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 머물러있던 소위 ‘아니메 오타쿠’들이 유통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니메 오타쿠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사람들을 일컫는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80~90년대 소위 ‘서브컬처’(sub culture), 즉 주류 문화에 편입되지 못하는 하위문화로 인지되다가 이들을 보고 자란 세대가 30, 40대가 되면서 경제력을 갖게 되자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특히 유행에 민감한 패션업계에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분위기다.
유니클로·휠라·롯데칠성 ‘건담’, 클루 ‘웨딩피치’ 컬래버레이션
패션·뷰티·음료 기업들이 ‘마니아’ 성향이 강한 캐릭터들과의 컬래버레이션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올해는 방영 40주년을 맞은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이하 건담)’과의 컬래버레이션이 주목받고 있다.
패션기업 휠라는 지난달 23일 ‘휠라 X 건담’ 컬렉션을 선보였다. 건담 시리즈 중 첫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 소위 ‘퍼스트 건담’을 스포츠 감성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 사측의 설명이다.
제품군은 기동전사건담, 지구연방군, 지온군 등 건담 속 등장 캐릭터 이름을 딴 3가지 테마 아래 의류, 신발, 액세서리로 구성됐다. 그래픽 티셔츠, 건담을 상징하는 3가지 색상인 트리콜로(빨간색, 흰색, 파란색)를 입힌 어글리 슈즈, 취향에 따라 연출이 가능한 모자, 에코백, 힙색 등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컬렉션이 최초 공개된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은 소위 ‘건덕후(건담 마니아)’와 브랜드 팬 등의 인파로 붐볐다. 휠라 측에 따르면 이날 준비된 한정판 물량은 모두 소진됐고, 공개 전날인 22일 저녁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이에 휠라는 롯데백화점과 협의해 백화점 내부 공간을 개방해 실내 대기 공간을 마련하고, 물, 방석 등을 제공하며 소비자들의 안전을 챙겼다.
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씨유)는 지난 5월 롯데칠성음료가 일본 완구회사 반다이와 합작한 ‘건프라(건담 프라모델)’인 ‘핫식스 X 건담 HG 프라모델’을 한정 수량으로 단독 판매했다.
이 프라모델은 롯데칠성의 에너지음료 핫식스와 컬래버레이션한 모델이다. 핫식스 캔을 모티브로 퍼스트 건담의 색을 변경하고, 불사조와 핫식스 로고를 방패에 넣었다.
사전 예약 판매는 3분 만에 매진됐고, 이후 오프라인 판매를 위해 점포를 대상으로 진행한 예약 발주도 단 하루 만에 마감됐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패션기업 유니클로(UNIQLO)은 앞서 3월에 ‘건담 UT 컬렉션’을 선보인 바 있다. UT(UNIQLO T-Shirt)는 협업에 기반한 그래픽 티셔츠 라인업이다. 심플한 디자인이 적용된 해당 티셔츠는 건담 팬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착용할 수 있도록 제작돼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월드의 주얼리 브랜드 클루(CLUE)는 90년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니메이션 ‘웨딩피치’와 협업했다. 웨딩 피치는 국내에서 90년대에 3곳의 방송사가 방영했고 2013년에 재방영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다.
지난달 공개된 ‘클루 X 웨딩피치 컬래버레이션’은 캐릭터별 핵심 모티브를 그대로 살린 디자인을 적용했고, 주인공 ‘피치’의 단독라인이 특별 제작됐다. 상품은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시계 등 총 60여 가지 품목으로 구성됐다. 온라인몰을 통해 진행된 사전 예약은 조기 마감되기도 했다.
키덜트 시장 규모 4년 만에 2배 성장
소비자들 “추억 회상과 자기만족”
이처럼 마니아적인 컬래버레이션 상품이 출시될 수 있는 까닭은 키덜트 시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으로 나온다.
다만 위와 같은 마니아 시장은 디즈니의 영화 시리즈나 애니메이션 등 미국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들이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키덜트 시장이 형성된 것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주류 키덜트 시장은 처음부터 대중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았지만 ‘아니메 오타쿠’들은 과거 일본과 문화적 교류가 적었던 시절 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데다, 최근까지도 ‘사회 부적응자’와 같은 배타적 이미지가 씌워진 바 있어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한다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트렌드와 과거의 추억을 재구성한다는 ‘뉴트로’ 열풍이 키덜트 저변을 넓히면서 마니아 시장도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주류 키덜트 시장과 달리 고가 제품을 출시하더라도 마니아들은 쉽게 지갑을 연다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통사들에게는 ‘틈새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분위기다.
참고로 키덜트 시장은 2~3년 사이 크게 성장했고, 주류 문화로 안착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은 국내 키덜트 시장이 지난 2014년 5000억 원에서 지난해 1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했다.
또 콘진원의 ‘2017 캐릭터 산업백서’에 따르면 캐릭터 상품 가운데 ‘키덜트/하비 상품’의 연평균 지출 비용은 5만 8163원으로 ‘출판/유아동 용품’(5만 5882원), ‘인형·로봇 외 완구’(4만7713원) 등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콘진원은 1인 가구의 증가, 소확행 문화 확산, 출산율 감소 등의 사회 현상에 따라 ‘나 자신을 위한 장난감’에 지갑을 여는 성인층의 증가가 원인으로 분석했다.
평소 키덜트 컬래버레이션 상품에 관심이 많은 30대 직장인 A씨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들을 어렸을 때는 살 수 없었지만, 경제력이 생긴 다음부터는 직접 구입하는 재미에 빠졌다”며 “추억도 되새기고 어렸을 때 누리지 못했던 욕구들을 풀어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클루에서 나온 웨딩피치 컬래버레이션을 구매했다. 사실 너무 유치하면 장난감 같아서 실용성이 떨어지는데, 이 제품은 만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일반인 코스프레’가 가능할 정도로 무난하고 예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