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현장] 150년 전 ‘욘’이 현시대 관객에게 부르짖는 “사랑해!”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봄 시즌 여는 첫 작품으로 ‘욘’ 선보여

김금영 기자 2024.04.09 11:45:47

서울시극단 '욘' 공연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 산하 예술단들의 혁신적인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보통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과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연초엔 희망찬 분위기에 맞춰 밝고 따뜻한 공연들이 가득하기 마련인데,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

앞서 지난 연말 서울시뮤지컬단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창작뮤지컬로 재해석해 선보였고, 이번엔 서울시극단이 헨리크 입센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원작으로 인간의 절대 고독을 이야기하는 연극 ‘욘’을 꽃피는 봄날 들고 나왔다.

관련해 서울시극단을 이끄는 고선웅 예술감독은 공연 프레스콜에서 “봄 시즌 처음을 여는 작품으로 과연 괜찮을지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내부 설문도 진행했다”며 “그런데 오히려 이런 공연이 더 깊은 몰입감을 줄 것 같았다. 흔히 영화 등을 보러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갔다가 다시 밖에 나오면 쨍하게 비치는 햇살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묘한 이질감에서 오히려 관객이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욘(가운데, 이남희 분)은 가난한 광부의 아들에서 은행가로 출세했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8년간의 수감 생활을 거친 뒤에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골방에서 또 8년을 칩거하는 인물이다. 사진=세종문화회관

공연의 원작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은 ‘근대극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노르웨이 태생으로 ‘사회의 기둥’과 ‘인형의 집’ 등 총 23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당대의 현실을 날 선 시각으로 바라보며 사회문제를 연극으로 올려 전통적인 관념에 도전하는 작품으로 관객과 비평가들 사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중 서울시극단은 욘을 현시대 무대로 불러왔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모두 잃고 병든 늑대처럼 8년 동안 자신의 작은 방이 세상 전부인 듯 칩거해 온 남자 욘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충동을 그린다.

서울시극단은 욘의 무대화를 위해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와 협업했다. 김미혜 교수가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한 입센 전집(총 23작품, 10권)을 토대로 고선웅 예술감독(서울시극단 단장)이 각색, 연출 과정을 거쳤고, 김미혜 교수는 연극 제작과정을 돕는 드라마투르기로 공연에 참여했다.

(왼쪽 두 번째부터) 엘하르트(이승우 분), 빌톤 부인(최나라 분)은 희망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세종문화회관

김미혜 교수는 “입센의 작품을 순서대로 번역했는데,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작품이 욘이었다. 많은 연출가가 관심을 갖고 이 작품을 무대화해주길 바랐는데, 희곡집이 나온 2022년 5월 말 즈음, 고선웅 예술감독이 욘에 관심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며 “원작은 상당히 길고 서사가 굉장히 촘촘한데 이를 관객에게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보다는 틈새가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략하는 과정을 거쳤다. 요즘 시대 관객은 너무 긴 작품을 보기 힘들어하는 측면도 있고, 또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선웅 예술감독은 “각색할 때 겁도 많이 났는데, 김미혜 교수가 다양한 가능성을 많이 열어줘서 용기를 내서 내용을 칠 건 과감하게 치면서 작업했다. 최근 원작을 다시 읽어봤는데 공연화된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서사 채우는 배우들의 열연

작은 방이 세상 전부인 듯 칩거하던 욘이 세상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무대에도 반전이 일어난다. 사진=세종문화회관

생략된 부분을 촘촘하게 메꾼 건 배우들의 열연이라는 설명이다. 고선웅 예술감독은 “배우 캐스팅이 완벽했다. 각 배우들 특유의 어투 등의 느낌을 살려 공연 각색을 했다. 각각의 장기도 있어서 이 부분을 넣고, 빼고 하면서 공연을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에서 은행가로 출세했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8년간의 수감 생활을 거친 뒤에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골방에서 또 8년을 칩거하는 욘 역할로는 이남희가 열연했다. 그는 “고선웅 예술감독이 ‘명배우’라고 하면서 여러 부담을 줬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치 달리는 전차와도 같은 연기를 요구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하지만 덕분에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욘을 연기하기 위해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자는 생각으로 몰입했다. 내가 가진 요소들,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끼는 사랑, 존엄, 눈물, 배신 등 여러 감정을 이 인물에 투영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욘의 옛 연인으로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성공에 대한 욘의 욕심으로 그에게 버림받은 엘라 렌트하임 역으로는 정아미가 열연했다. 엘라는 욘이 감옥에 수감되며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욘의 아들 엘하르트를 15살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집에 데려와 기르는데, 이 과정에서 엘하르트를 자신의 친자식처럼 생각하며 애정과 집착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다. 그는 “연기하면서도 매력 있다 느낀 캐릭터로, 애정이 간다. 엘라가 조카인 엘하르트에게 집착하는데, 엘라를 연기한 입장에서는 집착이 아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고, 그렇게 생각하며 연기했다”며 “이 연극은 희극과 비극이 함께 존재하는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욘(이남희 분)은 극 말미에 이르러 울부짖듯 사랑을 외친다. 사진=세종문화회관

엘라의 쌍둥이 동생이자 욘과 결혼한 아내 귀닐 보르크만은 이주영이 연기했다. 귀닐 또한 아들 엘하르트에게 집착하는데, 이는 욘의 파산으로 인해 동반 몰락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아들이 대신해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주영은 “원작 희곡을 읽으며 얼어붙은 고독, 공포를 느꼈다”며 “귀닐의 몸은 현재를 살고 있지만, 마음은 과거에 갇혀 있다. 극 내내 갈등을 빚었던 언니와 마침내 손을 맞잡았을 때 모든 것들에 온기가 드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불행하던 귀닐은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행복이라는 게 뭔지 질문을 던지는데 그 과정으로 달려가기 위해 연습했다”고 말했다.

앞선 세대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엘하르트, 그리고 그와 함께 새 여정을 떠나는 빌톤 부인은 이승우, 최나라가 각각 연기했다. 빌톤 부인은 엘하르트보다 7살 연상이자 이혼녀로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리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하르트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인물이다. 엘하르트 또한 가족의 집착에 짓눌리지 않고 희망을 찾아 과감하게 떠난다. 즉 두 인물은 과거에 갇힌 욘, 엘라, 귀닐 등 앞선 세대와 달리 현재를 살며, 더 나아가 미래까지 바라보는 세대다.

이승우는 “다른 인물들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해서 다른 미래를 찾지만, 엘하르트는 현재를 굉장히 사랑해서 또 다른 현재가 존재하는 미래로 나아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환경 속 충분히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충동적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엘하르트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관객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100년의 시간이 지나도 관통하는 이야기

극 내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왼쪽 두 번째부터) 엘라(정아미 분)와 귀닐(이주영 분)은 극 말미에 이르러 드디어 손을 맞잡는다. 사진=세종문화회관

무려 15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작품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 고독 등의 이야기는 현시대 관객에게도 공감대를 자아낸다는 설명이다. 최나라는 “입센 작품에서는 용기를 내서 변화를 꾀하는 주도성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100년 이상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멋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아미는 “엘라를 비롯해 극 중 인물들은 마음속에 제각각 공허함, 외로움 등 여러 감정이 있는데 욕심을 버릴 때 진정 채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이는 현재의 우리와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라고 짚었다.

김미혜 교수는 “150년 작품이지만, 극 중 인물들이 우리와 이름만 좀 다를 뿐이지, AI(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이 발전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흔히 일어나고 느끼는 감정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히 시의성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행복한 가족 사진을 찍듯 웃음 짓는 배우들의 열연이 눈길을 끈다. 사진=세종문화회관

극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시작하지만, 극 중 인물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갈등이 최고조로 높아졌을 때 오히려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가 발생하는 등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우리네 인생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극 말미에 이르러 드디어 작은 방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온 욘의 결심, 그리고 극의 하이라이트에 치달아 공연장에 흰 눈이 가득 내리듯 연출되는 풍경에서는 초반의 어두움에서 환한 빛의 세계로 분위기가 반전되며 탄성을 자아낸다. 이 부분은 고선웅 예술감독이 원작 희곡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을 향해 울부짖듯 외치는 욘의 “사랑해”라는 뜻밖의 고백이 가슴에 파고든다.

고선웅 예술감독은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올라가는 욘의 모습이 슬펐다. 이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이 많았다. 무대를 최대한 비우고 바람 소리로만 연출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관객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결국 산을 올라가고 흰눈이 쏟아지는 장면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극 중 욘이 바깥으로 나가려다 살포시 다시 내려놓는 모자,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 앉는 나무 그루터기 하나, 처음 맨발로 등장했다가 신발을 신었다가 다시 맨발로 이르는 여정 그리고 욘이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 외치는 ‘사랑해’, 마지막에 행복한 가족사진을 찍는 듯한 모습까지 각 장면들이 소중하다”며 “극 중 인물들은 좌절, 갈등, 허무, 사랑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데 결국엔 이들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서울시극단 고선웅 단장, 김미혜 드라마투르기, 배우 정아미·이남희·이주영·최나라·이승우. 사진=세종문화회관

특히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이 연극의 매력을 한껏 느끼기를 바란다는 마음이다. 이남희는 “욘 역을 맡고, 극 중 욘처럼 신촌 옥탑방 골방에 틀어박혀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곳엔 연극 포스터가 가득 붙어 있다. 그 작은 골방에서 욘이 탄생했다 생각한다”며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연극은 아직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더 위대할 수 있다 생각했다. 이 연극을 통해 살아가며 많은 어려움과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 빛과 온기를 나눠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미혜 교수는 “입센은 당대를 냉철한 눈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하지만 이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작가로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꾼 사상가였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며 “입센은 항상 ‘대답은 너희가 하라’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머리가 아플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21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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