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11.14 16:14:29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유홍준)과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성희)은 故이건희 회장 기증품 국외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로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를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ational Museum of Asian Art)에서 개최한다.
오는 11월 15일(토) 개막하는 이번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정선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국보 7건과 보물 15건 등 총 172건 297점의 문화유산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박수근, 김환기 등 한국근현대미술 24점이 출품된다.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측은 미국 연방정부의 일시 업무 중지에 따른 임시 휴관으로 전시 개막일을 한 차례 연기하였으나, 현지시각 11월 12일 연방정부 업무 재개로 특별전을 개막하게 되었다.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산하 기관으로, 사업가이자 수집가인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가 아시아 미술품을 기증해 1923년 개관한 박물관이다(구 프리어미술관, Freer Gallery).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한국미술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꼽히며, 故이건희 회장 기증품과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소장품 모두 개인의 수집, 국가 기증, 그리고 공공의 향유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번 첫 순회전이 이곳에서 열리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2021년 4월, 故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은 고인의 수집품 중 약 2만 1천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1천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누어 기증했다. 지난 4년간 두 기관은 숭고한 기증의 뜻을 기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국민 모두와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분야별 목록집 14권(총 3,000여 쪽)을 발간하고 전체 소장품 정보를 e-museum에 공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은 900여 쪽에 달하는 이건희컬렉션 소장품 도록을 발간하였다.
또한 더 많은 국민이 기증품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2021년 첫 기증품 소개 전시를 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2022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는 2022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 25만 명을 기록했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광주, 대구, 청주, 제주, 춘천의 국립박물관에서 순회 개최하며 누적 관람객 수 116만 명을 돌파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 이건희컬렉션 첫 전시 역시 코로나19 상황에서도 25만 명이 관람하였고, 이어 경남, 부산, 울산, 경기, 전남 등 10개 도시를 순회하며 누적 관람객 146만 명이 향유하였다(양 기관 합산 총 262만 명). 이러한 국민적 성원에 힘입어, 이번에는 전 세계 관람객을 대상으로 새롭게 구성된 전시가 미국과 영국의 대표 박물관까지 순회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미국과 영국의 한국실 거점 박물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한국문화 특별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미국과 영국의 주요 박물관을 대상으로 추진해 온 ‘한국실 지원 사업’의 오랜 협력이 결실을 맺은 결과다. 2021년 처음 전시 논의가 시작된 이후 2022년 시카고박물관(Art Institute of Chicago), 2023년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과 각각 한국실 지원 협약을 체결했다.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전시가 종료된 후에는 2026년 시카고박물관과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2020년 한국실 지원 협약 체결)에서 순회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 산하 박물관 간의 깊은 협력 관계는 1961년 자연사박물관의 한국실 소장품 대여로 시작되었다. 이후 1981년 자연사박물관 《한국미술 오천년전》, 1994년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18세기 한국의 미술전》, 2011년 한국실 개편, 2019년 《한국의 불상》, 2022년 《한국의 치미(鴟尾)》 전시 등으로 이어지며 꾸준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번 국외순회전이 열리는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과 시카고박물관에는 전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안전한 운영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직이 파견되어, 현지 기관과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삼국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에 걸친 한국미술의 창의성과 혁신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총 10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조선시대 책가도 병풍을 통해 한국의 수집 문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다양하게 수집된 미술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문화사 속 중요한 주제들을 짚어 나간다.
조선시대 서원과 사랑방을 채웠던 책과 그림, 가구 등 다양한 수집품에서는 절제와 겸손을 미덕으로 삼았던 유학자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대비되는 화려한 왕실 미술에서는 조선 왕실의 역사와 전통 및 불교신앙이 드러난다. 이어 불교미술에서는 삼국시대의 금동불, 고려의 화려한 사경, 힘 있는 조선의 불화 등 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청자부터 조선의 청화백자까지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수집품을 통해 한국 도자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회화 작품에서는 한국미술의 변화와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책가도 병풍을 재해석한 공간에서 한국의 수집 전통을 되새기며 전시가 마무리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국립중앙박물관 故이건희 회장 기증품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 172건 297점이다. 조선시대 서화로는 실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의 <인왕제색도>, 선비들의 사랑방과 수집 문화를 보여주는 <책가도>,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그려낸 이명기의 <조항진 초상>, 자연의 섭리를 담은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이 전시되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유명해진 <일월오악도>와 한글의 역사와 예술성 및 왕실 불교 신앙을 보여주는 <월인석보>가 주목된다. 불교미술로는 삼국시대 <금동보살삼존입상>, 금으로 쓰고 그린 고려 <대방광불화엄경 권15>, 불교 신앙과 의례를 보여주는 조선시대 <사직사자도> 및 <법고대> 등이 한국 불교문화 전반을 조망한다. 도자로는 고려 청자의 상감기법과 비색을 대표하는 <청자 상감운학문 완>과 조선시대 순백자를 대표하는 <천·지·현·황이 새겨진 백자 사발>, 그리고 기형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백자 청화 산수무늬병>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증한 이건희컬렉션 중에서도 전통을 넘어서 격동의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반영하는 근ˑ현대 대표 미술작품이 출품된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 미술사의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 우리 고유 한국화의 혁신 및 서구로부터의 들어온 회화․ 조각 장르의 재해석과 독창적 접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엄선하였으며 나아가 전통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의 경향과 여성작가 작품들을 포함하는 등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층위를 소개한다. 박수근 <농악>(1960년대), 이응노 <구성>(1964), 김환기 <산울림>(1973) 등 거장의 작업을 비롯하여 3.7m의 8폭 병풍 백남순 <낙원>(1936년), 6.4m에 달하는 7폭 연작 김병기 <산악>(1967), 이상범 <금강산 14승경첩>(1930년대), 채용신 <노부인초상>(1932), 변관식 <금강산 구룡폭>(1960년대) 등 근현대 걸작, 박래현 <작품>(1971), 박생광 <무속3>(1980), 정광호 <나뭇잎>(1997) 등 새로운 매체와 실험의 노력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 등 24점을 선보인다. 이는 20세기의 한국의 문화와 미술이 서구의 영향과 근ˑ현대사의 경험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모색하는 치열한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 7건 16점, 김홍도의 <추성부도>, <월인석보> 등 보물 15건 26점과 김환기의 <산울림>, 박생광의 <작품>과 이응노의 <군상>을 포함한 330여 점의 ‘한국의 보물’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전통미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내년 1월 22일부터 23일까지는 한국미술과 수집을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K-Pop, 영화, 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를 계기로 K-컬쳐의 원형을 찾아 한국의 전통 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을 재발견하고,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한국 문화의 힘과 혁신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국외 전시에서 처음으로 전시와 연계해 인왕제색도 부채와 조명, 고려청자와 달항아리 키링,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등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인기 문화상품 뮷즈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1일 폐막 후, 워싱턴 D.C.를 떠나 미국 중서부 지역의 중심지, 시카고로 이동하여 3월 7일부터 7월 5일까지 시카고박물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다시 열린다. 이후 전시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으로 이동해 9월 10일부터 2027년 1월 10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다음 순회지인 시카고와 런던에서는 각 지역과 개최 기관의 관람객 특성을 반영해 일부 전시품을 새롭게 구성하고 전시 연출도 다채롭게 선보일 계획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워싱턴 D.C에서 시작된 이번 전시가 시카고와 런던으로 이어지며, K-컬쳐의 원류로서 한국문화의 창의성과 예술성이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기대한다”며, “이번 전시는 문화유산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정신, 시대를 초월한 미적 가치가 세계인과 소통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의 문화와 미술이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역사적 다양성과 혼성성을 포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뜻깊은 전시”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두 국가기관이 힘을 합쳐 워싱턴 D.C.와 시카고에 이어 런던까지 한국 문화예술을 해외 곳곳으로 펼쳐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