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한민국 ‘미래먹거리’ 갉아먹는 산업기술 유출

기술 유출 범죄 피해 규모 25조 원대… 외국과 비교해 낮은 형량에 ‘솜방망이 처벌’ 지적

한원석 기자 2024.04.18 18:14:18

삼성전자 중국 시안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에서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A씨(65)는 지난 2015년 7월 싱가포르에 반도체 제조업체 B사를 설립했다. 국내 반도체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로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던 A씨는 2018년 8월 대만의 한 전자업체로부터 8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받고 중국에 월 10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는 20나노미터급 D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어 2020년에는 중국 청두시로부터 4600억 원의 대규모 투자도 유치했다.

이러한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A씨는 삼성전자 등의 반도체 핵심인력 200여 명을 B사로 영입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ing Data)와 공정 배치도, 공장 설계도면 등을 부정 취득·사용한 혐의를 받는다. BED는 반도체 제조가 이뤄지는 공간에 불순물이 존재하지 않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고, 공정배치도는 반도체 생산을 위한 핵심 8대 공정의 배치, 면적 등 정보가 기재된 도면이다. 이들 기술은 30나노 이하급 D램 및 낸드플래시를 제조하는 반도체 공정 기술로,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

A씨는 중국 시안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과 불과 1.5㎞ 떨어진 곳에 삼성전자 복사판인 또 다른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삼성디스플레이 및 삼성엔지니어링 영업비밀도 부정 취득해 사용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핵심 먹거리인 반도체를 중심으로 산업기술 유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유출로 인한 피해액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하지만 실제 유출건수에 비해 적발 건수도 적은데다, 적발된 건에 대한 처벌도 미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매년 늘어나는 대한민국 ‘국가 핵심기술’ 유출

@ 경기도 평택 삼성 캠퍼스. 사진=삼성전자

국가정보원과 국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 7월까지 최근 5년여간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해외로의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총 104건에 달한다. 분야별로는 ▲반도체(30건) ▲디스플레이(23건) ▲전기전자(11건) ▲자동차(9건) ▲기계(8건) ▲정보통신(7건) ▲조선(6건) ▲기타(8건)이다. 이 가운데 36건은 ‘국가 핵심기술’ 유출인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14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경제안보 위해범죄 특별단속’을 진행한 결과 해외 기술유출 21건을 포함해 총 146건을 송치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경찰은 올해 2월부터 9개월 동안 시도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 및 경찰서 안보수사팀 등 가용할 수 있는 조직과 인력을 모두 투입했다.

올해 들어 경찰이 검찰에 송치한 해외 기술 유출 사건도 21건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12건)보다 75% 늘어난 수치로, 2013년 이후 최근 10년 내 가장 많은 해외 기술 유출 사건 검거 건수다.

 

세부적으로 보면 국가핵심기술 2건을 포함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6건(28.6%),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 위반 15건(71.4%) 등이었다. 피해기술은 디스플레이 8건, 반도체·기계 각 3건, 조선·로봇 각 1건, 기타 5건 등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외국 국적의 로봇개발팀 연구원이 자국의 정부 보조금 지원 연구사업을 신청할 목적으로 국내 시술 로봇 관련 영업비밀을 유출하다가 검거됐다. 국내외 업체에 국내 대기업의 공장자동화 기술을 유출하고 공정 기법 등 국가핵심기술을 은닉해 외국에 유출하려던 협력업체 대표가 붙잡히기도 했다.

유출 국가별로는 중국이 14건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미국·베트남·캄보디아·이라크·호주가 각 1건이었다. 3건 중 2건 꼴로 중국기업들이 유출에 연루된 것이다.

이들의 주요 타깃은 삼성전자다. 반도체 분야 후발주자인 중국기업들은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업체들의 반도체 기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앞서 본 A씨의 경우 이외에도 이러한 사례는 적지 않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업무를 담당하던 직원이 이직을 위해 최신 반도체 초미세 공정과 관련된 국가 핵심기술 및 영업비밀 등이 담긴 파일들을 유출하다가 적발됐다. 이 직원이 빼돌리다 적발된 자료에는 전 세계에서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두 기업만 대량생산에 성공한 최첨단 3나노 공정 기술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계열사나 협력사가 보유한 기술이 타깃이 되기도 한다. 2022년 5월에는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에서 반도체 세정 장비 기술을 빼돌린 전직 연구원들이 적발돼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이들은 2018년 3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세메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임계 세정장비 도면 등 반도체 관련 기술정보로 동일한 사양의 반도체 세정 장비 14대를 제작한 뒤 관련 기술과 함께 중국 업체와 연구소 등에 팔아넘겨 710억 원을 챙긴 혐의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설계도면, 부품 리스트, 약액 배관 정보, 작업표준서, 소프트웨어 등 세정장비와 관련한 거의 모든 기술을 빼냈다.

또 다른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도 이러한 기술 유출의 타깃이 되고 있다. 앞서 본 세메스사건에 연루된 C사와 임직원들은 2018년 8월부터 2020년 6월까지 SK하이닉스의 HKMG(High-K Metal Gate) 반도체 제조 기술을 중국 업체에 누설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당시 중국 경쟁업체에 유출된 기술은 10나노급 D램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핵심 기술로 조사됐다.

‘천문학적 규모’ 피해액에도 솜방망이 처벌… ‘재판 하나마나’ 비판도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사진=SK하이닉스

이러한 산업 기술 유출로 인한 우리기업의 피해액은 천문학적인 규모다. 검찰은 A씨의 기술 유출로 삼성전자가 입은 피해액이 최소 3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검찰이 추산한 삼성전자 피해액은 ▲BED 기술 개발 비용 최소 124억 원 ▲최적의 공정배치도 도출 비용 최소 1360억 원 ▲설계도면 작성 비용 최소 1428억 원 등 최소 3000억 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30년 넘는 기간 시행착오와 연구개발을 통해 얻은 영업기밀인 만큼 최대 수조 원 상당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세메스의 경우 초임계 세정장비 기술 개발에 연구비 등으로 2188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기술 유출로 수주액이 10%만 감소해도 연간 400억 원 이상의 손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유출된 기밀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25조 원대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기술 유출 사례 중 30% 이상이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 ‘국가 핵심 기술’이기 때문에 그 피해액도 막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처벌 규정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낮지 않은 수준이다.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시 3년 이상 징역과 함께 15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고 그 외 산업기술을 해외 유출한 경우 15년 이하 징역 또는 15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에 따르면 기술 해외유출시 미국의 경제스파이법은 15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달러(약 65억 원) 이하의 벌금, 일본의 부정경쟁방지법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엔(약 2억7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의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은 첨단전략기술 해외유출시 5년 이상 징역과 2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병과하도록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처벌은 미미한 상황이어서 ‘솜방망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가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의뢰한 ‘기술 유출·침해행위에 대한 처벌법규 및 양형기준의 검토와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1심 형사공판 사건 81건 가운데 실형이 선고된 건 단 5건에 불과했다.

81건 가운데 집행유예가 32건(39.5%)으로 가장 많았고, 무죄가 28건(34.6%), 벌금 등 재산형이 7건(8.6%) 순이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기술 유출에 대한 법의 처벌 규정 수위는 주요국과 비교해 낮지 않으나, 실제 법원에서 선고되는 형량은 법정형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는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법원이 판결을 내릴 때 ‘지식재산권범죄 양형기준’의 ‘영업비밀침해행위’를 적용해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로 기술 유출을 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은 제2유형으로 기본 1년에서 3년 6개월의 징역으로, 가중 사유를 반영해도 최대 형량이 6년에 그친다.

국회 처벌 강화 입법 움직임에 “처벌 강화론 한계… 철저한 보안 유지해야”

올해 5월 31일 서울 강남구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에서 열린 첨단기술 해외 유출 적발 기자회견에서 신창민 인천세관 수사팀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업계를 중심으로 기술 유출에 대한 이러한 낮은 양형이 이런 사태를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감수해야 할 리스크보다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커서 쉽게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관련법의 처벌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 국회에서도 처벌 강화 입법에 나섰다. 지난 8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중기위) 소속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산업기술 침해행위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산업기술보호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고의적인 산업기술 침해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액 상한을 3배에서 5배로, 벌금을 현행 15억 원에서 최대 65억 원으로 상향하는 내용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위원회 소속인 이장섭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이 법 개정안은 15억 원을 초과하는 재산상 이득에 대해 2배 이상 10배 이하의 벌금을 병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이) 유출된 기술을 1000억 원을 들여 만들었는데 벌금이 65억 원이라고 한다면, 100억 원을 주고서라도 해당 기술을 아는 사람을 영입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제일 마지막 수단으로 벌금 상한을 높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면서 “규제 이전에 기업에서 보다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통해 중요한 기밀 사항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경제 한원석 기자>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