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원⁄ 2019.05.02 10:27:20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전통의 강자 LG화학과 신흥 강자 SK이노베이션의 장외 신경전이 첨예하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2년 동안 이 회사의 2차전지 관련 전 분야에서 핵심인력 76명을 빼가면서 선행기술, 핵심공정 등을 유출했다고 주장하며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기업의 정당한 영업활동에 대한 불필요한 문제 제기라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LG화학은 4월 29일(현지 시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이하 ITC)와 미국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했다고 4월 30일(한국 시간) 밝혔다.
LG화학은 이 회사의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셀,팩, 샘플 등의 미국 내 수입 전면 금지를 ITC에 요청하고,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미국 법인 소재지인 델라웨어 지방법원에는 영업비밀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LG화학 “핵심기술 유출된 구체적 자료 있다”
LG화학은 자체 조사 결과 자사의 2차전지 관련 핵심 기술이 2017년부터 SK이노베이션으로 다량 유출된 구체적인 자료를 발견했기 때문에 이번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소송을 미국에서 제기한 이유에 대해서는 미국 ITC 및 연방법원이 소송과정에 강력한 ‘증거개시(Discovery) 절차’를 두고 있기 때문에 증거 은폐가 어렵고, 이를 위반할 경우 소송 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는 제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증거개시절차란 소송의 당사자가 보유하고 있는 관련 각종 정보 및 자료를 상대방이 요구할 경우 제출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말한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사업의 집중 육성을 선언한 2017년부터 2년 동안 LG화학 전지사업본부의 연구개발, 생산, 품질관리, 구매, 영업 등 전 분야에서 76명의 핵심인력을 빼갔으며, 특히 이 중에는 LG화학이 특정 자동차 업체와 진행 중인 차세대 전기차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SK이노베이션이 핵심기술 유출 우려가 있는 LG화학의 핵심인력을 대상으로 추가 채용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덧붙였다.
LG화학은 이를 뒷받침할 자료로 SK이노베이션의 입사지원 서류를 공개했다.
이 서류는 지원자에게 LG화학에서 수행한 상세한 업무 내역과 프로젝트 리더 및 프로젝트를 함께한 동료직원 전원의 실명을 기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직원 A의 입사지원 서류에는 LG화학의 전극 제조 공정 관련 프로젝트 내용이 당시 상황과 배경, 목적부터 프로젝트 결과물인 개선 방안과 성과까지 기재되어 있다.
이에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에 입사 지원한 인원들이 집단으로 공모해 자사의 선행기술, 핵심 공정기술 등을 유출했으며, 심지어 이직 전부터 회사 시스템에서 개인당 400여 건에서 1900여 건의 핵심기술 관련 문서를 다운로드했다고 주장했다.
“거듭된 자제요청·경고에도 반칙 이어져”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누적 수주 잔고가 2016년 말 30GWh에서 올해 3월 말 기준 430GWh로 13배 이상 증가한 데에 의문을 제기하고,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에서 데려간 인력을 통해 입수한 영업비밀 등을 이용해 선두업체 수준의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약하고, 이러한 점들이 최근 미국을 포함한 주요 고객사들로부터 글로벌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시작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했다.
LG화학은 “지난 2017년 10월과 이달에도 SK이노베이션에 ‘영업비밀, 기술정보 등의 유출 가능성이 높은 인력에 대한 채용절차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증명 공문을 두 차례 보낸 바 있으며, 또 ‘영업비밀 침해 사실이 발견되거나 영업비밀 유출 위험이 있는 경우 법적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밝히고, “이 같은 자제요청에도 SK이노베이션이 핵심인력 채용과정에서 유출된 영업비밀 등을 2차전지 개발 및 수주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이런 행위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번 법적 대응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사안은 개인의 전직의 자유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LG화학의 2차전지 핵심 인력을 대거 채용하고 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영업비밀을 유출해간 심각한 위법 행위”라고 강조했다.
업계 일부에서는 LG화학의 이번 문제 제기가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이 급성장하는 데 대한 강력한 견제책으로 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최근 배터리 사업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리면서 경력직을 대거 채용해 왔고, LG화학 인력의 전직이 특히 많았다는 것 등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SK이노베이션이 생산하는 전기차 배터리가 LG화학과 동일한 파우치형이라는 점은 후발주자이며 그룹 내 전자제품 제조 계열사가 없는 SK이노베이션이 빠른 성장을 위해 ‘1등 모방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친다는 분석의 근거로 여겨진다.
SK이노베이션의 급성장 견제?
결과적으로 SK이노베이션은 급성장했다. 최근 3년 사이 전기차 배터리 누적 수주 잔고가 크게 늘었고, 지난해 기준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배터리 시장 점유율 7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8월에는 세계 최초로 니켈-코발트-망간 8:1:1 비율로 코발트 함량을 줄인 신형 전기차 배터리(NCM811)를 개발하고 LG화학보다 먼저 양산에 들어가면서 글로벌 업계에서 급격히 주목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폭스바겐이 미국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에 장착할 배터리를 공급받을 업체를 찾을 때 이노베이션은 LG화학을 제치고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업체도 SK이노베이션이었다.
폭스바겐은 LG화학에게도 중요한 고객이었다.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전기차 900만 대 생산 계획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필요한 배터리 양만 연간 150GWh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이 2차전지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온 LG화학 입장에서는 이런 SK이노베이션의 최근 행보가 ‘다 차려 둔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수 있다.
LG화학은 1990년대 초반부터 2차전지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해왔다. 2018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LG화학이 전사 연구개발비로 투자한 1조 원 이상의 금액 중 3000억 원 이상이 전지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SK이노베이션은 석유화학, 배터리 등 전사 연구개발비가 2300억 원 수준으로, LG화학이 전지 한 분야에 투자한 연구개발비가 SK이노베이션의 전체 연구개발비를 크게 상회한다.
특허에 있어서도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특허건수는 1만 6685건, SK이노베이션은 1135건으로 차이가 크다. (2019년 3월 31일, 국제특허분류 H01M관련 등록 및 공개기준)
LG화학 CEO 신학철 부회장은 “LG화학의 2차전지 사업은 1990년대 초반부터 3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과감한 투자와 집념으로 이뤄낸 결실”이라며 “이번 소송은 경쟁사의 부당 행위에 엄정하게 대처해 오랜 연구와 막대한 투자로 확보한 핵심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이고, 정당한 경쟁을 통한 건전한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점입가경’으로 이어져 온 신경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갈등은 제법 뿌리가 깊다. 두 회사는 2010년대 전반기에도 수년에 걸친 소송전을 치른 적이 있다. 당시 이슈는 2차전지 핵심소재 분리막 제조기술 특허와 관련된 문제였다.
LG화학은 2011년 12월 세라믹 코팅 분리막 특허와 관련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고, SK이노베이션은 특허심판원에 LG화학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하며 맞섰다. 이 소송전은 상고를 거듭하며 대법원까지 갔다가 2014년 양사가 서로 소를 취하하며 극적인 화해로 마무리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지난달 24일과 25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차례로 개최한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 자리에서 또 다른 신경전이 일어났다.
먼저 LG화학의 컨퍼런스 콜에서 “전기차 배터리 국내기업 중 SK이노베이션의 수주열기가 세다”며 “상반기 전기차 수주상황이 궁금하다”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LG화학 관계자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일부경쟁사가 공격적인(낮은) 가격으로 수주에 뛰어들고 있다”면서 “당사는 수익성·경제성이 확보되지 않는 수주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수주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변했고, 이어 “단순 저가공세가 아닌, 제품의 성능 특성과 기술을 제품구현에 있어 안정성에 대한 평가가 수주 결정에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열린 SK이노베이션의 컨퍼런스 콜에서도 이와 관련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SK이노베이션이 저가수주로 공격적인 영업을 하고 있다는 업계 평가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이 나왔고,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최근 경쟁사에서 언급한 것이 특정 업체를 지칭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라며 “특정 코멘트 할 것 없다”고 일축했던 것. 이 관계자는 이어 “회사의 수주 전략은 기술과 원가 경쟁력에 기반해 추정치에 근거해 수주하는 것”이라며 “경영 실적으로 답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소송은 LG화학 ‘승’…SK “직원 대우 좋을 뿐”
이번에 제기된 소위 ‘인력 빼가기에 의한 영업비밀 유출’ 논란과 관련해서는 이미 국내에서 두 회사 간 관련 소송이 진행된 바 있다.
LG화학은 올해 초 대법원에서 2017년 당시 SK이노베이션으로 전직한 핵심 직원 5명을 대상으로 제기한 전직금지가처분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재판부는 영업비밀 유출 우려, 양사 간 기술 역량의 격차 등을 모두 인정해 지난해 이례적으로 장기간에 해당하는 ‘2년 전직금지 결정’을 내렸고, 대법원이 LG화학의 승소를 최종 확정했다.
이번에 LG화학이 미국에서 제기한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에 따른 수입금지요청과 관련해서는 ITC가 5월 중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면 내년 상반기에 예비판결, 하반기에 최종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SK이노베이션 측은 LG화학이 미국에서 제기한 소송과 주장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LG화학이 거론한 이슈는 기업의 정당한 영업활동에 대한 불필요한 문제제기이며, 국내 이슈를 외국에서 제기함에 따른 국익 훼손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SK 배터리 사업은 투명한 공개채용 방식을 통해 국내외로부터 경력직원을 채용하고 있으며 경력직으로의 이동은 당연히 처우 개선, 미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한 이동 인력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진행됐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SK 배터리 사업은 글로벌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제품력을 기반으로 하여 투명성과 윈-윈(win-win)에 기반을 둔 공정경쟁을 통해 영업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는 자동차 산업 글로벌 리더들의 선택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LG화학에서 제기한 이슈는 명확하게 파악해 필요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 확실하게 소명해나가겠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의 경력직 처우가 좋은 만큼 인재 이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업계 일부의 의견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의 연봉은 정유 업계에서도 최고 수준이고, 글로벌 배터리 시장 강자인 LG화학, 삼성SDI보다 높아 입사 지원자 모임까지 형성될 정도로 관심이 높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