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19일 워싱턴DC 외신센터에서 열린 ‘아태 지역 언론 간담회’에서 “내년 1월 20일 2기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전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미간 고위급 대면 회담을 하겠다”고 밝힌 것을, 국내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의 계엄 사태 탓에 윤석열 정권의 외교 관계자들에 대해 “상종못할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던 미국 국무부의 입장이 달라진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보도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동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는 안 간다”는 미국 고위 관료들의 태도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 가서 고위직 만나면 오해 받잖아"
대표적인 게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의 지난 10일 방일이었다. 원래 오스틴은 한국에도 올 예정이었으나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엔 안 간다”고 발표했고, 대신 방일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이시바 총리는 “일주일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고,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변화하는 안보 환경이 불러오는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통한 억지력과 대처 능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라는 공동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 호주 등 역내 파트너와의 다자간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계엄 사태 탓에 한반도 문제가 한국을 제치고 일본에서 미-일 사이의 대화로 논의되는 모양새다.
오스틴 국방장관의 방일에 하루 앞서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도 9일 북핵 및 인도·태평양 협력 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 회의 등을 위해 방일했으나 한국으로는 오지 않았다. 북핵 논의가 핵심 의제인 3국 회의가 도쿄에서만 열리고 한국에선 조구래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이 방일해 참석했다.
미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계엄 후폭풍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위급 인사들이 방한해 한국 정부의 장관 등을 만날 경우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정쟁에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연합뉴스가 20일 보도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상이나 고위 관계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면 오해 받기 딱 좋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윤 정권이 한미일 동맹에 앞서 나갔기 때문에 윤 정권에 극히 우호적이었던 바이든 정부 사람들도 이런데, 딱 한달 뒤면 취임할 트럼프 2기 정부에서는 달라질까?
이시바 일본 총리는 트럼프의 취임식 직전에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와 만날 예정이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보도했고 트럼프도 공개 석상에서 이를 확인했다.
트럼프는 지난 16일 자신을 찾아온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 여사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이시바 일본 총리에게 보낼 책 선물까지 전달했다. 사진집으로 알려진 이 책에 트럼프는 자신의 사인과 함께 ‘PEACE’(평화)라고 썼다.
트럼프가 이시바에게 준 책에 쓴 '평화'의 의미는?
트럼프가 ‘평화’ 메시지를 전한 의도에 대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전시키겠다는 의지 △이를 통해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고 한다 등의 해석이 이미 나왔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미-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는 나라들이라는 점에서(미국은 한국전쟁 당시의 참전을 통해, 그리고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했던 식민모국으로서) ‘한반도에서의 미-일 주도의 평화’, 즉 북한과의 종전선언과 북미수교로 이어지는 행보를 암시했다고 한국인 입장에서 해석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북핵이든, 한반도 평화든 국제적 논의는 한국 중심으로, 즉 최대 이해당사자 중심으로 이뤄져야 정상이다. 한반도 문제 논의가 한국을 패싱하고 미-일-북한 사이에서만 이뤄진다면, 이는 마치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당사자들을 패싱하고 한-일 정부 사이에서만 ‘돌이킬 수 없는 협약’으로 해결되는 듯한 사태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구한말 사정을 아는 데 필독 도서 중 하나로 ‘은자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이 있다. W. E. 그리피스가 쓴 이 책은 흔히 제목 덕분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아름답게 그렸을 것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구한말 조선 양반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인 ‘53장. 을사조약’ 편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극을 향해 달린다. 오죽하면 번역자 신복룡은 “이 제53장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냉정함과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본장(本章)은 왜곡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주의 문구를 번역자 주로 달아놓았을 정도다. 한국인 독자의 혈압을 올리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그 몇몇을 보면,
*1866년 이래의 조선의 역사는 그들의 지배 계급이 치명적으로 취약함을 노정했다. 특권 양반들은 국가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근면한 대신에 서울을 음모의 온상으로 만들었으며 조선을 극동의 폭풍 지대로 만들었다. (626쪽)
*조선의 양반들 (중략) 음모자들의 얄팍한 술수는 한 민족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치른 후 일본은, 왕실과 정부조차도 구별되어 있지 않은 이웃 조선을 옛날처럼 음모의 온상으로 만들어 둔다는 것은 자기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위해 했고, 미국이 쿠바를 위해 했고, 프랑스가 안남(베트남)을 위해 한 일을, 일본은 조선을 위해 했다. (627쪽)
*여인들, 내시, 엽관운동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조선 왕실) 규방의 신비스러운 금역(禁域)과 정부를 구별할 수 없다면 아시아와 세계를 위해 과연 어떠한 평화 정책이 있는가? 조선에서 일어나는 온갖 복잡한 문제들이 또한 일본을 괴롭히고 있는 반면 일본 정부는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오랜 숙의를 거친 후에,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서울에는 통감을 두고 대도시와 개항장에는 하급 관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내정에 관한 문제만은 조선 정부에 맡기는 것이 지금의 미궁과 같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 천황은 ‘참을성 있고, 능력 있고, 엄정한’ 이토 히로부미 공작을 서울에 파견했다. (631쪽)
'특권 양반들이 망친 조선'은 2024년부터 리바이벌?
물론, 그리피스가 당시 동아시아 진출을 열렬히 모색하던 신흥 강대국 미국의 입장에서 조선 사태를 바라봤기에 분명한 한계와 왜곡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런 문장들을 읽어야겠지만, 1866년 이래 조선의 특권 양반들, 그리고 조선 궁궐의 여인들, 내시, 엽관운동자들이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읽으면서, 2022년 이후의 한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계엄이 이어지고 있는 현 사태’가 하루라도 빨리 해소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한국의 ‘특권 양반들’은 자신들의 얄팍한 술수가 한민족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진지를 사수하면서 농성전을 펼칠 자세를 단단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