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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비운의 금호타이어 58년史…산업은행은 왜 ‘외통수’ 자처했나

중국에 넘어가기까지 영욕의 세월 ‘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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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2호 손정호 기자⁄ 2018.04.09 11:10:12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뿌리인 금호타이어가 원주인과 중국 타이어업체 더블스타로 매각될 운명에 처했다. 서울 마포구 타이어뱅크의 한 지점에 금호타이어 제품들이 쌓여 있다. 사진 = 연합뉴스

(CNB저널 = 손정호 기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뿌리인 금호타이어가 결국 중국기업에게 넘어갈 처지가 되면서 58년 기업 역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금호타이어는 삼양타이어로 출발해 전라도 광주에서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지역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토호 기업이다. 현대사의 굴곡만큼이나 사연이 많았던 이 회사의 지난 세월을 CNB가 되짚어 봤다.

 

금호타이어의 역사는 옛 금호그룹(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전신)에서부터 비롯된다. 금호그룹의 창업자인 고(故) 박인천(1901~1984) 회장은 1946년 중고 택시 2대를 구입해 광주 황금동에서 ‘광주택시’라는 상호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자동차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포드 35년형, 내쉬 33년형이 박 창업주의 첫 동반자였다.  


이후 박 창업주는 금호고속을 설립해 운수사업을 확장하면서 타이어 확보에 어려움을 겪다 금호타이어의 전신인 삼양타이어를 1960년 세웠다. 이때부터가 금호타이어 역사의 시작점이다.

 
당시 금호타이어의 하루 생산량은 20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빠르게 성장했다. 1975년 국내 최초로 항공기용 타이어를 개발했으며, 1999년에는 펑크가 나도 시속 80㎞로 달릴 수 있는 런 플랫(Run-flat) 타이어 생산에 돌입했다. 2000년대에는 중국과 미국, 베트남 등에 연이어 해외 생산기지를 구축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비상했다. 

금호타이어의 역사는 옛 금호그룹(현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비롯됐다. 금호그룹은 창업자 고(故) 박인천 회장이 포드 35년형(앞), 내쉬 33년형(뒤) 등 중고 택시 2대를 구입해 1946년 광주에서 ‘광주택시’란 상호로 운수사업을 시작하면서 탄생했다. 사진 = CNB포토뱅크

이 과정에서 박 창업주의 아들인 박삼구 회장과, 박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도 금호타이어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박삼구 회장은 22살이던 1967년 금호타이어에 입사해 사회 첫 발을 내디뎠고, 박세창 사장은 2005년 미국 유학 후 금호타이어에서 출발했다.


금호타이어의 계열사들도 승승장구 했다. 광주택시에서 시작한 금호고속은 1960~70년대 경부선과 호남선 고속버스 사업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995년 중국 우한에 첫 합작회사를 설립해 해외 운수시장에 진출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건설 분야에서는 금호산업이 두각을 나타내며 금호타이어, 금호고속과 함께 급성장 해갔다.  80~90년대 전성기를 거쳐 지금도 건축·토목·주택·플랜트·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건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금호타이어와 금호고속을 기반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은 1988년 우리나라 2위 항공사인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했다. 택시 2대로 시작한 기업이 마침내 육지와 하늘 모두에서 운송업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호그룹은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비행 고도가 하락했다. 당시 건설업계 1위인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부터다. 


인수를 위해 계열사에서 자금을 모았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총체적인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결국 2009~2010년 그룹의 뿌리인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은 채권단 자율협약에 돌입했다.  


이후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그룹의 뿌리인 금호타이어와 금호산업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박 회장은 채권단 손에 넘어갔던 금호산업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오자 사재까지 동원해 인수자금을 마련하는 등 공을 들였다. 


특히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과 금호터미널, 금호리조트 등 10여개 계열사의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핵심 회사라는 점에서 박 회장이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기업이었다. 마침내 박 회장은 2015년 7228억원을 들여 금호산업을 되찾았다. 채권단 손에 넘어간 지 6년만이었다.    

 

우물쭈물하다 결국 중국 품에


하지만 금호타이어 인수는 순조롭지 못했다. 박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금호타이어를 되찾아야 그룹 재건이 완성된다고 강조했지만 시장 상황은 녹록치 못했다.  


박 회장은 우선매수청구권을 무기로 내세워 금호타이어 인수를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채권단 대표인 산업은행은 박 회장의 자금력을 의심했다. 박 회장은 인수자금 확보를 위해 여러 기업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의 인수를 제안했지만 산은은 이를 거부했다.    

4월 1일 오전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운동장에서 해외매각 찬반투표에 참여한 노동조합원이 부결을 촉구하는 노조회보를 손에 쥐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이후 산은은 중국 타이어업체 더블스타를 인수 파트너로 삼아 금호타이어를 넘기려 했지만 금호타이어 상표권을 갖고 있는 금호산업과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최근에는 중견 타이어 기업인 타이어뱅크가 인수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산은은 인수자금 플랜에 신빙성이 없다며 거부했다. 


금호타이어는 현재 막대한 부채로 최악의 위기에 처한 상태다. 최근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채무 만기가 도래한 상태다. 산은은 더 이상의 만기 연기가 불가능하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런 가운데 금호타이어 노조가 지난 1일 찬반투표를 거쳐 중국 더블스타로의 매각에 찬성하면서 상황이 급반전 되어 중국 품에 안기게 됐다. 더블스타는 3년간 고용보장을 약속했지만 이후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먹튀’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금호타이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산업은행의 책임이 커 보인다. 과거 박삼구 회장의 ‘컨소시엄 인수 방식’ 제안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바람에 사태가 더 악화됐고, 이후 중국 기업에게 끌려 다니다가 한국기업에게 매각할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윤영대 공동대표는 CNB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산업은행이 금호타이어 우선인수권(우선매수청구권)을 갖고 있는 박삼구 회장에게 컨소시엄 구성을 허용하지 않은 점은 중국 기업(더블스타)과 비교할 때 불평등한 조치였다”며 “산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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