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싯길 (10) 한탄강을 건너서] 매월 지난 함밭이에서 신라가 당군을 격파?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기자 2024.10.17 08:50:09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보개산 심원사를 떠난 매월당은 개울길을 따라 한양을 향해 발길을 남으로 돌렸다. 아미천(峨嵋川) 길이다. 아미천은 고대산 남쪽 골짜기 이름 없는 샘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보개산 석대암 지장샘에서 발원한 두 물이 합쳐 아미천을 이루어 남쪽으로 흐르는 물길이다. 굽이굽이 흐르니 구곡천(九曲川)이라고도 하고, 열두 구비를 흐른다 하여 열두 구비 개울이라고도 한다. 그 물가로는 매월당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고 지금도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잘 알려진 마을은 동막리(東幕里)인데, 아미천의 유명한 물놀이 유원지이다.

언젠가부터 이 마을에서 독을 구우니 독막(甕幕)골이 되었는데 후세에 오면서 슬그머니 동막골로 발음이 바뀌었다. 매월당이 지나던 그때도 ‘독 짓는 늙은이’가 있었을까?

독을 지으려면 우선 땔감이 풍부해야 하고, 흙이 좋아야 하고, 운반이 편리해야 하는데 독막골은 아마도 그랬던 모양이다. 산에는 나무 많고 물길 옆길은 평평해서 괜찮은 입지였던 모양이다.

아미천 물은 지금도 청정수가 흐른다. 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여기저기 풍광도 좋아 현재 유원지가 된 것 같다. 이곳 바위들은 응회암(凝灰巖)이라 해서 화산재가 응결된 바위라 한다. 한탄강, 임진강 지역들은 오래전 평강 지역의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지형이라 하며, 이곳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룡 하면 떠오르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되었다고 쓰어 있으니 아무튼 호랑이 담배 먹던 때보다 오래된 이야기 같다. 매월당은 1459년 가을날 쓸쓸히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개울물은 지금보다 더 맑았겠지.

 

연천 시내 한가운데를 지나는 차탄천의 주상절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아미천은 드디어 차탄천(車灘川)을 만나 그 일부가 된다. 차탄천은 연천 시내 한가운데를 지나는 하천이다. 주상절리가 빼어나다. 차탄천 합류점에서 잠시 북으로 발길을 돌리면 연천 시가지에 이른다. 매월당 시절에는 연천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다. 여기까지 온 매월당이 관아를 지나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쉽게도 남은 기록은 없다. 1910년대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관아는 없어지고 향교는 구차하게 명맥을 잇다가 지금은 군자산 동쪽 기슭에 연천의 옛일을 증언하는 랜드마크로 남았다.

이제 매월당은 남으로 길을 잡아 한탄강(漢灘江)에 닿는다. 지금은 3번 국도가 지나는 한탄대교를 건널 수 있고, 얼마 전까지는 한탄대교 옆 경원선 철교가 있었으니 그 길로 한탄강을 건너면 되었지만 매월당 시대에야 어림없는 소리였다. 강을 건너려면 오직 나루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달리 무엇이 있었겠는가?

 

연천 부근 옛 지도의 물길들. 매월당은 2번 물길을 따라갔다.

매월당의 귀경길을 이해하기 위해 연천 옛 지도를 보자. 옛 지도에 연천 주변 수계(水界)를 물색으로 ①, ②, ③, ④, ⑤로 표시해 보았다.

①은 마아천(麻阿川, 摩阿川)이다. 큰 내라는 뜻인데, 한탄강 본류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②는 매월당이 걸어 내려온 아미천이다. ③은 차탄천인데 은대리성 아래에서 한탄강에 합류한다, ④는 임진강이다. 임진강은 북쪽 땅 삭령에서 흘러 내려와 한탄강을 품고 큰 임진강이 되어 서해로 향한다. ⑤는 신천(莘川)인데 지금의 동두천, 조선 시대에는 양주를 북으로 흘러 한탄강으로 들어간다.
 

한탄강 주변에 함밭이와 대전교 등 대탄나루 관련 지명들이 남아 있다.

큰 여울 → 대탄 → 한탄으로 변화

여기에서 마아천(한탄강)을 건너는 나루가 대탄나루(大灘津)였다.

증보문헌비고 양주 목에는 대탄나루(대탄진: 大灘津)를 설명하기를 ‘대탄강(大灘江: 漢灘江)에 있으며 연천(漣川)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큰 여울’, 즉 ‘한 여울’의 의미를 살려 한자로 쓰면 ‘大灘(대탄)’이었고 소리를 살려 쓴 것이 ‘漢灘(한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탄나루라는 말의 의미는 일반명사로 큰 여울 나루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다. 서울의 남산(南山)이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목멱산을 가리키는 고유 지명이듯이 대탄(大灘)도 고유한 지명이었다. 어디였을까? 옛 지도에 씌여 있듯이(남색 번호 ①) 전곡읍에서 한탄강 방향으로 내려와 신천(莘川: 번호 ⑤)이 합수하는 지점 상류 쪽에 대탄나루가 있었다. 지금의 3번 국도와 옛 경원선 철교가 건너는 다리로부터 1km쯤 상류이며 새로 뚫린 전철 철교의 바로 위 상류인 신천 위쪽 지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대탄을 일반명사로 알고 ‘큰 여울’로 번역한 사례들이 종종 보이니 안타깝다.

 

함밭이 쪽에서 바라본 대탄나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대탄나루에 가 보았다.

한탄강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흐른다. 우리나라 강 중 한탄강, 임진강만큼 아름다운 강이 또 있을까? 섬진강은 봄에 아름답다. 그런데 한탄강, 임진강은 사시(四時) 아름답다. 가을에는 그 물빛, 산빛을 눈에 넣고 마음에 넣고 돌아올 만하다.

이곳에 오니 생각나는 일들이 있다. 선친(先親)은 여름이면 경원선 전곡으로 친구분들과 천렵(川獵)을 다녀오시곤 했다. 바로 이곳 한탄강에서였다. 어린 나는 언젠가 아버지 따라 한 번 천렵 가 봐야지 했는데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그리움이 된다.

또 이곳에 오니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그때 지리 선생님이 뜻과 지형을 살려 설명해 주셨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외운 단어가 있다. 감입곡류(嵌入曲流).

임진강이나 한탄강, 또는 영월이나 정선에 가면 강물이 푹 꺼진 골짜기 사이로 구불구불 흐른다. 강 옆은 주상절리이거나 그럴듯한 절벽이다. 嵌(감: 골짜기)으로 들어와 구불구불 흐르는 하천, 그 말이 어찌 저리 어려웠을까?

잠시 딴 이야기를 하면 조선 시대에 이런 하천 옆 동네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넓은 평야가 있으면 무엇하랴? 저 아래 흐르는 江물이 아무리 풍부한들 그림의 떡이었다. 지금의 오대쌀의 고장 철원평야는 참 농사짓기 힘든 땅이었을 것이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찌질한 日 학자

또 지금의 3번 국도가 지나는 한탄대교 주변은 한탄강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맑은 물가에 차박(車泊)이 가능하고 산책하기도 좋은 곳이다. 1970년대에 이 지역에서 근무하던 미 공군(美 空軍) 중 그렉 보웬(Greg Bowen)이라는 병사가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이 강가에 와서 물놀이를 즐겼는데 하루는 그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돌멩이가 보였다. 학교에서 역사 공부할 때 보았던 것 같은 모양의 돌멩이였다. 혹시나 해서 학창시절 교수님에게 궁금증을 물었다.

 

구석기 시대 손도끼가 발견된 한탄강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렇게 해서 알려진 것이 전곡리 구석기 유적(全谷里 舊石期 遺跡)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 고고학계에선 유럽과 아프리카에만 이런 구석기 문화가 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70만 년 전 아슐리안 주먹도끼(Acheulean hand axes)를 비롯하여 구석기 유물이 그 후 무더기로 나왔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전국에 구석기 유적지가 속속 드러나게 되었으니 한탄강은 우리 시대에 다시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석기 문화를 보면서 배가 많이 아픈 이가 있었다. 일본의 후지무라 신이찌(藤村新一). 그는 가짜 유물을 만들어 미리 묻어 두고 가서 발굴하여 일본의 구석기 연대를 우리와 같은 70만 년 전으로 끌어올린 대단한 고고학자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미리 묻는 장면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에구~ 뭔 일이래….

이제 매월당은 연천을 떠나 양주 땅으로 들어간다.

대탄나루를 건너며
나루 어구 물결 맑고 얕아서
물가에 다가가면 고기도 셀 수 있네
강산에 이제 비 개이자
바람도 달도 늦가을 여유로움
갈대 언덕 고깃배는 평온하고
산성 고목은 성글구나
이제 갈 곳은 어디메일까
산뽕나무 그윽한 옛 마을이지

渡大灘
渡口波淸淺. 臨流可數魚. 江山初霽後. 風月九秋餘. 葦岸漁舟穩. 山城古木疏. 前程何處是. 桑柘暗村墟.

이렇게 양주 땅으로 들어선 매월당을 맞은 것은 넓고 넓은 큰 밭이었다.

대전(大田)을 지나며
일모(日暮: 해질녘)에 인적은 드물고 산비둘기 배고프다 구구구~
길 가다가 가을 생각 깊고도 깊구나
어찌 한 번 소요산 정상에 올라
흔쾌히 거닐면서 세상 정염(世上 情念) 씻지 않을소냐

大田途中
日暮人稀飢鶻鳴. 途中秋思正崢嶸. 何當一上逍遙頂. 快得逍遙不世情.

대전(大田)은 어디였을까? 그냥 큰 밭이었을까? 대전이라는 지명이었을까? 놀랍게도 대전(大田)은 현재 존재하는 지명이다. 바로 대탄나루를 건넌 남쪽 땅은 현행 지도나 내비게이션으로 함밭이(한 밭이: 大田)로 기록되어 있고, 행정동명으로 청산면 대전리로 현존하는 곳이다. 560여 년 전 매월당 시대가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니…. 대탄나루 건너 함밭이(大田)에는 아직도 넓은 밭에 채소가 자라고 있다.

그 시절 매월당도 채소 자라는 함밭이를 지나 산뽕나무 그윽한 대전리에서 하룻밤 유(留)하지 않았을까. 비 그친 가을날 가을 생각도 깊어지고 산비둘기도 구구구 우는데.

그런데 매월당이 놓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있었다. 그는 ‘산성 고목은 성글구나(山城古木疏)’라고 대전리 앞산에 산성(山城)이 있음을 간파했으니 보통 눈썰미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산성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역사학이 달리 없었으니까.

대전리 초입 한탄강가에는 성재산(城齋山, 138m)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그 정상 부위에 근년에 대전리 산성이라 부르는 고성(古城)이 있다. 산은 낮아도 강 쪽으로 면한 지형은 가팔라서 좀처럼 적이 침입할 수 없는 천혜의 해자(垓字)를 이루고 있다. 그 정상에 빙 둘러 막은 퇴뫼식 산성을 쌓았다.
 

대전리 산성의 흔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신라의 독립 터전 된 매초성

신라와 당(唐) 군이 연합하고 여기에 당군이 동원한 거란, 말갈 병까지 협공하여 660년에 백제가 멸망,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상당 지역을 확보하여 한반도에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런데 당(唐)의 야망은 달랐다. 신라에 계림도독부, 백제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唐)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죽기로 싸워 신라가 얻은 땅이 거꾸로 당(唐)의 식민지가 된 기막힌 상황이 닥친 것이다. 국력으로 보아 당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이 미국이나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 같은 것 아니었을까? 여러 해 당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과 전면전에 돌입했다. 675년 9월 매초성(買肖城: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李謹行)의 20만 주력군을 격파했고, 676년 기벌포(伎伐浦: 장항)에서 설인귀 군을 격파하니 당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로써 소국 신라는 대국 당을 무찌르고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독립의 터전을 다진 매초성은 어디였을가? 학자들은 이곳 대전리 산성이거나 양주 대모산성 중 한 곳임이 분명하다 한다. 옛 고구려 말로 매(買)나 미는 물을 뜻한다. 미나리. 미더덕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매초성(買肖城)? 내륙 대모산성보다 한탄강가 대전리 성이 가깝지 않을까?(필자의 생각)

필자는 가을 한탄강을 마음에 넣고, 매월당은 소요산에 오를 생각을 하며 함밭이를 지난 가을날. 해는 임진강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