유연 작가는 몸에 다양한 상처와 질병의 흔적들이 남은 여성의 모습을 그리며 여성에게 주어진 일반적 통념을 비판한다.(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는 작가들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개인사에 주목하는 작품들과 더불어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까지 발언하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양유연, 홍인숙, 정정엽의 작업에서는 여성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양유연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몸에 다양한 상처와 질병의 흔적들이 남은 어두운 모습이다. 김 학예연구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젊은 여성들에 맑고 청초한 이미지의 굴레를 씌울 때가 많다. 양유연은 이런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탈피하고 일반적 통념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그렸다”며 “억압된 상황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무기력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이 가운데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가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홍인숙 작가는 ‘집’ ‘밥’ ‘행복’ 등 엄마 하면 떠오르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따라가다가 말미에 ‘썅’이라는 글자로 일종의 야유를 보내며 여성에게 주어진 고정적 성 역할에 저항한다.(사진=김금영 기자)

홍인숙의 작업은 개인사에 기반을 뒀다. 그는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큰 존재인 엄마와 아빠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로 인해 여성과 남성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가 형성된다고 느꼈다. 엄마에게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이미지, 아빠에게는 한 가정의 주체적인 가장의 이미지가 부여됐다. 그의 작업은 처음엔 ‘집’ ‘밥’ ‘행복’ 등 엄마 하면 떠오르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따라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말미에 ‘썅’이라는 글자로 일종의 야유를 보내며 여성에게 주어진 고정적 성 역할에 저항한다.

정정엽을 주축으로 여성예술가 8인이 결성한 예술그룹 입김이 기획한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는 18여년 만에 재전시된다. 조선왕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적 가부장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종묘를 여성 미술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의도를 지닌 이 작품은, 부계 위주의 질서를 해체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전환을 이번에도 시도한다.

 

노승복 작가의 ‘1366 프로젝트’는 매 맞아 멍든 여성의 신체 이미지 자료를 확대한 것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도 없이 은폐되는 불편한 진실을 꺼낸다.(사진=김금영 기자)

 

여성의 성기에 눈이 달린 이유

 

‘젠더실험’ 영상에서 조혜정 작가는 억압적인 ‘성 역할 바꾸기’ 실험을 시도하며 사소한 일상적 제스처에조차도 물들어 있는 성 역할의 학습 과정을 들춰낸다.(사진=김금영 기자)

노승복, 리금홍, 박자현, 정혜윤, 조혜정은 젠더 이슈의 이면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작업을 보여준다. 노승복의 ‘1366 프로젝트’는 아름다운 색면 추상화 같다. 하지만 1366은 여성폭력 긴급 전화번호로, 화면 또한 매 맞아 멍든 여성의 신체 이미지 자료를 확대한 것이다. 이처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도 없이 은폐되는 불편한 진실을 노승복은 꺼내놓는다.

리금홍은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규방가사-각명기’에 풀어놓는다. 여성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지 못했던 시대에서 이름 석 자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채 살았던 할머니들의 이름을 낙관석에 새겨 도장으로 만들고 그들의 사연을 기록해 책자로 출판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남성의 존재에 가려져 기억의 뒤편으로 감춰진 여성의 이름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삶이 지나간 옛 이야기가 아닌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리금홍 작가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규방가사-각명기’에 풀어놓는다.(사진=김금영 기자)

박자현의 화면엔 20대 비정규직 여성들이 등장한다. 전면을 응시하고는 있지만 초점 없이 공허한 모습들이다. 이는 여성으로서 행동에 수많은 제약을 받는 상황에 대한 은유임과 동시에, 이에 대한 저항이자 아유이기도 하다. 버거운 현실 속 점점 무뎌져가는 여성들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포한다. 정혜윤은 과거 구로공단, 현재는 구로디지털단지라 불리는 장소에 주목하며 1980년대 재봉노동을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시도를 한다. 이를 통해 급변하는 산업구조 속에서도 제한된 직종 이외 선택권의 제한을 받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한다.

앞서 언급된 영상 ‘젠더실험’에서 조혜정은 억압적인 성적 구분에 익숙해진 상황에 ‘성 역할 바꾸기’라는 실험을 시도하며 사소한 일상적 제스처에조차도 물들어 있는 성 역할의 학습 과정을 들춰낸다.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박자현 작가의 작업(왼쪽)과 정정엽을 주축으로 여성예술가 8인이 결성한 예술그룹 입김이 기획한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가 설치된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고등어, 임춘희, 장파는 이런 불편한 현실을 극복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보다 찾아가려는 희망 어린 시도들을 보여준다. 고등어는 여성 입장에서 남성을 타자화 시키며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그의 화면 속 남성은 성취할 수 없는 욕망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여성인 작가는 이를 연민을 갖고 바라보기도 한다.

임춘희의 그림은 변화해 왔다. 1990년대 작품들은 대부분 탁하고 어두운 색조로 표현되며, 그림 속 여성들도 위축되고 공포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밝은 색조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림 속 인물들도 서로 껴안거나 위로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김 학예연구사는 “임춘희는 여성으로서의 공감 능력을 작품에 드러낸다. 자신에게 억압을 줬던 세상과 화해를 통한 공존을 시도하고, 그림 바깥의 관객을 위로의 시선으로 응시한다”고 밝혔다.

 

임춘희 작가는 서로 껴안거나 위로하는 화면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에게 억압을 줬던 세상과 화해를 통한 공존을 시도한다.(사진=김금영 기자)

장파 또한 변화가 돋보인다. 2015년 갤러리잔다리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의 화면은 매우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충격적이었다. 화면 속 여성은 나체로 노골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개나 해골 등 사람이 아닌 존재와 은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또한 보였다. 또한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색이 가득 채워진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그 강한 이미지에서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여성의 성적 욕망의 주요 기관인 여성의 성기를 작은 종이 위에 그려 넣었다. 하지만 작은 돌기를 지닌 성기의 모습은 잔인하고 강압적이기보다는 귀여운 캐릭터 같이 표현됐다. 눈도 달려 있다. 분노보다는 평화로워진 느낌이다. 장파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무시, 또는 간과되기도 했던 여자만이 아는 감각들을 생물처럼 은유해서 만들어봤다. 여기서 여성의 성기는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의 욕망을 감각하는 주체적 기관으로서 존재를 드러낸다”고 밝혔다.

 

장파 작가가 그린 여성의 성기엔 눈이 달려 있다. 이는 여성을 대상화해 바라보는 남성을 응시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으려 노력하는 여성의 의지를 표현한다.(사진=김금영 기자)

그는 이어 “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으로 평화롭게 접근할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물학 DNA를 보는 것 같이 흰색 바탕에 여러 색을 사용했다”며 “성기에 달린 눈은 여성을 대상화해 바라보는 남성을 응시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으려 노력하며 눈을 뜨고 세상을 응시하는 시도”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전시와 관련해 강연과 대담이 마련된다. 1월 24일 서울대학교 미술관 오디토리엄에서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양효실), ‘여성이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가벗어야만 하는가?’(양은희)의 강연이 오후 4시부터 차례로 열리고 이후 대담 시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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