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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책읽는 발행인 칼럼] 3.1절 100주년, 왜 북한은 조용?…설익은 공동경축보다 시각차 극복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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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30호 최영태 발행인⁄ 2019.03.08 09:41:37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남한 사람들의 큰 실수 하나가 북한에 대해 잘 모르면서 미뤄 짐작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며칠 전 tbs방송의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은 이렇게 말했다. “남한 사람들은 요즘에도 북한의 인기 가요가 ‘반갑습니다’ ‘휘파람’인 걸로 아는데 요즘 누가 그걸 불러요? 언제적 노랜데?”

 

언론매체가 북한에 대해 알려주는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단편적이기 때문에, 예컨대 한 유행가를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부르고 있는 것으로(유행가의 속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남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도 한다. “북한 사람들은 거의 전원이 남한 TV를 몰래 시청하기 때문에 남한을 속속들이 아는데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전혀 몰라 큰일”이라고.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이 쓴 책 '아리랑 소나타' 표지.

아는 게 힘이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남한사람들을 ‘북한 문맹’으로 만들고 있는 남한의 정보 통제는 우려스러울 정도다.

“북한에서도 3.1절은 큰 경축일일 것”
미뤄 짐작하는 남한인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도 아귀가 맞지 않을 게 뻔한 구상이 마구 떠올랐다. 3.1운동과 그 여파로 생겨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돼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원이다. 그래서 올해 벽두부터 남한에서는 “역사적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남북한이 함께 기념행사를 개최하면, 또 그때를 맞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답방을 하면 참으로 감격적이겠다”란 예상과 기대가 컸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3.1절 즈음 서울답방은 북미정상회담이 늦어지고 또 결렬되면서 무산됐지만, 설사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더라도 3.1절 남북공동경축 행사가 남한인의 기대대로 됐을지는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3.1절은 북한에서 그리 중요한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남한에서는 3.1절이 광복절과 함께 양대 경축일이지만, 북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북한에서는 3월 1일이 공휴일도 아니며 정부 요인이 참석하는 기념행사도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남북공동 3.1절 100주년 경축'은 

처음부터 무리였던 발상?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100주년 3.1절 기념식상에 ‘현재의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연단에 올랐을 정도로 남한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북한 역사 책들은 이 33인을 ‘무능-부패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무리’로 간단히 평가절하한다.

 

북한이 2009년 펴낸 3.1운동 90주년 기념 우표. 이렇게 기념은 하지만 국정 공휴일은 아니다. 또한 명칭도 '3.1인민봉기'라 하여, 그때의 인민봉기를 중시하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등은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민족주의 상층부는 일제에게 청원하는 방법으로 또는 다른 큰 나라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룩해보려고 하였으며 바로 이 목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그것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애국적 인민대중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대대적인 봉기로서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려고 떨쳐나섰다. 이렇게 되자 민족주의 상층부는 겁에 질려 일제 경찰에 자진하여 가서 투항하였으며 대중에게는 무저항주의를 설교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대중적 봉기는 그 어떠한 통일적 지도도 없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산만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들은 일제의 야수적인 폭력 앞에 각개격파당하고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북한-일본 학자들이 ‘민족대표 33인’을 우습게 보는 이유
 

도쿄 2.8독립선언서를 숨겨갖고 국내로 들어왔다가 붙잡혀 옥사한 송계백 선생.

즉,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선언서가 모자 속에 숨겨져 조선 안으로 들어와 최남선, 천도교 지도자(손병희, 최린 등)에게 전달되고, 고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춰 천도교와 기독교 주최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는 논의가 전개됐지만, 천도교-기독교 중심의 주도 세력은 ‘독립선언서 발표’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에만 중점을 두었지, 대중적 가두시위 투쟁은 애초부터 염두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도교-기독교 지도부의 이런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조선총독부의 정치-경제적 탄압(무단통치)에 시달린 조선 민중들의 분노는 고종의 장례식을 맞아 폭발했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준비하고 실행했다. 이런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33인 민족대표는 급히 원래 예정됐던 탑골공원에서의 낭독을 취소하고 요리점 태화관으로 옮겨 앉아 실내 회동으로 변경했으며, 모여 앉자마자 총독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우리를 잡아가시오” 하고 자진신고를 했다. 가두시위와 자신들은 상관이 없음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광화문 기념비각 앞까지 진출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반면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등사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탑골공원에서 보신각 쪽으로 가두행진을 벌였고, 이는 곧 전국적인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 대시위(최소한 두 달 간 한반도 전역에서 피를 뿌리게 만들었던)에는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피가 너무 많이 흘렀고 결국 실패했다는 게 북한의 비판 요지다.

 

이러한 비판은 그대로 일본 학자들로 이어졌다는 게 일본의 양심적 친한(親韓) 지식인의 대표 격인 와다 하루키 전 도쿄대 교수의 진단이다. 하루키 교수는 저서 ‘한일 100년사’에서 3.1운동에 대한 일본 내의 평가사(史)를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전한다.

(1945년 패전 뒤) 일본인이 쓴 최초의 조선 근대사라 할 수 있는 와타나베 마나부(渡部學) 편 ‘조선 근대사’(1968년)는 3.1독립선언문에 대해 ‘인도주의에 입각한 당당한 명문이지만 조선총독부의 토지 수탈이나 동화 교육, 헌병-경찰의 만행 등에 대해 전혀 항의하지 않고 있다. 조선 인민의 진정한 분노를 반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투쟁이 아니라, 미국을 필두로 한 유럽 여러 나라의 원조와 일본 제국주의의 이성에 호소하여 달성하려 했다. 그것은 선언문의 공약 3장에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뒤이어 1971년에 나온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郎) 저 ‘일본 통치 아래의 조선’도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은 어떻게 봐도 어이없다’고 비판했으며, 1974년 조선사연구회가 펴낸 ‘조선 역사’ 역시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자신들만 요리집에 모여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체포 당하는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구미 여러 나라의 원조와 일본의 이성에 호소하여 청원으로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대중의 혁명적 역량에 의거하는 걸 몰랐다. 그렇지만 대중은 그들을 뛰어넘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데모 행진을 시작하였다’고 정리했다.

북한 편을 든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이 

일해석의 주류 이뤄

이처럼 일본의 중요한 조선사 책들이 모두 3·1 독립운동 자체는 중요하게 보면서도 독립선언서의 내용이나 그것을 발표한 민족대표의 자세-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평가한 데는, 재일동포 역사가 강덕상 교수의 영향이 컸다며 하루키 교수는 강 교수가 일본의 ‘사학 잡지’ 1971년 5월호에 발표한 다음 글을 소개한다.

 

일본 역사학자들의 3.1운동 이해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책 '한일 100년사'.  

“3·1 운동사에 한정해서도 최대의 희생을 치르고 일제에 직접 항쟁하고 운동을 직접 지탱하였던 인민 대중과, 투쟁 초기부터 어떠한 지도적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일제에 투항하여 감옥에 안주했던 민족대표는 동렬에 놓을 수 없다. 그들의 영웅적 행동이 3·1 정신으로 남한 헌법의 전문에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족대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이른바 대한민국 역대 지도층이 거꾸로 된 의미에서의 계급적 관점에 서서 역사적 계보에 대해 평가한 것일 수밖에 없다.”


강 교수는 ‘한심한 민족대표가 한국에서 평가받고 있는 건 우스꽝스럽다’고 쓴 것이며, 이렇 게 된 데는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모두 이승만으로서, 직접적인 연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유난히 남한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만을 귀하게 여기게 된 사정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북한의 입장에 대해 ‘민족대표들은 싸울 마음이 없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친일파가 됐다. 한심한 일당으로 무기를 가지고 싸울 기세도 없었다. 역시 무기를 가지고 싸우지 않으면 일본 제국주의는 무너뜨릴 수 없다. 무기를 가지고 싸운 게 김일성의 만주 항일 전쟁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만주 항일 전쟁을 출발점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진정한 민족적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북한의 3.1운동 평가의 이면에 숨어 있다. 3·1운동에 대해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대단히 낮은 평가가 주어진 것은 당시에 거의 모든 역사가가 북한 편을 드는 진보 성향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남한은 ‘양복 입은 독립운동’을 우대,
북한은 ‘김일성 빨치산 아니면 안 돼’ 편향


결국 △‘민족주의’를 중시한 남한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 모두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정도 있기에 상해임시정부를 극히 귀중하게 생각하고, 임정의 출발점이 된 3.1운동과 민족대표 33인을 귀하게 여기는 반면,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한 북한은, 김일성의 무장 항일빨치산 투쟁 이외의 모든 항일투쟁을 정통파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3.1운동과 뒤이은 상해임시정부 모두를 평가절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한의 평가는 모두 ‘반쪽짜리’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남한은 상해임정만을 유일 정통성으로, 북한은 김일성 빨치산만을 유일 정통성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국무원을 구성한 뒤 기념촬영을 한 안창호 선생(가운데) 등 임정 관계자들.
3.1운동 뒤 1919년 만주에서 5월 3일 개교한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

 

최근 문재인정부가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 결국 포기한 바 있다. 상해임정에 치우친 남한의 태도는 국내 사학자의 책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박근혜정부 시절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에 강하게 반기를 들었던 역사 교육 전문가 심용환의 책 ‘단박에 한국사 근대편’의 다음 구절을 보자.

 

1920년 한 해에만 국내로 진공을 목표로 한 유격전이 1700여 건이었을 정도로 몸서리치는 노력을 합니다. 1921년에는 602건, 1922년에는 397건, 1923년에는 454건, 치열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분투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1921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의 갈등이 심해지고, 간도참변-자유시참변 등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한 위기에 처함에도 이런 기록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1920년은 만주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기록적인 해입니다.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일본 사단 병력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루어내니까요. (중략) 19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꼭 기억해야 할 연도입니다.(355쪽)

 

상해임정에서 정치싸움만 할 때도

치열하게 싸운 독립군 부대들 

 

국내에서 7500여 명이 숨지는 ‘시민 혈전’ 3.1운동이 벌어진 뒤 1920년부터 만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이 큰 고조를 이뤄 1920년 한 해에만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조선반도로 진입하려는 항일 전투가 하루에 5번 꼴로, 정말 치열하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나게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런 독립군의 전투는 그 뒤 상해임정에서 계파-정치 싸움, 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 등 내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어졌다고 저자는 전하고 있다.


상해임정 출범 날을 공휴일로 경축하려면, 만주에서 독립군을 결성해 싸운 날들, 예컨대 이시영 선생 일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면서 전재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날(1919년 5월 3일) 등도 함께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심용환 선생의 말을 따르자면 일본제국주의를 진정으로 괴롭힌 것은 내분으로 날을 지샌 상해임정이 아니라 청산리대첩 등의 공을 세운 만주 독립군인데, 독립군의 날은 기념하지 않고 상해임정 설립일만을 기념한다면 형평성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내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폐허가 된 사찰의 담장에 항일 표어를 쓰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 선전대원. 중조(中朝)가 아니라 중한(中韓) 양 민족이 일어나 강도 일본을 타도하자는 구호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안에서 항일 투쟁을 벌인 이른바 '연안파' 지도자들은 1950년대에 김일성 일파에 의해 숙청되었다.

 

물론, 남한의 역사 연구가나 정부 당국이 상해임정을 중시하고 만주 독립군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있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 신흥무관학교 설립일 등을 기념하다보면, 1912년생으로 3.1운동 당시 만 7세에 불과했던 김일성 소년이 성장해 항일독립 유격대를 조직해 싸우는 얘기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남한의 역사학자나 정부 당국자는 무장항쟁 독립노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기 쉬웠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김일성 무장항쟁’이 그렇게 두려운가?
 

그러나 김일성의 빨치산 유격대가 무서워, ‘양복 입고 활동한’ 상해임시정부는 기리고, 반대로 ‘군복 입고 싸운’ 독립군은 기리지 않는다면, 그건 공정하지 못하다. 더구나 북한은 그간 김씨 일가로의 권력 집중화를 위해 비단 3.1운동 당시와 그 이후의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절하-부정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의 공동 창립자로서 정권의 2인자였던 조선공산당 설립자 박헌영 등 남로당 출신 △‘연안파’로 불린 중국 활동 독립운동가 그룹 △이른바 ‘소련파’로서 당시 소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 △‘갑산파’라고 불린 함경북도 내의 사회주의 항일 운동가들을 모두 미국의 간첩, 분열분자로 몰아 숙청한 바 있다. 김일성 빨치산 유격대만이 유일하게 옳은 활동이었고 나머지 항일 투쟁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정리해버렸다는 소리다.

 

북한 김씨 정권의 이러한 무차별 숙청의 결과는 심각하다. 그 한 예로서 김정은 시대에도 정권의 2인자였던 장성택의 경우를 한 번 보자. 라종일 교수의 책 ‘장성택의 길’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이들(갑산파)의 숙청과 함께, 김일성과 그 일가만을 당과 국가의 유일한 중심으로 삼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세력이 없어진 셈이었다. (중략) 김을규 총정치국장은 인민군이 길주-명천 농민운동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비판받았다. 그런데 장성택의 부친이 바로 일제강점기 길주-명천에 있었던 사회주의 농민운동에 관련되어 있었다. (중략) 장성택은 원칙적으로 성분상 핵심 계층에 속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1967년 제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에 장성택의 성분은 크게 떠들기는커녕 공식적으로 내놓을 수도 없이 오히려 쉬쉬해야 하는 신분으로 변했다. (중략) 그는 13세 때 평양의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중략) 장성택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그의 가족 배경인 항일농민투쟁이 혁명 전통의 일부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71~75쪽)


다시 말해, 장성택 부친의 농민운동은 장성택이 13살 때까지만 해도 혁명 전통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 즉 김일성 항일빨치산 활동만을 ‘유일하게 옳은’ 혁명 전통으로 옹립하면서 혁명 전통에서 제외됐다니,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그때는 혁명운동 맞았지만 지금은 아니라구?

 

비슷한 얘기는 탈북한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 태영호 씨의 책 ‘태영호 증언 - 3층 서기실의 암호

’에도 나온다.

더욱 가관인 것은 북한을 위해 싸웠던 남로당 출신들, 일본에서 ‘사회주의 조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마저 핵심계층에서 일반 동요계층으로 구분되었다.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을지라도 김일성부대 출신이 아니면 ‘혁명 전통을 상하좌우로 넓히려는 반당세력’으로 분류되어 그 자녀와 함께 당과 국가의 요직에서 추방되었다.(512쪽)

이처럼 같이 항일운동을 했어도 김일성 빨치산이 아니면 모두 이단으로 밀어붙여 숙청-추방을 한 것이 북한 유일체제이므로, 남한이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 얘기를 하기 싫어서, 상해임정만을 우대하고,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한 애국지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쓰는 편협한 방침을 택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김일성 빨치산부대의 공적은 공적대로 인정을 하되 북한이 내친 나머지 모든 독립 활동들을 개방된 남한 체제가 품어 안으면 된다. 김일성 항일부대가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普天堡)로 쳐들어와 일본군 부대와 싸워서 승리했다는 이른바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동아일보가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널리 알렸다. 동아일보는 1998년 동아일보 취재진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이 호외를 금동판에 새겨 당시 김정일 위원장에게 선물했고, 이 선물은 현재 묘향산의 ‘국제 친선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 방문자들의 전언이다.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에도,
또 1998년에도 인정한 김일성 보천보 전투


아래는 이곳을 방문한 재미동포 신은미 씨의 방문기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162~16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2011년 10월 첫 북한 관광 당시 묘향산에 있는 ‘국제 친선 박물관’이라는 곳을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세계 곳곳에서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온 수십만 점의 선물들을 전시해놓은 곳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반공’을 앞세워 국민들을 통치했던 박정희, 전두환 등 남한의 전직 대통령들이 보낸 선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외교적인 수사를 동반한 제스처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작 나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동아일보에서 보내온 금속판이었다. 김일성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보천보라는 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금동판으로 제작해 선물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왜 그런 선물을 북한에 한 것일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항일 무장 투쟁을 한 바로 그 김일성 장군이란 뜻인가? 나야말로 ‘가짜’ 교육을 받았단 말인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하던 바로 그 김일성 장군이기 때문에 그런 선물을 했음이 분명하다.

 

김일성 유격대의 '보천보 전투'를 호외로 알린 동아일보의 1937년 6월 5일자. '김일성'이란 이름을 당시 조선인에게 널리 알린 게 바로 이 보도였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1998년 취재진의 북한 방문 때 이 호외를 금동판에 새겨 김정일 위원장에게 선물했고 현재 묘향산의 '국제 친선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자칭 ‘민족지’ 동아일보가 이런 호외를 내고 사후에 이런 선물까지 했으면서도, 이제 남북 화해무드가 무르익어가고, 남북경협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김일성 항일투쟁이 남한 국민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상해임정의 업적만을 과잉선전하고,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 독립군들을 홀대한다는 편향된 태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있을 수 없다.


남한이 개방사회라는 장점을 밀고나가면서 북한이 내친 3.1운동과 그 이후의 온갖 독립운동(국내에서의 실력양성운동이든, 중국에서의 무력항쟁노선이든, 해외에서의 외교적 노력이든)을 껴안아야 한다. 이 모두가, 심지어 이광수 등의 '뼛속까지 친일'도, 저렇게 하면 본인뿐 아니라 민족 전체가 불행해진다는 교훈을 주기에, 우리에겐 소중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현재 남북한의 3.1운동 기념 방식은 정신적으로 '분단'된 양상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의 분단을 끊어낼 수 있어야 국토의 통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작년 남북정상회담에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공동개최하기로 합의했지만, 결국 올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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