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 ‘희원·옛돌정원’에 이우환 신작 상설 전시

‘실렌티움(묵시암)’ 공간 개관…홍라희 명예관장 “뜻 깊은 기회”

김금영 기자 2025.10.27 09:37:47

이우환 작가. 사진=이재안, 이미지 제공=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이 28일부터 이우환의 신작 공간 ‘실렌티움(묵시암)’을 전통정원 ‘희원’ 내에 개관해 상설 전시한다고 27일 밝혔다. 아울러 그간 관람객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미술관 호수 주변의 ‘옛돌정원’에서 이우환의 조각 설치 작품 3점을 새롭게 선보인다.

이우환 작가는 1960년대 말 ‘모노하’의 이론적 형성에 깊이 관여하며 일본 동시대 미술의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로 알려졌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 화단과의 교류를 이어가며 1970년대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전개되는 과정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세계는 유럽 미술계에서 서구 중심의 인식 틀을 넘어선 사유와 조형적 탐구로 주목받아왔다.

삼성문화재단은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오랜 기간 수집, 소장해 왔으나, 2003년 호암갤러리/로댕갤러리 회고전 이후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본격적으로 조망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가 직접 제안한 것으로,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작가의 예술 세계를 서울 수도권에서 상시 만날 수 있게 됐다.

희원 내에 선보이는 신작 ‘실렌티움(묵시암)’은 라틴어로 ‘침묵(Silentium)’을, 한국어 명칭인 ‘묵시암(默視庵)’은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용한 눈길로 만나는 공간’이라는 콘셉트 아래 실내 작품 3점과 야외 설치 1점이 하나로 어우러진 프로젝트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침묵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관계와 만남, 울림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공간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작가는 “내 작품은 봄과 동시에 울림이 있는, 보자마자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나 에너지가 중요하다”며, “관람객이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렌티움에서 색채는 작가의 예술세계에서 자연의 현상과 변화를 반영하는 핵심 요소다. 작가는 주로 단색 계열의 작업을 해왔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작품 속의 ‘점’과 ‘원’에서 보여지는 색채는 가장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보여준다.

이우환 작가. 사진=이재안, 이미지 제공=삼성문화재단

실렌티움의 입구엔 무거운 돌과 두꺼운 철판으로 이뤄진 설치 작업 1점이 침묵과 사색의 공간으로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실내로 들어서면 신작 3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입구 왼쪽 방의 ‘플로어 페인팅(Floor Painting)’은 ‘점’이 극한의 우주, 무한까지 확장돼 이루는 ‘원’의 형태와 색채 변화로 생명을 표현하여,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중간 방 ‘월 페인팅(Wall Painting)’의 점은 이우환 예술 세계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이다. 극도로 절제된 붓놀림을 따라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며, 미세한 색채의 변화 속에서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만나 더 큰 조화를 이룬다. 오른쪽 가장 안쪽에 자리한 ‘쉐도우 페인팅(Shadow Painting)’은 돌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작가가 그린 그림자를 함께 보여준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상상력이 중첩되는 지점을 드러내며, 현실과 환영, 욕망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희원 건너편의 호암미술관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지 산책로인 ‘옛돌정원’에서는 철과 돌이라는 문명과 자연이 만나 이뤄진 대형 신작 3점을 감상할 수 있다.

입구에 설치된 ‘관계항-만남(Relatum-The Encounter)’은 지름 5미터의 스테인리스 스틸 링 구조가 먼저 공개되며, 향후 링 양쪽을 마주 보는 두 개의 돌이 더해져 작품이 완성될 예정이다. 관람객은 주변의 자연, 돌, 링을 통과하는 바람들이 만나고 부딪히며 만드는 울림을 통해 더 큰 공간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호숫가에는 직선으로 뻗은 20미터의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 판과 돌로 이뤄진 ‘관계항-하늘길(Relatum-The Sky Road)’이 자리한다. 관람객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작품 표면에 비친 하늘과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치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위쪽 산책로에는 곡선형 스테인레스 스틸과 두 개의 자연석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관계항-튕김(Relatum-Bursting)’이 설치됐다. 작가가 1970년대에 흔들리는 얇은 철판으로 형태를 구상했던 것을 이번에 두꺼운 재료로 구현한 작품이다. 흔들리지 않아도 흔들림이 느껴지는 긴장 관계 속에서 한 부분이 튕겨져 나간 듯한 형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고 설명한다. 그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비우고, 버리고, 깎아내는 과정이며, 표현을 가능한 한 축소하고 절제하며 압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그린 것만이 그림이라는 발상에서 벗어나,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이 서로 관계해 무한의 세계를 열기를 소망한다.

이우환 작가의 예술 세계를 오랫동안 깊이 이해하고 지원해 온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은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그간 상설로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 실렌티움과 야외 조각을 직접 제안해줘,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며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공간은 이달 28일부터 1주일간 리움 멤버십 프리뷰를 거쳐 다음달 4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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