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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세상에 눈뜬 아시아 작가들의 1960~1990년

20세기 중후반 아시아 미술 조망하는 ‘아시아 미술과 사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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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6호 김금영⁄ 2019.02.01 09:23:40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이 열리는 전시장 입구.(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세상에 눈뜨다.” 국립현대미술관 MMCA 과천 1, 2 전시실 및 중앙홀에서 열리는 전시는 이 타이틀을 내세웠다.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은 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 아시아센터가 공동 주최하는 전시로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싱가로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 13개국의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 점을 선보인다.

앞서 도쿄에서 먼저 전시가 열렸고, 이번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5월 6일까지 열린 뒤 싱가포르국립미술관에서 순회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아시아 미술을 이야기할 때 서구 미술의 영향 아래 다뤄질 때가 많았다. 외래로부터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시아 사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새로운 예술 태도의 경향을 만들어내려는 자각 또한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세상에 눈을 떴다는 어웨이크닝(awakening)을 전시 타이틀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필리핀 작가 레나토 아블란의 작품(왼쪽)과 한국 작가 신학철의 작품이 함께 설치됐다.(사진=김금영 기자)

특히 전시는 1960년대부터 1990년까지의 아시아 예술에 집중했다. 배 학예연구사는 “그간 아시아 미술사를 주제로 한 전시들은 대부분이 60년대 이전 또는 90년대 이후에 집중한 경향이 있었다”며 “60년대부터 90년까지 아시아는 탈 식민, 이념 대립, 베트남 전쟁, 민족주의 대두, 근대화, 민주화 운동 등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예술가들은 권위와 관습에 저항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기존 예술의 개념과 범주, 미술 제도에 도전하는 실험적 미술 사조를 이끌었다”며 이번 전시의 시대적 배경을 밝혔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의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등 아시아 여러 국가의 협력으로 이뤄지는 이번 전시로 인해 각국의 작가들 또한 교류를 갖게 됐다. 전시에 참여한 윤석남(한국) 작가는 “외국에서 온 작가들과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밝혔고 김구림(한국) 작가 또한 “우리가 젊을 때는 원하는 예술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너무 힘든 세상이었는데 아시아 국가 작가들이 모여 이렇게 큰 전시를 하게 되는 날이 왔다는 게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는 권총 모양의 크래커 더미와 관람객에게 던지는 질문 문구를 함께 배치한 작업이다.(사진=김금영 기자)

작가 선정 기준에 대해 배 학예연구사는 “각국의 큐레이터 8명이 12개국 17개 도시로 리서치 트립을 다니며 작가들과 작업과 연관된 연구자들을 만났다. 큐레이터들의 생각을 공유해서 최종적으로 작가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크게 ▲‘구조를 의심하다’ ▲‘예술가와 도시’ ▲‘새로운 연대’ 3부로 구성되며 각각이 세부 섹션으로 나눠진다. 특히 전시를 꾸릴 때 주안점을 둔 건 국가별 전시를 지양한 것. 배 학예연구사는 “국가별로 공간을 나눠 따로 전시하지 않고, 초국가적 체계 안에서 각국의 문화를 비교하는 형태로 접근하고자 했다. 아시아 현대미술의 문화적 상호작용을 느끼게 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혔다.

 

김구림 작가가 1970년 한강 살곶다리 부근에서 잔디를 불로 태워 삼각형의 흔적을 남겼던 작업 관련 아카이브.(사진=김금영 기자)

예컨대 전시 도입부에 설치된 필리핀 작가 레나토 아블란과 한국 작가 신학철의 작품은 80년대 민중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비슷한 분위기와 구도가 눈길을 끈다. 배 학예연구사는 “레나토 아블란은 ‘민족의 드라마’를 통해 마르코스 독재 시기 억압으로 고통 받거나 죽은 민중의 모습을 표현했고, 민중미술 작가 신학철은 80년대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을 펼친 민중의 현실과 일상의 맥락을 예술 작품에 담아냈다”며 “두 작가는 서로 만나본 적도, 교류한 적도 없지만 작품을 통해 공명하는 점이 돋보인다. 국가 현실을 표현한 방법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공명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이 공간에서는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을 무엇을 하겠습니까?’ 작품도 눈에 띈다. 작가가 1977년 신미술운동 전시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권총 모양의 크래커 더미와 ‘만약 이 권총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문구를 전시장에 배치한 작업이다. 작가는 “인도네시아에서 1977년 군사정권으로 압박을 받을 당시 반군사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없어 작품으로서 풀어냈던 게 이 작업”이라며 “관람객에게 문장으로 질문을 던지고 자발적으로 반응을 적도록 유도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고 의도를 밝혔다.

 

싱가포르 작가 탕다우의 ‘도랑과 커튼’이 전시장 천장에 설치됐다. 이 작품은 도랑 안에 천을 넣어두고 이 천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난 과정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사진=김금영 기자)

▲‘구조를 의심하다’는 미술의 경계가 시험대에 오르고, 미술의 정의가 확장하고 변하기 시작했던 시점을 다룬다.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 매체 대신 자신의 신체나 일상의 재료를 사용한 작가들의 시도가 돋보인다. 김구림 작가가 1970년 한강 살곶다리 부근에서 잔디를 불로 태워 삼각형의 흔적을 남겼던 작업 관련 아카이브도 이 공간에서 볼 수 있다. 작가는 “모든 것이 나의 캔버스라는 생각으로 시도한 작업이었다. 지금이야 예술로 이야기되지만 당시엔 이 작업으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배 학예연구사는 “이 작업은 불탄 잔디에 새순이 돋아서 태워졌던 흔적이 사라지는 자연의 현상을 미술로 가져왔다. 미술의 경계를 확장한 대표적인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싱가포르 작가 탕다우의 ‘도랑과 커튼’도 이 공간에 설치됐다. 1979년 제작된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이 살던 동네가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되자 그 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든 주체는 다름 아닌 자연이다. 작가는 “도랑 안에 천을 넣어 자연 현상을 기록해보고자 했다. 나는 천에 선을 긋는 행위 딱 하나만 했고 이후 비와 바람이 천에 자국을 만들었다”며 “나는 재료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재료와 내가 관계를 맺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권위와 관습에 저항하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 격동의 시기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이번 전시는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싱가로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 13개국의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 점을 선보인다.(사진=김금영 기자)

▲‘예술가와 도시’는 1960년대 이후 급진적으로 아시아에 전개된 경제 개발과 근대화 시기에 집중한다. 배 학예연구사는 “서구 사회의 근대화가 10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졌다면 아시아에서는 냉전 시기에서 공산주의에 맞서는 경제 개발의 맥락 아래 근대화가 다소 급진적으로 이뤄졌다”며 “산업화와 자본주의라는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새롭게 떠오른 도시 환경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시각 자료 원천이자 예술 무대였으며, 동시에 도시화에서 파생된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이 공간에서는 예술가들이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에서 벗어나 대중과 만나고 예술과 일상의 통합, 예술과 사회의 소통을 실현하는 대안적인 예술 형태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오윤(한국) 작가의 ‘마케팅Ⅰ: 지옥도’는 조선시대 불화인 화엄사 시왕도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이를 코카콜라, 맥심 등 현대 광고 문구와 혼용해 소비문화가 팽배해 있던 1980년대 한국사회를 일종의 지옥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펄펄 끓는 물에 내던져지는 화탕 지옥을 휘발유 제품명 CX3과 연결시키고, 거대한 나무 판에 짓이겨지는 석개 지옥을 코카 콜라 상품명과 결합해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지금 현재가 곧 지옥임을 암시했다.

 

오윤 작가의 ‘마케팅Ⅰ: 지옥도’는 조선시대 불화인 화엄사 시왕도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이를 코카콜라, 맥심 등 현대 광고 문구와 혼용해 소비문화가 팽배해 있던 1980년대 한국사회를 일종의 지옥으로 풍자한 작품이다.(사진=김금영 기자)

민중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의 멤버였던 민정기(한국) 작가의 ‘영화를 보고 만족하는 K씨’ 작품도 설치됐다. 작가는 “지금은 이 작품이 나란히 설치됐지만 80년대 이 작품을 전시에서 선보였을 당시엔 따로 떼어져 설치되는 등 억압을 받았다”고 말했다. 두 폭 그림에서 왼쪽 화면은 나체의 깡마른 남자가 의사들에게 취조 받는 상황, 오른쪽 화면은 대규모 군중들이 극장에서 노란색 스크린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담았다. 배 학예연구사는 “무엇에 홀린 듯 노란색 스크린 화면에 집중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당대 권력이 장악한 대중 매체에 의해 생각을 조종당하는 대중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밝혔다.

▲‘새로운 연대’는 작가들이 개인 아뜰리에서 벗어나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며 연대를 통해 억압적인 권력, 사회적 금기,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도전한 움직임에 주목한다. 배 학예연구사는 “1980년대 이후 한국, 필리핀, 태국, 타이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는 학생운동, 계엄령을 선포한 군사정권과 민주화 운동,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등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며 “이 시기에 학제 간 협력을 기반으로 퍼포먼스, 연극, 사운드 등 복합장르 예술 활동을 추구한 실험적인 예술가 그룹이 출연했다. 연대를 이룬 예술가들은 예술의 대 사회적 소통 기능을 발견하며 많은 사람과 현실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연대’를 주제로 하는 전시 공간에는 작가들이 개인 아뜰리에서 벗어나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며 연대를 통해 억압적인 권력, 사회적 금기,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도전한 작품들을 선보인다.(사진=김금영 기자)

미술사학자 최열의 민중미술 컬렉션을 비롯해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미술작가로 불리는 홍성담과 오윤의 작품도 이 공간에서 볼 수 있다. 홍성담의 ‘5.18 연작-새벽’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참여해 당시 주요 모습을 시간대별로 나눠 연작화한 것으로 총 50점으로 구성됐다. 민중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의 주요 멤버였던 오윤의 ‘원귀도’는 동학혁명, 한국전쟁, 5.18 민주화 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민중의 한을 파노라마 식으로 보여준다.

세부 섹션 ‘젠더와 사회’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사회 정치적 기능을 재인식했던 여성주의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시월모임, 여성미술연구회 등 여성미술 연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 운동,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저항과 함께 가부장 사회의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필리핀 여성미술연대 카시불란 등이 예로 꼽힌다.

 

미술사학자 최열의 민중미술 컬렉션이 설치된 공간.(사진=김금영 기자)

이 섹션에서 ‘어머니 2 – 딸과 아들’ 작품을 선보이는 윤석남 작가 또한 1985년 김인순, 김진숙 등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해 여성미술운동을 시작했다. 작가는 “40세 때 작품을 시작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나와 타인의 소통이었다. 단지 외롭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인간으로서 여기 살아 있고, 당신과 소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소통의 방식이 바로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꺼내고 소통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1979년 그림을 시작해 1982년 개인전 주제가 ‘어머니’였고 지금까지 쭉 어머니를 그려 왔다”고 덧붙였다.

전시의 마지막은 ‘역사 재해석하기와 새로운 연대’라는 세부 섹션으로 마무리된다. 이데올로기가 조정한 역사와 기억을 다시 해석하며 대안 역사를 쓴 예술 작품을 소개한다. 타이완 작가 왕쥔제, 쳉슈리의 ‘역사는 어떻게 상처 입었는가’와 말레이시아 작가 웡호이청의 ‘나는 꿈이 있다’ 등이 설치됐다. 배 학예연구사는 “잊히고 억압된 역사의 파편을 건져 올려 재구성하며 새로운 잠재적 연대를 구성하는 작품으로 전시가 마무리된다”며 “이번 전시가 다양성이 공존하는 아시아 현대미술의 역동적인 지형도를 그려낼뿐 아니라, 서구 중심의 미술사 서술을 재구성하며 아시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윤석남 작가의 ‘어머니 2 – 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가족 사진 열 장을 배경으로 나무 위에 채색한 등신대 크기의 어머니와 딸, 아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사진=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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