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한국시간) 미국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故 조 회장은 1949년 3월 8일 인천광역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美 메사추세츠 주 쿠싱 아카데미(Cushing Academy)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학사, 美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학위 등을 취득했다.
1970년 미국 유학 중에는 병역의 의무를 위해 귀국, 군 입대 후 강원도 화천 소재 육군 제 7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다. 또한 베트남에도 파병돼 11개월 동안 퀴논에서 근무한 후 다시 강원도 비무장지대로 돌아와 1973년 7월 만기 전역까지 36개월 군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대한항공에는 1974년에 입사했다. 이후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들을 두루 거친 뒤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조 회장은 재직기간 중 대한민국의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을 세계에서 주목하는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위기의 순간들을 기회로
대한항공은 존폐의 위기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때마다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 무한 경쟁의 서막을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창설 주도로, 그리고 전 세계 항공사들이 경영 위기로 움츠릴 때 앞을 내다본 선제적 투자로 맞섰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엔 자체 소유 항공기의 매각 후 재 임차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다. 1998년 외환위기가 정점이었을 때는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 SARS 뿐만 아니라 9.11 테러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세계 항공 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2003년, 조 회장은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맺었다. 결국 이 항공기들은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가 대형항공사와 저비용 항공사(LCC) 간 경쟁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한항공과 차별화된 별도의 저비용 항공사 설립이 필요하다고 확신,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했다. 진에어는 저비용 신규 수요를 창출, 대한민국 항공시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넘어선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증가했으며, 일본 3개 도시 만을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으며,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했다. 이와 같은 대한항공의 여정에는 조 회장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대한민국 항공 산업 위상 드높여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라는 개별 기업을 넘어, 대한민국 항공 산업의 위상 자체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이어왔다.
조 회장은 ‘항공업계의 UN’이라고 불리우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며 대한민국 항공업계의 발언권을 높여왔다.
조 회장은 1996년부터 IATA의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Board of Governors) 위원을 맡았다. 2014년부터는 31명의 집행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으로 이뤄진 전략정책위원회(SPC, Strategy and Policy Committee) 위원도 맡아왔다.
이는 사실상 세계 항공 산업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 회장의 IATA에서의 위상에 힘입어 IATA는 2019년 연차총회를 처음으로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하게 됐다.
대한민국 항공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도 힘썼다.
2010년대 미국 항공사들과 일본 항공사들의 잇따른 조인트 벤처로 대한민국 항공 산업의 중요한 수익창출 기반인 환승 경쟁력이 떨어지자, 조 회장은 델타항공과의 조인트 벤처 추진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이는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 대한민국 환승 경쟁력은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대한민국 항공시장의 파이를 한층 더 키우는 계기가 됐다.
민간 외교관…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공
조 회장은 다양한 부문의 민간 외교에도 앞장섰다.
조 회장은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으로서 양국간 돈독한 관계 유지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2015년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했다.
2005년에는 몽골 정부가 외국인에게 수훈하는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는 조 회장이 몽골 학생 장학제도 운영 등을 통해 한·몽골 관계를 진정한 협력 동반자로 확대 발전시키고 몽골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외에도 조 회장은 우리나라의 국격 제고를 위해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시작했다.
조 회장은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재임 기간인 1년 10개월간 50번에 걸친 해외 출장을 통해 IOC 위원 110명중 100명 정도를 만나 평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 당시 이동 거리만 64만km(지구 16바퀴)에 달했다. 이러한 조 회장의 노력은 결국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로 이어졌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12월 한국언론인 연합회 주최로 열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에서 ‘최고 대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2년 1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중 첫째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굴곡 속에서도 안정된 성과 이끈 경영철학
조 회장은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맡아 올림픽 경기장 및 개·폐회식장 준공 기반을 만드는 한편, 월드컵 테스트 이벤트를 성사시키는 등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평창동계올림픽을 본 궤도에 올리는 데 앞장섰다.
조 회장은 최근 자신과 가족의 배임, 횡령, 갑질 등 여러 가지 논란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대한항공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왔다. 그 결과 지난달 27일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재신임 안이 국민연금 등 주주들의 반대에 가로막혔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한항공은 1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해오고 있었다.
조 회장의 경영은 시스템 경영론으로 알려졌다. 최고 경영자는 시스템을 잘 만들고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을 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또한 절대 안전을 지상 목표로 하는 수송업에 있어 필수적 요소이고 고객과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현장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항공사의 생명은 서비스이고 최상의 서비스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를 평가 받는 길이라고 보고 고객중심 경영에 중점을 뒀다.
조 회장은 해외 출장의 모든 과정도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수행하는 비서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며 서비스 현장을 돌아보고 안전에 저해되는 요소가 없는지 면밀히 살폈다. 접객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생생한 의견을 들어왔다. 조 회장의 이 같은 열정과 헌신은 대한항공이 지금껏 성취했던 것들과 궤를 같이 한다.
조 회장은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동경했던 하늘로 갔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명희(前 일우재단 이사장) 씨를 비롯 아들 조원태(대한항공 사장) 씨, 딸 조현아(前 대한항공 부사장)·조현민(前 대한항공 전무) 씨 등 1남 2녀와 손자 5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