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NM이 연초 문화계를 평정하고 있다. 토니 어워즈 10관왕을 비롯해 각종 글로벌 어워즈를 석권한 뮤지컬 ‘물랑루즈!’를 비롯해 2014년 국내 초연 이후 매 시즌 호평 받아온 ‘킹키부츠’ 등 다양한 라인업으로 공연 팬들을 만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팀 버튼 감독 각각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틀쥬스’는 CJ ENM의 콘텐츠 확보력, 공연 제작력을 보여주며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도쿄 초연 시작부터 국내 무대까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올해 공연계 주목작이다. 2022년 도쿄 초연을 시작으로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나고야 등 일본 주요 도시를 돌았고, 이후 2023년과 지난해 앙코르 투어와 더불어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은 높은 관심 속 공연 기간이 5주 연장되며 3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만났다. 지난해 유일한 투어 공연이 진행됐던 중국 상하이 공연 역시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국내 공연 또한 1차 티켓이 오픈과 동시에 3만여 석이 매진되며 관심을 입증했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CJ ENM의 콘텐츠 확보력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CJ ENM이 2022년 인수한 미국 기반 글로벌 스튜디오 피프스시즌은 2023년 토호로부터 2억 25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로써 토호는 CJ ENM에 이어 피프스시즌의 2대 주주로 올라섰다.
1932년 도쿄에서 설립된 토호는 영화를 비롯해 애니메이션, 연극, TV 콘텐츠의 개발과 제작, 배급을 선도하는 일본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다. 토호는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 일본 영화 거장과 협업하며 성장했고, ‘고질라’, ‘라돈’, ‘모스라’, ‘킹 기도라’ 등 일본 괴수영화의 계보를 이어온 메가 IP(지식재산권)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CJ ENM은 토호와 함께 “동서양 문화권을 포괄하는 글로벌 드림팀 스튜디오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행보다. 토호는 지브리 스튜디오, 신카이 마코토 등 일본 크리에이터의 배급 파트너도 전담해 왔고, 이에 따라 이번 국내 공연에서 토호가 제작, CJ ENM이 주최를 맡았다.
윤상현 CJ ENM 대표이사는 공연 도록의 인사글을 통해 “전 세계를 흥미롭게 만드는 IP의 생명력과 영향력은 장르와 국경을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힘이 있다”며 “글로벌 IP 파워하우스를 지향하는 CJ ENM은 지난해 엔터사업 30주년을 맞이해 ‘언톨드 오리지널스(Untold Originals)’ IP를 끊임없이 발견하고자 하며 토호, 스튜디오 지브리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함께 양 국가가 보유한 IP의 글로벌 확산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언톨드 오리지널스는 양사가 원천 IP를 발굴하고 출판, 영상 제작 생태계를 구성하는 프로젝트다.
윤 대표는 이어 “이번 내한 공연은 단순 해외 공연을 넘어, 한일 양국의 문화와 예술이 교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의미를 짚었다. 마츠오카 히로야스 토호 대표이사 사장 또한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최고의 파트너인 CJ ENM과 함께하는 든든한 협업으로 선보이는 무대를 한국 관객이 기대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원작 스토리 라인 매력 극대화하는 아날로그 연출
공연은 우연히 금지된 ‘신들의 세계’로 들어간 ‘치히로’에게 펼쳐지는 미션과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다. ‘센’이란 이름을 부여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릴 뻔한 치히로는 조력자 ‘하쿠’를 만나 온천에서 일하며 점차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찾게 된다. 원작은 2001년 개봉과 동시에 흥행에 성공했고,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원작에 애정을 가진 팬들이 무대화에서 우려하는 건 원작의 감성을 해치거나, 지나친 재해석으로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이 심하게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이 두 가지 우려를 모두 불식한다.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 모두 일본 원작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간다. 관련해 공동 번안을 맡은 이마이 마오코는 공연 개막에 앞서 열린 간담회에서 “일본 원작이기에 일본에서, 일본인이 만들어 일본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주안점을 밝히기도 했다.
이 스토리 라인은 연출과 만나 무대만의 매력을 발휘한다.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공연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아날로그 감성을 고수한다. 그런데 이 방식이 고루하지 않고, 오히려 원작의 아련한 감성을 보다 세세하게 살리는 효과를 낸다.
예컨대 온천을 운영하는 마녀 ‘유바바’가 거대한 새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장면에서 영상을 쓸 법도 한데, 거대 인형(퍼펫)을 사용했다. 퍼펫은 공연 전반에 걸쳐서 무수하게 등장한다. 또 다른 주요 캐릭터인 ‘가오나시’를 비롯해 온천을 찾는 수많은 ‘신’들, 온천 직원인 ‘개구리’, 치히로의 또 다른 조력자 ‘가마 할아범’ 등 50체가 넘는 퍼펫을 공연에 활용했다.
그리고 이 퍼펫을 배우들, 이른바 퍼펫티어들이 직접 움직이고 연기한다. 가마 할아범은 거미처럼 팔을 6개 지닌 캐릭터인데, 등장할 때 퍼펫티어들이 가마 할아범 뒤쪽에 선 채로 각각의 팔을 들고 움직인다. 가오나시는 극 중 다른 캐릭터들을 잡아먹으면서 거대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1명부터 최대 12명의 배우들이 퍼펫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새로 변한 유바바가 하늘을 날아갈 때 이를 잡고 움직이는 것도 퍼펫티어들이다. 용으로 변한 하쿠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은 원작의 하이라이트로, 이것이 무대에서 과연 어떻게 연출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이 또한 4m가 넘는 대형 퍼펫을 활용해 역동성을 살렸다. 해당 퍼펫은 등과 척추를 따라 4000가닥의 털을 직접 심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퍼펫은 단순 도구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손길을 통해 살아 숨 쉬는데, 하나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장치는 무대를 온천부터 기차, 유바바의 언니 ‘제니바’의 집 등 여러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는 일본 전통 가면극을 기반으로 한 회전 장치다. 관련해 존 케어드 연출은 “정교한 장치와 많은 퍼펫을 사용해 관객의 상상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게 하기 위해 신경 썼다”며 “영화 속 마법 같은 순간들을 무대에서 현실감 있게 만나볼 수 있다. 퍼펫과 배우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해 무대 위 상황을 실제라고 믿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왜 자신감을 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스토리라인과 연출은 음악과 만나 완성된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원작을 상징하는 요소에서 결코 빠질 수 없다. 그의 선율은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장면의 리듬과 감정을 이끄는 서사적 장치와도 같다. 공연에서 또한 11인조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가 배우의 움직임과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무대를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특히 마지막 커튼콜 때 모습을 드러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습은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낸다.
AI(인공지능)를 활용한 영상과 이미지 등 첨단기술이 일상화되며 이에 익숙해져 있던 나날들 속 맞닥뜨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아날로그 감성은 그렇기에 오히려 더 돋보인다.
CJ ENM과 피프스시즌은 앞으로도 토호의 콘텐츠를 글로벌향으로 기획·개발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외 또 어떤 콘텐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공연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3월 22일까지 열린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