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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기업문화 파고드는 자유화 물결, 얼마나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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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53호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9.10.14 09:24:30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문화가 경제다’를 캐치 프레이즈로 내건 CNB저널(Culture & Business Journal)은 이번 호부터 ‘기업 문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커버 스토리 또는 주요 기사로서 매주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첫 순서로, 이번 호에는 [“CP(공정자율준수)가 매출 발목? 그런 시대 갔다”] 기사와, [복장자유화 등 혁신으로 항공업 위기탈출?] 기사를 싣습니다.

한국의 기업문화는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권위주의적입니다. 층층시하의 상명하복 권위주의입니다. 한국 기업의 역사는, 헌병-경찰이 총칼로 인민들을 다스려도 아무 문제없던 일제강점 치하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군부독재 시대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재벌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든 아니면 군부독재 시기든, ‘지도자가 결정하면 근로자는 난관을 무릅쓰고 일사분란하게 따른다’는 전통이 만들어져온 사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권위주의 기업문화는 산업시대, 즉 공장에서 사정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물건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조립해내느냐가 기업과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던 시대에는 잘 맞았지요. 근로자 개개인은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기계와 비슷해지면 질수록 더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시대는 진즉에 끝났고, 이제는 기업 전체뿐 아니라 기업을 구성하는 임직원 개개인이 창의-창발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도태하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됐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20년 장기 불황’에 시달린 끝에 이제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에 마구 뒤처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런 창의-창발성이 발휘되기 힘든 ‘왕의 나라(王國)’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왕의 존재는, 왕과의 거리에 따라 신분이 결정됨을 뜻하고, 이런 신분제 사회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혁신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한국 항공사의 권위주의-군사주의적 전통

이번 호 기업문화 기사 중 하나로 대한항공 등 항공업계의 복장-두발-소통 자유화 흐름을 다뤘습니다. 항공업계야말로 한국 기업 중 가장 권위주의-군사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국적 항공사’라는 말이 존재합니다. 다른 업종에는 ‘국적’이라는 말을 거의 붙이지 않으니 항공업이 얼마나 관(官) 성격이 짙은지를 알 수 있지요. 또한 항공사의 가장 중요한 인력인 여객기 조종사들이 거의 전원 군 출신이라는 데서도 항공사의 권위주의적-군사문화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지요.

 

(왼쪽) 작년 초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가운데, 당시 사장)이 신입사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과, (오른쪽) 올해 복장자유화를 도입한 뒤의 모습에서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사진 = 대한항공 

최근 몇 년 간 ‘땅콩 회황’이니 ‘물컵 던지기’ 사건, 또는 여승무원을 동원한 자극적 사내 공연 문화 등의 물의가 국내 항공업계에서 벌어졌던 것도, 이러한 기업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항공업계의 이런 권위주의적 문화는 ‘총수 일가의 자격 문제’로까지 번졌지만, 사람의 생명을 대량으로 앗아가는 사태까지 과거에는 유발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2009년)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보지요.

미국인다운 방식이란 관제탑의 관제사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략) 미국인은 자신과 조종사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부기장의 완곡어법이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간곡한 화법으로 읽히지도 않는다. 완곡어법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뜻할 뿐 (중략) 비행기 조종사의 행동을 설명할 때 문화적 요소를 강조해온 심리학자 Robert Helmreich는 전세계 조종사의 PDI(Power Distance Index)를 측정했는데, 1위는 브라질이었고, 2위는 한국이었다.(238쪽)

서구인의 의사소통은 언어학자들이 화자중심이라고 부르는 원칙, 즉 의사소통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부정확하게 말한 화자에게 책임을 묻는 원칙에 기반 (중략) 한국은 다른 많은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청자중심이다. 대화 내용을 알아듣는 것은 듣는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기관사가 보기에 자신은 충분히 말했다.

기상레이더를 기준으로 전진하는 1997년 괌행 801편 대한항공에서 기장에게 기관사는 “오늘, 기상레이더 덕 많이 본다”고 말했고 이는 문제가 심각한다는 의미를 말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기장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장은 지쳐 있었고 기관사의 속마음은 기장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기장은 “그래, 정말 쓸모있지”라고 말했다.(250쪽)

한국어의 대화는 세련되다. 그러나 권력 간격이 먼 대화는 듣는 사람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능력이 있을 때라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양쪽 모두 상대방 의중을 떠볼 만한 시간이 많을 때 가능 (중략) 탈진한 조종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대화법 (중략) 2000년 델타항공으로부터 스카웃된 David Greenberg 비행담당자는 대한항공의 조종사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심어 주자고 애썼다. 그들이 문화적 유산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251쪽)

 

1997년 8월 6일 괌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801편의 처참한 잔해. 사진 = 위키피디아

1997년 괌 착륙 과정에서 대한항공 여객기가 야산에 부딪힘으로써 탑승 승객+승무원 254명 중 228명이 숨진 사고와 그 사후처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 블랙박스에 담긴 기장과 기관사의 대화를 들어보면 듣는 사람이 환장할 정도랍니다. 기관사는 분명 ‘여객기가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한국말 식으로 세련되게 빙빙 돌려 전달하려 했지만 기장은 끝내 알아듣지 못하고 여객기는 산을 향해 돌진하니 말입니다.

글래드웰은 이 여객기가 미국 국적이었다면 미국인 기관사가 처음엔 예의를 차려 말하더라도 결정적 순간이 되면 바로 “You are wrong(당신은 지금 잘못 가고 있다)”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미국 여객기라면 비극적인 괌 추락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진단이지요.

“영어로만 소통”급 파격적 조치 없으려면

PDI 지수란 권위주의 탓에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지수라 하겠습니다. 당시 너무 사고가 자주 나자, 대한항공은 미국인 비행담당자 그린버그를 초빙했고, 그린버그의 제1호 명령은 “지금부터 대한항공 조종사들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만으로 대화한다”였고, 그 뒤 사고는 크게 줄었다고 위 책은 소개합니다.

당시 세계 2위의 ‘불통’ 대화 문화를 갖고 있던 대한항공의 문제를 ‘언어 교체’라는 초과격 조치를 통해 시정했다는 것이지요. 문화가 ‘공통의 유산’이라면 언어만큼 중요한 문화 요소가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면서도 존댓말이라는 예의겸양 탓에 “당신 지금 잘못 하고 있어!”라 외치지 못하는 한국의 문화적 유산의 함정을 ‘언어 교체’라는 수단을 통해 극복한 스토리입니다.

최근 대한항공 등 한국 항공업계에 불고 있는 자유화 바람은, 지난 50년간(대한항공은 올해가 50주년) 한국 항공업계를 지배한 권위주의-불통 문화를 끊어내고자 하는 노력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외모 변화(자유 복장, 두발 자유화 등)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 정도의 외적 변화만으로 진정한 탈바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좀 두고 봐야겠지요. 그린버그가 해냈던 ‘언어 교체’ 정도의 더욱 더 근본적이고 충격적인 조치가 필요할지 아닐지는 대한항공 등에 최근 불어들기 시작한 자유화 바람이 어떤 성과를 거두는지를 지켜본 뒤에 결판이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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