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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과 한판 승부> 다섯 번째 이야기

석양의 낭떠러지에 얽힌 한많은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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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58호 편집팀⁄ 2010.02.22 10:53:08

글·김윤식 살면서 고통이 가슴을 저미어올 때마다 미치코는 하늘을 원망했다. 도대체 하느님은 뭘 하고 계신 건지, 묻고 따지고 대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지옥이 어디 따로 있을까. 고나해를 찾아와 울부짖고 한탄하고 분노하고 자학하고 체념하는 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과 인생이 바로 지옥인 것을. 쉼 없이 이어지는 미치코의 서럽고 슬픈 세상 이야기에 무애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천재 소년 무애가 인지하고 있는 지식은 바다처럼 넓고 깊긴 하지만, 가슴으로 느끼거나 몸으로 겪은 ‘살아 있는 지식’은 될 수 없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누나,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 “글쎄~. 무애는 살아 있는 죽은 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짐작이나 하겠어?” 무애의 당돌한 물음에, 미치코는 ‘살아 있으되, 죽은 사람과 다름없는 처지’라는 은유(隱喩)로 답을 대신했다. 무애는 난감한 듯 잠시 말을 잃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맹귀부목의 귀한 인연이며, 어느 누구라도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지만, 놓치는 것이 없음)의 은혜로 저마다 존재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여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라 배웠는데, 죽음보다 더 아픈 삶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무애가 작심한 듯 자기 생각을 장황하게 털어놓았다. 맹귀부목(盲龜浮木)이란, 천 길 바다 밑에 사는 외눈박이 거북이 100년마다 한 번씩 바다 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데, 그때 마침 풍랑에 배가 파손되어 떨어져 나온 널빤지의 구멍과 맞닥뜨리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행운을 뜻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인생철학에 일정 부분 공감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숱한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책상물림들이 잘난 척하며 지껄이는 철학의 유희, 허망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라 하지 않을까?” “누나,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건 하늘의 뜻도 자연의 섭리도 아닌 것 같은데….” “하늘의 뜻이라! 그렇다면 무애는 하늘이 점지한 천재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도인(道人) 반열일 테니, 얘기 좀 해봐. 이 세상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인간이란 도대체 뭐고, 나는 누구인지, 왜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는지, 행복은 과연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왜 사람마다 삶의 품격에 차이가 나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정녕 잘 사는 것인지….” “누나, 그건 큰스님께서 답하셔야 할 화두야. 어찌 감히 내가 ….” 무애가 물꼬를 트고 미치코가 불을 댕긴 담론이 한 치도 양보 없는 자기주장으로 점차 달아올랐다. 미치코와 무애 소년의 끝없는 담론 석곡 행자의 정성 어린 배려와 능숙한 등반 솜씨 덕택에, 생각보다 빨리 세 사람 모두 무탈하게 산 정상에 다시 올라섰다. 초가을 밤이지만 꽤나 싸늘한 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땀으로 범벅이 된 이들에게는 오히려 시원하고 정겨운 바람이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는 백중의 둥근 보름달이 미치코의 무사 귀환을 환영이라도 하듯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상으로 올라올 때까지 기껏 한두 마디밖에 하지 않던 석곡이 바랑에서 물통을 꺼내 한 모금씩 권했다. 몽람암에서 가져온 천하일미의 샘물이다. 몹시 목말라하던 미치코가 연거푸 두 잔을 마시더니 금방 생기가 돌았다. 금정사까지는 여기에서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석곡과 무애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미치코를 배려해, 그냥 골짜기 위에서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미치코와 무애는 서로 기다렸다는 듯이, 잠시 멈췄던 담론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석곡은 두 사람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낮게 깔리는 묵직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저만치서 무예 연습에 열중하는 석곡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미치코 누나! 오늘 이승과 작별하려고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죽은 자겠네?” “당연히 그렇다고 봐야지.” “혹시 그 사람들의 사연을 알고 있어?” “앞서 뛰어내린 두 여자는 고나해 회원이 아니어서 모르지만, 나머지 일행에 대해서는 잘 알지. 궁금해?” “응~ 누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살아 있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어.” 무애는 그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의 사연이 몹시 궁금해졌다. 미치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빨리 알려 달라고 애를 태우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린 소년의 때 묻지 않은 순진한 호기심을 어찌 모를까. 미치코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날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사람들의 사연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치코는 개인별 상세한 사연들을 얘기하기 전에, 자신을 포함한 일행들의 간단한 신상과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연유를 먼저 개략적으로 알려주었다. 교통사고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흉측한 몰골이 된 인기 여배우, 시합 중에 척추와 고환을 다쳐 성불구가 된 유명 프로축구 선수, 게이와 트랜스젠더 간에 얽힌 사랑으로 정사(情死)를 도모하려는 동성연애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수술을 받을 때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을 수혈받아 자신과 남편과 태어난 아기까지 에이즈에 걸려 세상에 복수하러 나선 새색시, 결혼 반대에 부딪히자 죽음으로 부모에게 한풀이를 하려는 한족 청년과 회족 이혼녀 등등 사연도 저마다 가지각색이었다. 미치코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부모와 여동생이 매부에게 무참히 살해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똑같은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피신해온 청년, 사업에 실패하여 아내는 가출한데다 자식들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고 자신은 사채업자의 폭력을 피해 도망 다니는 40대 남자, 사천성 지진 때 외아들을 잃은 공무원, 급작스레 가정이 몰락하여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데 취업이 안 되자 절망한 20대 엘리트 청년, 도덕과 청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왔으나 측근과 가족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하루 아침에 명예가 추락한 고위 공직자, 고교 시절 집단 성폭행을 당한 불상사로 아버지는 정신병자가 되고, 결혼 후 발달장애자 아이와 남편은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그때 실신한 자신을 간호하던 어머니는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젊은 처자 등…그 외에도 기구한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이승을 등지려 한 사람들 외에 특별한 연유로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미치코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름이 꽤나 알려진 유명 인사인데, 미치코는 그들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살아 있는 죽은 자’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주장을 폈다. 최근 몇 년 간 인기 절정을 누리다가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하고 세속을 떠나 출가(出家)하겠다며 결심을 굳힌 스타 가수 출신 중국 청년이 그 한 사람이다. 그는 천재 과학자인 형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이 돌아버리자, 인생에 깊은 회의를 느껴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부동산 개발과 전자 제품 유통 사업으로 중국 10대 부자에 뽑힌 40대 중반의 사업가도 있다. 그는 10년 전에 사업에 실패하여 석양의 낭떠러지에서 자살하려다, 담운 선사의 보시로 목숨을 지킨 후, 새로운 각오로 모진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기사회생한 그때부터 원래의 자신은 죽었다고 치부하고, 덤으로 얻은 인생을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면서 살고 있다. 이번에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은 이유는 생명을 지켜준 은혜에 감사하고 남은 생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중국에도 잘 알려진 한국의 유력 정치인도 있었다. 그는 와신상담 절치부심하여 차기 대권 도전을 준비하던 차에, 석양의 낭떠러지를 찾아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다듬고 군자의 길을 다짐코자 했다고 한다. 진정한 국가 지도자는 사심을 버리고 대의를 실천해야 하는 바, 결코 개인의 이기적 인생은 용납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살아 있는 죽은 자’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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