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 정태희 경매사의 작가 탐색] 고 정상화가 남긴 ‘시간의 층위’

격자 구조의 향연

정태희 서울옥션 경매사 겸 경매기획운영팀장 기자 2026.02.02 14:57:50

정태희 서울옥션 경매사 겸 경매기획운영팀장

한국 미술사를 글로벌 미술시장 맥락에서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 ‘단색화’다. 그러나 이 범주에 속한 작가들에게 스스로를 단색화가로 인식하는지 묻는다면,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이를 부정한다. 서양화의 담론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국내에 유입되고, 한국전쟁이라는 집단적 경험이 추상미술로 확장돼온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단색화는 한국 미술을 세계에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 개념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단색화라는 이름이 귀결시키는 ‘한 가지 색, 혹은 유사한 톤의 화면’ 이면에는, 작가마다 상이한 방법론과 축적된 시간이 존재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색면 추상이지만, 그 내부에는 반복과 노동, 그리고 시간의 켜가 복합적으로 중첩돼 있다.

지난 1월 28일, 향년 93세로 별세한 정상화(1932~2026)는 이러한 단색화의 이면을 가장 집요하게 밀어붙인 작가였다. 그의 화면은 단색으로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 단순함은 결과가 아니라, 치열한 삶 속에서 축적된 ‘과정’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추상 1세대의 거목으로 불렸던 그의 부재는, 단색화의 대가라는 명명 그 이상을 다시 짚게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가 평생 포착해온 ‘그리드(Grid)’라는 격자 형식의 시작과 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작업의 출발점

정상화는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은 그는, 초기에는 구상 회화를 기반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국내에 유입된 표현주의적 추상과 앵포르멜 경향을 적극적으로 실험하며, 재현보다는 재료와 마티에르, 즉 표면의 물성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초반 그는 한국현대작가초대전, 악뛰엘 그룹전 등 전위적 전시에 참여하며 당시 한국 미술계의 실험적 흐름 한가운데에 섰다. 이어 파리비엔날레(1965), 상파울루비엔날레(1967)에 한국 대표 작가로 출품하며 국제 미술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서구 미술의 형식을 답습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했다. 1969년 일본 고베로 건너간 이후, 정상화는 단색조 추상과 격자 구조에 본격적으로 몰두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들어내고 메우기’로 불리는 독자적인 작업 방법론이 구체화됐다.

고 정상화 화백. 사진=갤러리현대

‘구조’로 읽히는 회화

 

정상화를 이해하는 핵심은 화면 자체보다 제작 과정에 있다. 그는 캔버스를 단순한 바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고령토를 바른 표면을 말리고, 접고, 의도적으로 갈라지게 한 뒤, 그 틈을 다시 물감으로 메우거나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 수행적 방식에서 격자는 그려진 도형이 아니라, 물리적 행위의 결과로 생성된다. 겉보기에는 일정한 규칙을 가진 듯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어느 한 칸도 동일하지 않다. 깊이와 질감, 밀도는 미세하게 어긋나 있으며, 그 차이들이 모여 화면 전체의 리듬을 만든다. 멀리서 보면 정적이지만, 다가갈수록 표면에 축적된 시간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정상화의 작업은 색을 칠하는 행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 고령토를 접착제와 혼합해 바르는 단계부터 화면의 물성을 구축한다. 고령토층이 마르며 생긴 균열은 이후 격자 구조의 토대가 된다. 캔버스를 접었다 펼치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기준선이 만들어지고, 작가는 격자 단위로 고령토를 하나씩 들어낸 뒤 그 자리를 다시 물감으로 메운다.

이러한 ‘들어내기와 메우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차례 반복되며 화면의 밀도와 균형이 조율된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화면은 단색에 가깝지만, 표면에는 시간과 노동의 축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정상화는 조수를 두지 않고 이 모든 과정을 홀로 감당했다. 작품 한 점에 수개월이 소요되는 이 반복의 시간은 흔히 고행에 비유되지만, 이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핵심 조건이다.

고 정상화 화백. 사진=갤러리현대

경계를 넘나든 격자의 여정

정상화의 예술 세계는 해외 체류기와 함께 공고해졌다. 일본 고베에서 격자 구조가 형성됐고, 파리 체류기를 거치며 그 구조는 더욱 치밀해졌다. 이로 인해 그는 국내 단색화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거리감은 유행과 담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밀어붙일 수 있는 환경이 됐다.

그의 화업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초기 국내 활동기, 일본 체류기, 프랑스 체류기, 그리고 귀국 이후의 시기다. 각 시기는 단절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적 탐구가 다른 밀도로 전개된 과정이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은 ‘단색화 작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작가의 예술세계 전체를 조명한 계기였다. 회화뿐 아니라 데콜라주, 프로타주,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그가 평면이라는 구조를 얼마나 집요하게 연구해왔는지를 보여줬다.

 

미술시장에서의 존재감

정상화는 미술시장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단색화 열풍이 한창이던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750만 홍콩달러(약 11억 4200만 원)에 낙찰되며 이른바 ‘10억 클럽’에 진입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상화의 경쟁력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평생 일군 작업 철학과 작가만의 회화적 방법론에서 나온다. 전 생애에 걸쳐 일정하게 유지된 작법세계와 제작방식의 특수성은 컬럭터에게 소유하고 싶은 작품으로 강한 신뢰를 줬다. 따라서 그의 격자 구조는 단순한 패턴 양식을 넘어 ‘과업을 보여주는 신뢰의 구조’가 됐다. 컬렉터가 그의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흰색 화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견뎌낸 ‘시간의 축적과 노력의 집념’을 사는 것이다.

정상화, ‘무제 05-3-25’, 캔버스에 아크릴릭, 258.8×193.8cm, 2005. 사진=서울옥션

단색화를 넘어, 무제 속의 영원함

처음 정상화의 작품을 마주하면 그 개념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자칫 멀리서 보면 구체적 표현이 없는 밋밋한 그림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그 표면을 바라보면, ‘없음(無)’이 오히려 관객에게 깊은 집중을 요구하는 요소로 바뀐다. 정상화가 남긴 격자는 칸칸이 나뉜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질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노동과 기다림의 기록이다. 그의 회화는 색을 덜어낸 자리에 더 많은 시간성을 채워 넣는, 구조의 미학이다.

2026년 새해, 작가는 이별을 고했다. 이제 그가 남긴 격자 구조의 화면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의 평면 회화는 무한한 반복성을 바탕으로 작가의 숨결과 노고가 담긴 작은 네모꼴의 구조이지만, 그 수많은 형태들이 캔버스 위에 모여 정상화의 무한한 화면을 완성했다. 비록 작가는 떠났지만, 그가 묵묵히 쌓아 올린 격자의 층위는 앞으로도 우리에게 예술의 본질적인 무게를 전해줄 것이다. 단색화라는 사조로 귀결되기보다, 평생을 걸어온 그의 구조적 회화의 양태를 모두가 되새겨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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