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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간다 (63) 독백탄 ①] 북한강 산수와 남한강 습수가 만나는 ‘독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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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8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10.15 11:39:19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 찾아가는 겸재 그림 길도 경교명승첩 속 그림 독백탄(獨栢灘)이다. 지난 호(號)에 실은 녹운탄처럼 독백탄이라는 곳은 지도나 문헌 어디에도 없다. 요즈음의 지명으로 살피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兩水頭, 二水頭) 앞 두 물길이 합쳐 여울지던 그곳이었다. 지금이야 팔당댐이 물길을 가두어 잔잔한 호수가 되었지만 돌과 바위 바닥에 물결이 부딪쳐 사나운 곳이었다 한다. 그 시절 이 여울의 이름은 병탄(並灘)이었다. 두 물길이 어우러져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이었다. 병탄은 한자를 빌려 쓴 것일 터이고 분명 우리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무어라 했었을까?

지난 호에 소개했듯이 이 강을 거슬러 오른 기록 중에 삼연 김창흡 선생의 단구일기(丹丘日記)를 잠시 빌려 오자. 삼주삼산각이 있던 미호(渼湖)에서 출발하여 단양으로 가는 첫날 1688년 3월 4일 이곳을 지나갔다.

초4일 날이 흐렸는데 한식이라 성묘를 끝내고 오후에 덕포(미호나루)를 출발하였다. 일사정(一絲亭)을 지나 방장도 화탄(花灘)을 구불구불 남으로 꺾어 마탄(馬灘)을 거슬러 올랐다. 마침 서풍이 바야흐로 일어나니 돛을 올려 속도를 내게 했다. 그리고는,

“배안에서 바라보니 그다지 빠른 줄 몰랐는데 곁눈으로 주위를 살피니 휙휙 달리는 것이 마치 말들이 서로 달리는 것 같았다. 두미강의 여러 산(예봉산, 예빈산, 검단산…)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보안역(능내리 봉안마을) 앞에 이르니 나루가 있는데 바람기가 잠잠하고 한층 저녁 풍경이 맑고 깨끗했다. 옷깃을 씻어내는 것 같다. 우천 먼 마을의 저녁 연기가 따듯하다. 강 옆은 모두 꽃꽃. 향기가 잡힐 듯하다. 족백단(簇栢湍)에 이르니 물결이 매우 사납다. 나아가기 힘들다. 옆 배가 와서 부딪는데 서로 떨어지라고 소리친다.”

自船上內觀. 不覺甚疾. 而睨而旁視. 閃閃奔軼. 若群馬西馳者. 斗尾諸山也驟過. 至保安驛前有津焉. 風氣舒散. 加以夕景澹淸. 襟抱洒如也. 牛川遠村. 烟火曖然. 近江卉草. 芳意亦堪掬. 至簇栢湍瀧甚悍. 不利進船. 有隣船來觸. 相與呼張.


삼연은 이곳 여울을 족백단(簇栢湍)이라 불렀다. 족백단도 전례(前例)가 없는 이름이니 삼연이 만들어 낸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겸재도 자신을 후원했던 삼연을 따라 삼연의 노온탄(老溫灘)을 자신은 녹운탄(綠雲灘)으로, 다시 삼연의 족백단(簇栢湍)을 자신은 독백탄(獨栢灘)으로 작명한 것은 아닐까?
 

겸재 작 ‘독백탄’. 

산에 올라가야 비로소 확인되는 족자섬

이제 겸재의 그림 독백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 속 번호 1은 족자섬이다. 두물머리와 다산의 마재마을 사이 한강에 떠 있는 무인도인데, 일반인이 갈 수 없는 잊혀진 섬이라서 지도에도 잘 그려져 있지 않다. 2 지점은 족자섬을 기준으로 볼 때 지금의 두물머리 서쪽 끝 지점쯤 될 것이다. 요즈음에는 ‘두물경’이라고 쓴 석물이 자리잡고 있다. 3 지점은 운길산과 두물머리 위치로 볼 때 운길산 전철역쯤 되는 위치다. 4의 왼쪽(서쪽)은 다산 유적지가 있는 마재마을의 동쪽 강가에 해당된다. 다산 유적지 여유당(與猶堂)에서 동쪽 강가로 가면 ‘어부의 집’이라는 음식점이 있고 그 동쪽 강가는 가파른 절벽과 바위들이 있다. 겸재의 그림과 딱 일치하지는 않지만 독백탄 속 바위들이 이곳을 그렸음을 비정할 수는 있다. 5는 능내리 한확 선생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앞 마을에는 지금은 폐역이 된 능내역이 있다.

 

두물경 표지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진 1. 예빈산에 올라야 족자섬(사진 속 2)이 섬임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런데 겸재의 독백탄이 족자섬 앞 여울을 그린 그림이라 하여도 좀처럼 족자섬은 보이지를 않는다. 수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물머리에서나 강 건너 남종면에서 아무리 눈 비비고 보아도 족자섬은 찾기가 정말 힘들다. 그 이유는 두물머리 바로 눈앞이건만 앞면만을 보아서는 그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서다. 드론을 띄우면 한눈에 알아볼 것인데 아쉽다. 그래서 필자는 족자섬(그림 속 번호 1) 바로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예빈산(禮賓山)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사진 1이다. 그 사진에 써넣은 번호는 독백탄 그림에 써넣은 번호와 같다. 어떠신지? 족자섬은 확연히 섬으로 자리 잡았다.

이 족자섬 앞뒤로 세차게 흐르던 여울을 겸재는 독백탄이라 부른 것이다. 여울 속 드러나 있는 섬 같은 돌 퇴적층들은 팔당호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고 비교적 수위가 높은 두물머리 땅만 남아있는 것이다. 북한강 물은 세차게 흘러와 족자섬 아래위로 갈라졌고 이 물이 모여 다시 남한강 물과 합쳐져 한강이 되었다.

 

두물머리 뱃사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사진 2. 오늘의 답사길 안내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물살이 세긴 셌나 보다. 그림 속 배를 댄 어부는 바위에 올라 밧줄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안 하면 배는 떠내려갔을 것이다.

이제 그림 속을 따라 걸어보려 한다. 남양주시에서 다산둘레길에 세워놓은 지도(91쪽 사진 2)를 참고해 걷는 게 좋을 듯하다. 출발은 운길산역(안내도 속 3 표시)이다. 겸재의 독백탄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고 한다. 우선 강을 건너 두물머리를 돌아보고 다시 강을 건너 남한강 자전거길 옆 산책로를 따라 다산 유적지를 둘러 보는 코스다. 여름에는 햇볕이 쬐는 길이 많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다산둘레길 2코스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양수리를 건너는 한강 다리는 4개다. 동쪽으로부터 보자면, 경의중앙선 다리는 전철이 개통하면서 새로 놓은 다리다. 전철만 다니고 사람과 차량은 건널 수 없다. 그다음 다리가 예전 중앙선 철로 다리다. 이제는 전국을 잇는 자전거 다리로 변신하였다. 이른바 남한강 자전거 길이다. 물론 걷는 이들도 쾌적하게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동차는 통행금지라서 참으로 상쾌한 다리다.

세 번째 다리가 예부터 차량과 사람이 건널 수 있게 한 양수교인데 예전과 변함없이 노선 버스도 다니고 일반 차량도 다니고 인도로는 사람도 다닌다.

네 번째 다리는 신양수대교다. 막히고 막히던 6번 경강국도를 개선해 양수리를 거치지 않고 양평에서 서울로 가는 두물머리 위로 놓은 자동차 전용 다리다. 사람은 건널 수 없다.

운길산 역을 나와 강가로 가면 바로 남한강 자전거 길 다리를 건널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양수리 환경생태공원이 새로 조성되어 있다. 전에는 다소 번잡한 양수시장을 거쳐야 했는데, 이제 이 길은 숲과 꽃이 만발한 북한강변길이다. 길의 끝은 족자섬이 마주 보이는 두물머리 끝자락 두물경이다. 여기에서 북한강 물과 남한강 물이 모여 한강(漢水, 洌水)이 된다.

어부가 물고기 잡던 곳이 이제는 새들 천국

다산은 어느 날 큰형님을 모시고 어부네 집 작은 배를 타고 충주에 갔는데 그때 전기(錢起: 唐 중기의 시인)의 강행(江行) 절구(絶句)를 본받아 귀전시초(歸田詩草)라는 시들을 지었다. (陪伯氏乘漁家小艓向忠州 效錢起江行絶句)

汕濕交流處 산수와 습수가 합쳐 흐르는 곳
村名二水頭 마을 이름이 두물머리지
當門一店叟 마을 앞 가게 주인 영감
堅坐送行舟 지긋이 앉아 가는 배 전송하네

예부터 북한강 물은 산수(汕水), 남한강물은 습수(濕水)라 했다. 이 두 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나루에는 많은 물산들이 지나갔다. 황포돛대를 세우고 멀리는 행주나루까지 왕래를 했고 남한강의 뗏목도 많이 지나다녔다. 강을 건너는 이는 남종면 귀여리를 건너 다녔다. 한양에서 강을 건너는 이들은 위쪽 사제마을 앞 용진(龍津)나루를 주로 이용하였다. 물산이 이렇게 많이 움직였기에 점방들도 장사가 잘 되었을 것이다. 전방 영감님도 전방을 잘 지켰겠지.
다산은 귀전시초에 족자섬에 대한 감회도 읊었다.

藍子洲前石 족자섬 앞의 저 돌
丁年憶打魚 약관에 고기 잡던 일 떠오르네
當時衆漁子 그때 많던 어부들은
唯有數人餘 이제 몇 사람만 남았구나.

다산의 시절에도 벌써 고기잡이 어부들이 줄었단 말인가. 우리 시대에는 족자섬 주변이 상수원보호지역이 되었으니 더이상 고기잡이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요즈음도 족자섬에 살면서 고기를 잡는 이들이 있으니 누구일까?

 

족자섬의 민물가마우지 서식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어느 날 필자는 두물머리 반대편 쪽 능내리에서 족자섬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내려앉은 것이 있었다. 바로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였다. 족자섬은 이들의 천국이 되었다. 게다가 귀한 민물가마우지도 이곳에 서식한다 한다. 사람이 안 다니는 곳이라 새들의 천국이 되었고 사람이 안 잡는 물고기는 이들이 대신 잡으니 다산 선생이 와서 보면 어떠실까? 선생은 이곳에서 답청도 하셨다 했는데(藍子洲 踏靑. 소천사시사에서).

水北雙厓對碧 강 북의 두 기슭 마주 푸른데
沙邊一島孤靑 모랫가의 섬 하나는 홀로 푸르네
芒鞋匼匝穿徑 짚신 신고 오솔길 두루 밟으니
芳草葳蕤滿汀 향그런 풀 물가에 가득하구나

족자섬은 쪽빛 섬이었을까

여기에서 족자섬, 족잣여울이라 하고 한자로 쪽 남(藍)을 쓴 것을 보면 족자섬 앞 강물은 쪽(藍)처럼 푸르던지, 아니면 이 섬에 쪽풀이 많았던지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18세기의 선비 정한종은 곡구집(谷口集)에서 이 섬을 남섬(藍島)이라고 불렀다.

 

두물머리 나루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시 두물머리로 돌아오면, 이곳은 옛부터 기름진 땅에 물고기도 풍부해서 사람 살 만한 땅이었던 것 같다. 발견된 것만 해도 두 개의 고인돌이 있다. 모양이나 규모도 반듯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윗면에는 뚜렷한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다. 모여 살던 집단이 별자리를 새겨 놓았으리라. 이런 성혈은 하늘에 기원을 전하거나 별자리의 위치를 새겨 넣어 후세에게 경험을 전달했을 수도 있는 고대 천문학의 요소다. 우리나라 많은 곳에 성혈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이 많이 보인다. 두물머리에서도 나루터 큰 느티나무 아래 고인돌과 양수리 재래시장 앞 고인돌에 뚜렷한 성혈이 남아있다. 아마 찾으면 더 많은 고대인들의 흔적이 두물머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땅이 기름져 근교 채소 농업이 상당했는데 상수원보호지역이다 보니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할 수 없어 이제는 주민들의 생업이 관광업으로 바뀐 듯하다.

 

두물머리의 느티나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곳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주위가 온통 연꽃이다. 가을 물색은 또 어떻고.

정자들도 있었다 한다. 아담한 세 간 정자 삼간정(三間亭)도 있었고 근수당(近水堂)이라는 정자의 기록도 보인다. 근수당(近水堂)이라는 정자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뒤통수를 쿵 치는 이름이다. 상촌 신흠의 아들 신익성(申翊聖)의 낙전당집(樂全堂集)에 실린 이야기다.

근수당기〔近水堂記〕

양천(陽川) 허상보(許相甫 허정석/許廷奭)가 양근군(楊根郡)의 두물머리에 터를 잡아 띠풀을 베어 집을 짓고서 회수(淮水) 노인에게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물었는데, 노인이 ‘근수(近水)’로 이름을 지었다. 상보가 말하기를,

“제 집이 비록 좁고 누추하지만 용문산(龍門山)을 등지고 두협(斗峽)을 안고 있으며 우천(牛川)과 운길산(雲吉山)이 좌우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차례로 오면 구름이 모습을 바꾸니, 가져다가 이름으로 삼아 나의 집을 호사스럽게 할 만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굳이 ‘근수’라는 이름을 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용문산과 두협이 상보의 집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십 리쯤 됩니다.”

“운길산과 우천산은 또 얼마나 되는가?”

“비슷할 겁니다.”

“강(江)은 상보의 집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가?”

“열 걸음도 안 될 정도로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취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게다가 사계절은 어쩔 수 없이 바뀌는 것이고 구름은 바람이 부는 대로 걷혔다 퍼졌다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바뀌기 때문에 천지도 그 기미를 붙잡을 수 없고, 바람이 부는 대로 걷혔다 퍼졌다 하기 때문에 천지도 그 형체를 정할 수 없다. 천지가 붙잡을 수도 정할 수도 없는 것을 상보가 어찌 가져다가 당의 이름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 물은 오대산(五臺山)과 개골산(皆骨山)에서 발원하여 천 리를 나누어 흐르다가 용문산 아래에서 옷깃처럼 합류한다. 상보의 집은 요행히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 형세는 논할 것도 없고 상보의 일상생활을 여유롭게 해주는 점이 많다. 여기에서 물을 길어 온 가족의 입을 축이고 여기에서 낚시하여 끼니를 대고 여기에서 머리감고 여기에서 빨래하고 여기에서 헤엄치고 여기에서 물을 건넌다. 그러나 이것은 외면적인 것이지 내면적인 것이 아니다.

출렁이는 봄 물결은 화기(和氣)를 기르기에 충분하고, 성대한 여름 장마는 답답함을 씻어내기에 충분하고, 가을 하늘에 뜬 달은 정신을 맑게 하기에 충분하고, 추운 겨울의 얼음은 깨끗함을 취하기에 충분하다. 절서에 따라 감응하면 사계절의 마음을 볼 수 있네. 그리고 여러 산의 구름이 두 물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거울 속의 형상이 되고 형상 속의 물색이 되니, 이와 같다면 과연 ‘근수’라는 이름이 상보의 집에 걸기에 부족하겠는가.”

상보가 이제 이 집에 살면서 몸을 다스리고 덕성을 수양하면 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절로 알게 될 것이니, 단지 ‘근수’의 뜻을 서술하여 기록한다.

近水堂記

陽川許相甫卜築於楊根郡之二水頭. 誅茅爲堂. 問名于淮叟. 叟以近水名之. 相甫曰: “廷奭之堂. 雖隘且陋. 負龍門抱斗峽. 牛川, 雲吉環擁左右. 四時成序. 雲物變態. 凡可取以爲號. 侈吾堂者. 不爲少矣. 必以近水揭之者. 何義歟?”

叟莞爾 曰: “龍門, 斗峽距相甫之堂幾許?” 曰: “十許里也.” “雲吉, 牛川. 又幾許?” 曰: “亦如之.” “江水距相甫之堂幾許?” 曰: “不十步而近.” 曰: “然則捨遠而取近. 不亦宜乎? 且也四時不得已而推移者也. 雲物乘噓氣而卷舒者也. 不得已而推移. 故天地不能挽其機; 乘噓氣而舒卷. 故天地不能定其形. 天地之所不能挽不能定者. 相甫惡得取以名其堂乎?

夫斯水也. 發源於五臺, 開骨. 千里分流. 襟合於龍門之下. 相甫之堂. 幸据其上. 無論其形勢. 其裕相甫之日用夥矣. 汲於斯以沾百口. 釣於斯以供瀡滫. 沐於斯. 濯於斯. 游於斯. 濟於斯. 然此外也. 非內也. 春波瀲灎. 足以養其和; 夏潦盛長. 足以洩其鬱; 高秋得月. 足以澄其神; 窮冬界氷. 足以取其潔. 順序感會. 四時之情可見. 而諸山雲物. 呑吐於二水之間. 爲鏡中之相. 相中之色. 若是近水之號. 果不足以揭相甫之堂也耶?” 相甫方處此堂. 澡身浴德. 自有觀水之術. 秪敍近水之義以爲記.


비록 정자는 띠풀로 지은 집이지만 멋진 정자 이름을 기대한 허상보에게 회수노인은 물옆집(近水堂)이라고 어이없는 이름을 지어준다. 참으로 시시한 이름이다. 가까이 있는 답을 버려두고 먼 곳을 헤매는 우리를 그렇게 경계한다.
 

다산 선생 동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쓴 다산 선생

이제 다산 유적지로 향한다. 양수교를 건너서 가는 길인데 강을 건너 자전거길 옆 산책길로 가든지 아니면 양수시장 앞에서 다산 유적지까지 버스로 가는 편이 있다(버스 번호 56). 다 아시는 일이지만 유적지에 도착하면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 기념관, 여유당 뒤 언덕에 자리 잡은 다산 묘역, 실학박물관을 들리실 것. 그다음으로는 강가를 산책하며 전시판을 읽고 느끼실 것. 강 건너 분원과 소내섬을 완상(玩賞)하실 것.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묘역 오르는 길 다산 선생이 스스로 지은 묘지 글(墓誌)를 일독하시면 좋다. 다산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지었는데(自撰墓誌銘) 무덤 속에 넣을 묘지명(壙中本)과 문집에 남길 묘지명(集中本)을 지으셨다.

‘두강승유도’의 관점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건필 작 두강승유도. 

이제 유적지 동쪽 끝으로 간다. 어부의 집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건필(李建弼)의 두강승유도(斗江勝遊圖) 두 점 중 한 점을 그린 곳이다. 두강승유도는 이건필을 비롯하여 가까이 지내던 소론 문인들의 시 50여 편을 묶은 두강승유첩에 철해진 그림이라 한다. 또 한 편의 그림은 두물머리 겸재의 독백탄 그림 옆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림을 그린 시점(視點, view point)을 알기 어렵다. 다산 유적지 방향에서 그린 두강승유도에는 두물머리와 건너편의 두리봉, 정암산 기슭의 모습이 지금과 비교해도 다름이 없다.

 

한확 선생 묘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산 선생의 글귀를 이용한 조형물.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다산 유적지 서쪽 강가로 간다. 다산둘레길 2 코스다. 언제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중간에는 마재성지가 있다, 이곳을 지나 큰길가로 나오면 엣 중앙선 능내역이다. 역사(驛舍)를 보존하여 추억에 젖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전이나 막걸리를 파는 공간도 있다. 길 건너로는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 선생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조안면 능내리(陵內里) 마을에 능(陵)은 없다. 민초들 눈에는 임금의 무덤이 아니더라도 아주 큰 무덤은 능으로 보였다. 아마도 한확 선생의 큰 무덤도 민초들에게는 능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능안마을(陵內里)이 되었을 것이다.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안쪽 추계예대 뒷산에는 의소세손의 묘가 있는데 그 안 마을은 능안이다. 월산대군 묘가 있는 동네는 능골, 민회빈의 묘가 있는 구름산 뒷동네도 능골이다. 오늘의 답사길은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다음 답사길은 독백탄 그림의 뒷배경이 되는 산길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환상의 종주길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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