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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돈 한국영화 ④] 할리우드에서 배운다(2): ‘인재 모였다 흩어져’ 新경제 선점한 할리우드-충무로

평소에는 헐렁, 일 생기면 전광석화로 두뇌-스타들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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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윤지원⁄ 2016.11.15 10:16:52



20세기폭스와 워너브러더스 등등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한국의 영화산업에 관심을 보이고, <곡성>, <밀정> 등 한국영화에 직접 투자·제작을 시도, 큰 성과를 내고 있다. 20세기폭스의 해외 로컬 프로덕션을 담당하는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FIP) 코리아의 김호성 대표는 달러 자본이 들어와 한국 시장의 지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과 재능의 씨앗이 할리우드에 뿌리내리게 될 기회라고 전망한 바 있다.

한국의 상업영화는 세계 영화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을 롤 모델로 삼고 발전해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영화 스태프의 노동 여건에서 많은 개선이 있었고, 현재도 3D 입체영화 제작, 더 정교한 모션 캡처 등 첨단 기술과 제작 시스템을 한국영화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한국영화 특유의 일부 노하우와 시스템이 할리우드의 그것보다 장점이 많다며, 그들이 한국 방식을 도입하는 경우도 생겼다.


① 할리우드의 네트워크 시스템 - ‘파워 런치’

1920년대 말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며 전성기를 맞이한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수천 명의 직원과 온갖 장비를 갖추고, 극장 체인까지 소유한 수직적 통합 구조를 갖췄다. 스태프는 물론 스타 배우와 감독도 모두 스튜디오에 전속시켜, 작가실의 시나리오가 형편없으면 톱스타를 투입해 적당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완성만 하면 극장에서 상영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이처럼 스튜디오는 포드의 자동차 공장처럼 고도의 분업화, 집중화 방식으로 1년에 200~300편의 영화를 대량생산하고, 유통과 판매까지 독점해 큰 이윤을 취했다. 이에 1948년, 연방 대법원은 제작업을 하는 스튜디오가 극장을 소유하는 것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배급에 제동이 걸린 스튜디오는 물량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텔레비전까지 등장해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스튜디오는 많은 전속 배우와 제작 스태프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고, 나온 이들은 수많은 독립 제작사를 차렸다. 

이제 스튜디오는 라인업을 기획하고 배급하는 일에 주력한다. 스튜디오가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독립 제작사나 계열사에 아웃소싱을 하거나 공동 제작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대규모 제작진이 필요할 때는 해당 프로젝트에만 여러 독립 제작사들과 프리랜서들을 모았다가, 끝나면 다시 흩어지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MGM의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진=MGM)



네트워크 경제의 모델

새 시스템은, 기존에 경쟁하던 스튜디오의 전속 스타 등 고급 인재를 맘껏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프로젝트에 필요한 최적의 재능을 갖춘 인재만으로 프로젝트를 꾸리는 것이 가능해져 효율이 높아졌다. 재능 없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능력자들은 전보다 몸값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와 우수 인재들을 매칭하고, 계약 조건을 조정하고 스케줄을 관리하는 대행업(에이전시, 매니지먼트 회사)도 발달하게 되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스튜디오와 독립 제작사 및 에이전시, 그리고 우수 인재들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이렇게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전에 못지않은 대작 영화들을 계속 만들 수 있었고, 지금도 세계 영화시장에서 공고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소유의 종말’에서 “할리우드는 수직으로 통합된 고전적 거대 기업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네트워크 경제로 변신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지식 집약 산업이 할리우드와 똑같은 납작한 원자 상태로 해체될 것이다. 할리우드는 그저 가장 빨리 거기에 안착했을 뿐”이라며, 할리우드 경제가 맞이한 변화가 미래 경제 시스템의 모델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경제는 기민성과 유연성으로 리스크에 대응하고, 자발성과 창조성을 앞세워 첨단기술 중심의 경제에서 집단적 우위를 도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미래의 경영 시스템으로 평가되어 왔다. 또한 네트워크 시스템은 치밀하게 얽힌 관계망 속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그래서 재능 있는 전문적 인재가 많이 모여 있어 ‘판이 좁다’고 여겨지는 영화 산업에서 먼저 자리 잡으며 뚜렷한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스튜디오 관계자와 아웃소싱 회사, 우수한 프리랜서들 사이의 노동 시장은 할리우드의 다양한 사교 모임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잦다. 영화제와 시상식은 물론이고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각종 파티나 술자리 등에서 이들은 서로 인재를 추천하고, 기회를 제공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새 프로젝트를 위한 팀 구성을 시작한다.

특히 매일 점심시간이면 LA 일대 많은 레스토랑 테이블에서는 프로듀서가 작가를 소개받고, 촬영감독이 신형 카메라 테스트를 의뢰받고, 배우가 새 에이전시와의 계약을 논의하는 등의 미팅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심 미팅은 ‘파워 런치’로 일컬어지며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할리우드의 네트워크 시스템의 바탕을 이룬다.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코리아가 투자·제작한 영화 '슬로우 비디오'. (사진=20세기폭스코리아)



② 한국영화의 시스템 - 1인 영화사

한국의 영화시장은 현재 세계 10위권에서 점점 상승하고 있지만, 매출 규모에서는 여전히 할리우드와 비교가 안 된다. 역대 국내 흥행 1위를 기록한 ‘명량’의 매출액이 1357억 5332만 원인데, 현재 세계 각국의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인 ‘닥터 스트레인지’가 개봉 1~2주(국내 10월 26일 개봉, 북미 11월 4일 개봉) 만에 올린 매출액은 3919억 5139만 원에 달한다.

시장 규모의 차이는 기업의 역량에 반영되었다. 한국의 영화사는 아무리 4대 메이저라고 해도 스튜디오나 제작 장비를 소유하는 데 한계가 있고 전속 스태프를 거느릴 만큼 영화를 많이 만들 수도 없다. 한국 영화계에는 일찌감치 네트워크 시스템이 자리 잡았고, 관계망은 할리우드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끈끈했다. 김호성 FIP 코리아 대표는 이를 두고 한국영화가 ‘산업’이 되기 전 ‘영화판’이던 시절이라고 표현했고,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충무로라는 동네 이름이 한국 영화판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4대 메이저 영화사인 대기업들이 시장을 주름잡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영화산업의 저변을 굴리는 것은 수많은 중소 영화사고, 이들 대부분은 영세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획, 빠른 자금회전, 그리고 네트워크다. 

FIP 코리아와 손을 잡고 ‘슬로우 비디오’를 제작한 영화사 ‘기쁜우리젊은날’은 평소 유재혁 대표 혼자인 것과 다름없는 회사다. 평소에 그는 주로 작가·감독·프로듀서 등과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에 집중하는데, 당장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무실조차 운영하지 않고, 직원도 없다. 유 대표는 “이 근처에 그런 사람(영화인)들 나 말고도 많더라”며 웃었다.


1인 영화사는 “소유 아닌 접속의 경제”

스마트폰만 있으면 충분하다. 영화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강남 일대의 카페나 식당 등에서 미팅을 하고,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업무를 보면 된다. 회계 업무도 직접 해내야 하지만, 필요할 때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면, 사무용 집기와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쾌적한 사무실을 필요한 기간만큼만 임대하는 전문 서비스도 있다. 리프킨이 말한 “소유가 아닌 접속의 경제”가 서울 강남에선 흔한 일이었다.

작은 영화사다 보니 동시에 여러 작품을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공백기가 길면 자금의 회전이 느리고, 간접비 지출의 비중이 늘어나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유 대표는 프로젝트가 확정된 후에는 일이 최대한 빨리 진행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FIP 코리아와 ‘슬로우 비디오’를 함께 하던 당시, 꼼꼼하게 계약서를 작성하고 검토하는 할리우드 방식이 부담스러웠다고 유 대표는 밝혔다. ‘런닝맨’이 FIP와의 첫 미팅 이후 계약 체결까지 1년이 걸렸고, 이후 ‘슬로우 비디오’는 그 기간이 4개월로 줄었는데도 유 대표에게는 초조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유 대표에 따르면, 한국은 ‘판’이 좁고, 어지간하면 여러 번 얼굴을 본 사이들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친분에 호소해서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얘기했다. “우리랑 할 거야 말 거야? 안 할 거면 빨리 말 해줘야 다른 데를 알아봐”라며 계약부터 먼저 하고, 제작비를 지급받아 집행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나머지 세부 조건은 천천히 조정하는 등 서로 편의를 봐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관행은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의 막연한 호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김호성 대표의 말처럼 “한국 영화산업에 자금 흐름이 비교적 투명하게 추적되는 신뢰할만한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폭스써치라이트 제작,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연출작 '스토커'(2013). (사진=20세기폭스)



③ 할리우드와 한국영화의 제작현장 차이

스토리보드와 현장편집의 활용

할리우드에서 ‘스토커’를 연출한 박찬욱 감독은 2012년 한 무대 인사에서 할리우드와 한국의 제작 방식 차이를 확인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프리프로덕션 당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로부터 “영화의 모든 컷을 스토리보드로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때부터 모든 영화를 찍을 때 전체에 스토리보드를 완성해 놓고 촬영에 들어갔다. 그의 스토리보드를 주로 그린 스토리보드 작가는 ‘콘티 브라더스’라는 팀이고,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도 함께 작업했다.

그런데 막상 할리우드 스태프는 박 감독의 꼼꼼한 스토리보드를 놀랜 눈으로 쳐다봤다. 할리우드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장면이나 각 씬의 핵심 이미지만 스토리보드로 제작하기 때문이었다.

‘스토커’의 주인공인 미아 와시코브스카도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찍는 방식은 정말 놀랍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다”며 “앞으로 찍어야 할 장면들이 스토리보드로 완벽하게 작성되어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디테일한 연출 방식 때문에 ‘봉테일’이라는 별칭이 붙은 봉준호 감독도 ‘설국열차’ 촬영 전에 그린 완벽한 스토리보드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화제가 되었다.

‘설국열차’의 주인공인 크리스 에반스는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스토리보드가 이미 머릿속에 다 있고 편집이 돼 있더라”며 “레벨이 다른 천재”라고 극찬했다. 그는 “집을 지을 때 못을 한 포대씩 사는 것이 아니라 ‘못이 53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셈”이라며 “완전히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스토리보드

▲콘티브라더스가 그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스토리보드 일부. (출처='올드보이' 10주년 기념 블루레이)


스토리보드를 활용한다는 것은 편집에 필요한 쇼트(카메라 셔터를 한 번 켰다가 끌 때까지 기록되는 단위)만 촬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A와 B라는, 두 사람의 1분짜리 대화 장면을 찍는다고 하자. 일반적인 할리우드 현장에서는 먼저 와이드 앵글로 A와 B를 한 화면에 담고, 두 배우가 해당 장면 전체를 연기하는 1분짜리 쇼트를 찍는다. 그런 다음 인물 A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옮긴 뒤 해당 장면을 다시 전부 연기하며 또 1분을 찍는다. 다음에는 인물 B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반복. 이런 식으로 같은 연기를 앵글만 바꿔가며 여러 번 찍은 뒤, 편집할 때 감정과 리듬에 따라 각 쇼트를 자르고 붙여서 1분짜리 장면을 완성한다.

NG가 한 번도 나지 않으면 촬영 분량은 최소한 3분(3개의 쇼트) 분량이다. 필름을 사용하던 시절 필름 값만 따져도, 3분 분량을 찍어서 1분짜리 편집본을 만드는 데 수십만 원이 든다.

스토리보드를 활용해서 같은 장면을 찍는다면, 비용이 최대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두 사람이 1분 동안 대사 몇 마디를 주고받는데, 각 대사에 어떤 앵글을 사용할지를 미리 정해 둔다면, 현장에서는 정해진 앵글에서 필요한 대사만 연기하면 된다.

역시 한 번도 NG가 안 난다면, 촬영 분량은 몇 개 쇼트로 찍건 다 합쳐서 1분 정도의 분량이다. 1분 분량을 촬영해서 1분 분량의 편집본을 만드는 것이므로 비용도 절반이 드는 셈이다. (단, 배우의 감정 문제는 별개로 다룬다)

제작비가 넉넉하면 필름 걱정 없이 카메라 여러 대를 다양한 앵글로 배치, 단 한 번 연기로 한꺼번에 촬영할 수도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하드디스크에 기록하는 요즘은 이런 방식이 더 선호된다. 한 번 세팅해서 한 번 촬영으로 끝나니 비용은 더 절약되고, 편집에 쓸 촬영 소스는 더 많아지고, 모든 촬영 소스에 담긴 연기도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규모 전투 장면처럼 인물과 도구가 많이 등장하고 동선과 액션이 복잡하다면 얘기가 다르다. 많은 카메라가 있어도 한꺼번에 세팅하기는 곤란하고, 수많은 배우와 엑스트라를 데리고 촬영을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없다. 이럴 때는 감독과 촬영감독, 편집자 등이 머리를 맞대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꼭 필요한 앵글들을 결정해서 편집 순서대로 미리 배치해보는 과정이 필수다.


현장편집

할리우드의 제작 노하우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할리우드에선 생소한 기법 중에는 ‘현장편집’도 있다. 할리우드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서부극 ‘라스트 스탠드’를 연출하고 돌아온 김지운 감독은 2013년 한 인터뷰에서 “‘라스트 스탠드’ 현장의 최고 히트상품은 바로 현장편집”이라고 언급했다. 한국에서 동행한 일부 주요 스태프에 김지용 촬영감독 외에도 양진모 현장편집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영화 현장뿐 아니라 CF, 뮤직비디오 등에서도 흔히 두는 것이 현장편집이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의 인터뷰에서는 정작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왜 현장편집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촬영장에서 현장편집을 보더니 얼굴색이 밝아졌다”며 “양진모 기사가 워낙 손도 빠르고 편집감도 뛰어나고 간단한 사운드나 특수효과 같은 걸 바로바로 붙여서 보여주는 서비스도 해주니 동공이 커지더라. 포레스트 휘태커는 모니터 체크하려고 왔다가, 방금 자기가 찍은 장면이 편집되어 있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계속 ‘이거 완전 미쳤어. 정말 굉장해’ 하며 바로 다음에 자기가 찍을 영화에 양진모 기사를 섭외했다”고 밝혔다.

현장편집기사는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에 담기는 영상을 현장편집 장비(대개 노트북)에 받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해당 씬을 최종 편집본에 가깝게 이어 붙여서, 감독과 배우 및 스태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방금 찍은 장면의 느낌을 확인하고, 다음 촬영을 진행하는 데 참고할 수 있게 한다.

저예산 단편영화부터 장편 상업영화까지 두루 경험한 한국영화 프로듀서 L 씨는, “현장편집이 있으면 한 장소에서 철수하기 전에 필요한 모든 장면이 잘 찍혔는지, 아쉬운 점이 없는지 등을 파악하기 쉽다”며 “누락된 장면, 잘못 찍은 장면이 나중에 발견돼서 보충촬영 비용이 발생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어 제작비와 일정 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장에서 다양한 편집 방식을 미리 적용해 보면, 감독이나 배우가 예정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한다”며 창의적인 면에 이바지하는 바가 크다고 시사했다. 또 “노트북과 케이블 외에는 따로 장비가 필요 없어서 요즘은 학생들도 현장편집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현장.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몹씬. (사진=워너브러더스)



철저한 일정 관리로 비용 절감

할리우드가 스토리보드와 현장편집을 많이 활용하지 않은 것은 필름 값이 만만해서가 아니다. 할리우드 현장에는 한국영화 현장보다 몇 배나 많은 스태프가 동원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대단히 세분화되어 있으며, 철저한 분업에 익숙하다. 따라서 스토리보드가 없이 여러 번 같은 장면을 반복해 찍으며 시간과 필름을 들이더라도, 다른 식으로 시간과 비용을 최소화하는 노하우가 있다. 

LA에서 파라마운트가 제작하는 영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영화인 J 씨는 “할리우드 현장에는 촬영 당일의 스케줄 진행만 철저히 관리하는 담당 스태프가 따로 있다”고 전했다. 점심시간이나 일과 종료시간 등, 예정된 시간을 넘겨서 촬영이 계속되면 제작자는 전 스태프에게 벌금을 물어야 하고, 또 일과 이후에는 시간당 두 배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정 관리는 결국 비용과 관련된 리스크를 줄이려는 방안이다. 이병헌은 ‘지 아이 조 2’ 촬영 당시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해 “하루에 어마어마한 촬영비가 드는 시스템이라서 배우는 아프거나 어디가 부러져도 현장에 오긴 와야 한다”며 “효율적이지만 무서운 시스템”이라고 주인공으로서 느끼는 부담감을 표현했다. ‘설국열차’로 할리우드 시스템을 경험한 송강호도 이병헌에 공감한다며 “군 말년에 떨어진 낙엽도 조심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도 4개월을 그런 기분으로 보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케일이 다르다” 할리우드 현장 규모


최근 할리우드 영화 엔딩 크레딧 말미에는 해당 영화가 수천 개의 일자리 창출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 포함되곤 한다. LA에서 파라마운트 제작 영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J 씨는 “현장 인원만 수백 명일 때도 있다”며 “숫자보다, 그 많은 사람이 매우 체계적, 효율적으로 일해서 인력이나 비용 낭비가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다”고 설명했다. J 씨가 경험한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한다.


J는 여느 때처럼 차를 몰고 현장으로 출근했다. 오늘 촬영 장소는 LA 외곽의 공업단지와 사막이 만나는 지역으로, 대략 경복궁에서 파주 정도의 거리다. 공업단지에 들어서면 큰 공장들 사이에 축구장보다 넓은 공터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중 한 공터에 오늘의 스태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국에선 거의 모든 사람이 차를 가지고 다니므로, 스튜디오가 아닌 로케이션(현장) 촬영을 하려면 촬영장 인근에 수백 명의 스태프와 배우가 차를 세울 주차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다. 주연배우와 감독, 프로듀서 등은 촬영장소 바로 옆까지 차를 가져갈 수 있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1km 이상 떨어진 대규모 주차장에 집합한다. J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 주차장에서 촬영장을 온종일 오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촬영장 옆에 내린 J는 일단 아침을 먹기 위해 밥차를 찾았다. 우리나라 현장도 밥차가 있지만, 할리우드 밥차는 규모가 다르다. 식권도 살 필요 없이 그냥 줄을 서서 식사를 받은 뒤, 야외의 간이 테이블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를 그린 코엔 형제의 영화 '헤일! 시저'의 한 장면. (사진=유니버설스튜디오)


팀 동료에게 어디냐고, 나는 식사 마치고 간다고 문자를 보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따라 낯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에 워낙 많은 팀이 섞여 있는 데다 어제와 오늘 일하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나가던 제작팀 스태프가 식사 중인 스태프들에게 오늘 촬영 스케줄 표를 나눠주고 있었다. J는 이걸 받아서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식사를 마친 J는 줄지어 있는 온갖 트레일러와 천막들을 지나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메인 카메라가 겨냥하고 있는 자리에 주연배우가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맷 데이먼이었다. J는 맷 데이먼을 보고 나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여긴 남의 촬영장이었다.


동료에게 전화해보니 오늘 그 인근에서 촬영하는 영화가 세 편이나 된다고 한다. J가 차를 세운 주차장은 다른 영화의 주차장이었고, 남의 셔틀버스를 타고 남의 식량까지 축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J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J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J는 유유히 셔틀을 타고 스태프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차를 몰고 다른 주차장을 찾았다. 여기가 맞는지 확신이 없었는데, 셔틀버스 기사님 얼굴이 낯이 익어 안심했다. 겨우 도착한 촬영장은 J의 영화 촬영장이 맞았다. 그리고 그곳 역시 낯선 얼굴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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