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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이든, 박성진의 창조‘신앙’이든…팩트 무시하고 도약하는 인물이 과기행정 맡아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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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53호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2017.09.15 11:19:11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스포츠 중계가 그렇듯, ‘라이브(생중계)’라야 흥미진진하고 녹화방송은 재미가 없는데, 녹화방송 같은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박성진 중소벤처부 장관 후보자 때문에 또다시 언론 전면에 등장한 창조론 얘기를 하자니, 먼지 묻은 VCR 녹화기를 다시 꺼내는 기분입니다. 

박성진 장관 후보자를 놓고 “생활보수”니 하는 이상한 신조어까지 등장했지만, 다 부질없는 얘기고, 이 칼럼에서는 왜 창조론이 말이 안 되는지, 아니 하나의 ‘론(theory)’도 되지 않는지를, 낡은 사진첩을 정리하듯 정리해보겠습니다. 

좀 지났지만, 2009년 영국에서 영화 ‘창조(Creation)’가 개봉됐습니다.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의 인생과 그 고뇌(당시 기독교가 지배하던 영국에서 ‘하느님의 만물 창조’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진화론을 내놓기까지의)를 그린 영화라서 꽤 화제가 됐습니다. 진화론의 주인공인 다윈의 일대기에 ‘창조’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얄궂기도 하지요. 

▲2009년 영화 'Creation'의 포스터.

당시 영화 개봉을 앞두고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논쟁이 새삼 화제가 되자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래프 신문은 창조론의 대표적 주장 5가지를 들고 이에 대한 진화론 쪽의 답변을 정리해줬습니다. 

참, 논점에 들어가기 전에 용어를 바로잡습니다. 한국말로는 ‘진화론 대 창조론’으로 라임이 딱딱 맞습니다. 하지만 그 번역어의 원전인 영어로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다음이든 네이버든 들어가서 ‘창조론’ 또는 ‘진화론’을 쳐보면 양대 포털에 약간의 차이가 발견됩니다. 한 포털에서는 ‘창조론’이라는 표제어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다른 포털에서는 ‘창조론’이라고 쳐도 ‘창조주의’에 대한 설명만이 나옵니다. 

집단지성이 만드는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면 이런 용어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위키피디아 한글판에서 창조론을 치면 바로 ‘창조주의’로 연결됩니다. 창조론이라는 표제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창조론은 영어로 Creationism입니다. 진화론은 Evolutionary Theory이고요. ~ism으로 끝나는 단어는 많지만 대개 ~주의로 번역돼 학파, 사조, 정신적인 지향 등을 표현합니다. 반대로 Theory는 이론이고, 학문 체계에서는 제대로 틀을 갖춘 학문적 이론에 붙여주는 단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창조주의라는 건, ‘론’ 자를 붙이기 힘든 주장이고(과학적 바탕이 빈약하기에), 진화론은 과학적 설명 체계를 갖춘 정식 학설이라는 소리지요.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는 '창조론'이란 항목이 없다. 창조론으로 검색하면 바로 '창조주의' 항목으로 연결된다.


위키피디아의 표제어를 봐도 진화론 쪽에는 evoltionary~로 시작하는 여러 다른 항목들(예컨대 진화심리학, 진화역사학 등)이 별도로 존재하지만, Creationism 항목은 달랑 하나입니다. 심지어 Creationism에 대한 설명의 첫 문장은 “Creationism can also refer to creation myths…(창조주의란 창조 신화-미신과 연결되기도 한다)”로 시작합니다. myth는 신화도 되지만 미신도 되지요. 

'창조론'이라는 단어를 추방한 위키피디아 한글판 

여기서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창조‘론’이라는 잘못된 번역이, 특히 동양에서 창조론이 진화론과 맞먹게 만들어놓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학자들이 필생의 과제로 생각하는 게 ‘이론 세우기’입니다. 수미일관하게 체제를 갖춰 하나의 학설(theory)로 내놓기는 힘들기에, 사실 학설을 세운 한국 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한국의 교수 사회가 구미 또는 일본의 학술계에 사대주의적으로 종속돼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창조론이라는 잘못 번역된 단어를 폐기하고 창조주의로 통일하겠습니다. 2009년 데일리 텔리그래프가 다룬 창조주의의 5가지 주장을 들어봅시다.

주장 1. 진화의 증거가 없다: 

이 주장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화론은 생선이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고, 파충류가 새와 포유류가 됐다고 논증하지만, 그 각각의 모든 단계의 화석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생선이 양서류로 바뀔 때의 화석 증거를 대라”는 주장입니다. 

진화의 모든 단계에 대한 화석 증거를 내놓으라는 게 창조주의자들의 요구지만, 동물의 뼈나 식물의 재질이 모두 영원히 썩지 않는 종류가 아닌 이상, 모든 단계의 화석이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화석으로 남는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남지 않으니까요. 이를 팟캐스트 ‘나꼼수’의 멤버였던 김용민 목사는 책 ‘한국 종교가 창피하다’(2013년)에서 “진화론의 허구가 창조주의의 과학적 사실 입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고, 변희재의 정당성이 입증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라고 표현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는 전후 순서나 논리에 상관없이 ‘북한에서 하는 걸 남한에서도 하면 그게 바로 종북’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사회의 극히 일부분에서, 특히 이른바 상층부에서 통용됩니다. 예컨대 ‘이승만은 독재자였다’고 비판하면, 이승만이 독재자였는지 아니였는지를 따지는 게 순서이지만, 그런 객관적인 판단은 집어치우고 “어? 북한에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비난했는데 당신은 그것과 같은 얘기를 했으니 종북”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이지요. 이런 식의 논리라면 북한에서 영어 공부를 시키는데 남한에서도 영어 공부를 시키면 종북이 되고, ‘진중권이 잘못하면 변희재가 맞는’ 요상한 세상이 되지요. 창조주의는 창조주의대로 논증을 하고, 진화론은 진화론대로 논증을 하면 되는데,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모든 단계의 화석이 존재하지 않으니 “100% 틀렸다”고 우기는 식이지요. 

주장 2. “진화론이 주장하듯 지구의 역사가 45억 년쯤 된다면 더욱 많은 화석이 나와야 할 텐데 그렇지 않지 않느냐. 석기시대의 유골만도 수십억 개가 나와야 하고, 동굴 속 벽화도 더 나와야 하고, 바다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소금이 있어야 하며, 바다 속 침전층도 엄청 두꺼워야 할 것 아니냐?”

9월 1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병관 민주당 의원이 “창조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하는데 동의하느냐”고 묻자 박성진 후보자가 “동의하지 않지만 신앙으로는 믿고 있다”고 답변한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서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한 진화론자의 대답은 “박물관 가서 증거를 보고 말해라”라고 데일리 텔리그래프 기사는 소개합니다. 진화의 모든 단계가 화석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수집-연구된 증거들이 박물관에 굉장히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은 머릿속에서 상상된 자연의 추상화가 아니다. 수많은 물적 자료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돼 있다”는 게 진화론의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각기 다르게 진화했지만 공통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진화론 과학자들의 논증.(이미지=위키피디아)


지구의 나이에 대한 고민으로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프랑스의 천재 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집트의 역사가 기원 전 4000년까지, 즉 자신의 시대보다 거의 6000년 이상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 기독교의 세계 인식은 ‘지구는 생긴 지 4천 년이 됐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샹폴리옹은 자신의 과학적 발견 사실은 한 동안 숨겼다고 합니다. 종교적 파문을 두려워한 것이지요. 이런 게 바로 종교적 도그마의 세계입니다. 샹폴리옹이나 다윈은 숨기기는 했지만,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팩트를 제쳐놓고 “그래도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양심있는 학자라면 이런 팩트 체크는 해야 맞지, 과학적 팩트를 무시하는 몰과학적인 주장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주장 3. “인간의 눈, 파리의 눈처럼 정교한 것이 어떻게 저절로 만들어지냐?”: 

눈처럼 정교한 것이 저절로 만들어질 리가 없으니 그 배후에 주도면밀한 설계자(즉 하나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수많은 홑눈이 모여 만들어지는 파리의 겹눈(compound eye)은 너무 정교하고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어 이런 게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창조주의의 주장입니다. 속세의 위키피디아를 본 떠 만들었다는 창조주의 위키(CreationWiki.org)에는 그래서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만물을 창조했으리라는 여러 특징들을 겹눈은 완벽하게 모두 갖고 있어서 자연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기 힘들다”고 써 놓았답니다.

▲수많은 홑눈이 모여 만들어지는 등에의 겹눈. 대단히 정교하고 어둠에서도 잘 볼 수 있다는 등의 특징을 겹눈은 갖고 있다.(사진=위키피디아)

이에 대한 진화론의 답변은 “논문 좀 읽어라, 제발”이랍니다.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수많은 논문과 실험으로 뒷받침되기에 세계의 과학계가 진화론을 정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계 모든 종교 단체의 절반 이상이 진화론을 인정한다니, 종교를 믿는다고 반드시 창조주의 주장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물이 진화한다는 걸 받아들인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요,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앙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창조주의자들이 ‘눈이라는 기적’을 물고늘어지는 베경에는, 눈은 썩어 없어지기에 화석 증거가 남기 힘들다는 ‘장점’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기적 유전자’를 쓴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눈이 생기는 과정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아주 길고 자세하게 써 놓았지요. 그 요지는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는 아주 원시적인 세포가 생겨나면 그런 감지 세포를 가진 동물은 생존율이 높아지기에 살아남고 후손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점점 진화하면서 파리의 겹눈처럼 고도로 발달한 눈이 생기게 된다는 논증입니다. 

눈이 진화했다는 증거 중 하나로는 ‘사람 눈의 불완전성’도 거론됩니다. 사람의 망막에는 영상이 맺혀도 시신경이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맹점(blind spot)이 있는데, 사람의 눈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오징어의 눈에는 이런 맹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능한 신은 왜 자신을 닮게 만들었다는 인간의 눈에는 바보 같은 맹점을 집어놓고, 하등동물인 오징어의 눈에는 맹점 하나 없이 완전한 망막을 만들어줬을까요? ‘불완전한 신’ 또는 ‘심술궂은 신’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신의 눈 자체에 하자가 있어서 그랬던 걸까요?

▲속세의 위키피디아에 대항해 창조주의의 온라인 백과사전을 지향하는 CreationWiki.org의 페이지.


도킨스 등 진화학자들은 이렇게 진화의 실수가 남아 있는 이유는 일단 진화가 시작된 뒤에는 문제점이 발견돼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인간 망막의 맹점처럼 진화의 흔적이 남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화석으로 남지 않은 사람 눈에 대해서도 유전자, 분자생물학 수준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돼 있다고 합니다. 

주장 4. “성경은 비유다”: 

성경에 나온 예수의 계보도를 계산해보니 지구의 창조 날이 6000년 전이라는 게 ‘지구 나이 6000년 설’의 시작입니다. 과학적으로 측정되는 지구의 나이 45억 년에 비해 이 6000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짧다는 과학계의 공격을 당해내기 힘들게 되자 창조주의자들로부터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지 말고, 비유로 읽으라”는 주장이 나왔다는 소리입니다. 즉. 성경에는 하느님이 6일 만에 창조를 마쳤다고 나와 있지만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6개의 시대’에 걸쳐 창조했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랍니다. 

이에 대한 진화론의 답변에 대해 해당 기사는 “창작은 이제 좀 그만 하고 증거를 내놓으셔”라고 전합니다. 육 일이든, 여섯 시대든 그건 창조주의자들이 증명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창조주의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론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덕에 지구 생물체가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모두 살아남았다면 과연 지구의 모든 생물을 담을 정도의 배라면 그 사이즈는 얼마나 컸어야 했는지, 그 배의 구조 또한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대단히 복잡했어야 할 텐데, 재밌는 이야기만 만들어내지 말고 노아의 방주의 증거를 뭔가 하나라도 대달라”는 주문이랍니다. 

▲지구의 모든 생물 종을 한 배에 담으려면 도대체 그 배의 크기는 얼마나 커야 할까? 노아의 방주를 그린 미국 화가 에드워드 힉스의 1846년 그림.(사진=위키피디아)


언제는 성경 구절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며 ‘창조는 6일간’이라고 하더니 이제 그렇게 곧이곧대로 읽으면 곤란하니 여섯 시대에 걸치는 기간의 비유로 읽어달라는 주문에서도 창조주의가 어차피 과학이 아니고 말 만들기의 세계라는 증거가 드러난다는 지적입니다. 

주장 5. “도대체 진화론의 목적이 뭐야?”: 

기독교적 세계관은,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즉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어떤 목적이 있음을 주장하는데 도대체 인간이 원숭이에서 나왔다는 진화론의 주장은 왜 하는 것이며, 도대체 그 목적이 뭐냐?라는 질문이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이어 목적론적 세계관을 견지한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미지=위키피디아)

이에 대한 진화론 측의 답변은 “목적론적 세계관은 이제 그만”이랍니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면서 동시에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에 맹위를 떨친 역사관입니다. 기독교적 역사관은 세상의 시작(창조)과 끝(예수의 부활과 최후 심판의 날)을 상정합니다. 시작과 끝을 상정하는 건,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공산주의(원시공산사회로 시작했고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완결된다는)와 구조가 똑같지요.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구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구조를 차용했고, 레닌은 볼셰비키 당조직을 구상하면서 가톨릭교단의 구조를 많이 참조했다니, 참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숙적치고는 비슷한 점도 많은 듯합니다.       

목적론적 세계관과 죽음의 도약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정말 계속 질문이 일어납니다. 세상을 시작한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으며, 그 창조주의 창조주는 또 누구인지…. 또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종말의 그 다음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등등. 18세기 계몽주의라는 시효가 다 끝난 세계관을 붙잡고 “네 목적이 도대체 뭐야?”라는 시대착오적인 질문을 창조주의자들이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요? 생물체는 그저 생겨나서 살 뿐이며, “진화에 목적은 없다”고 하니 진화론은, 요즘말로 치면 쿨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도약’ 또는 ‘결사적 도약’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일본의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를 ‘일본처럼 싸워서 이길지 질지는 모르지만 일단 세계 최강대국을 먼저 공격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보는’(저서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했고,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키에르케고르는 동시대적으로, 즉 사전에 그것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초라한 인간 예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목숨을 건 도약으로서의 신앙’(저서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맑스’에서)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간의 인지력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난제 앞에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도움닫기를 하고보는 게 바로 ‘죽음의 도약’이라는 겁니다. 과학적 데이터와 창조주의적 신앙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눈 찔끔 감고 무작정 건너뛰려고 죽음의 도약을 하면 기다리는 건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얘기 같습니다.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선 이른바 ‘원숭이 재판’이 벌어집니다. 당시 법을 어기고 고교 교실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과학교사 존 스콥스와, 기독교근본주의를 대표하는 당대의 중진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진화론과 창조주의를 대변해 법정 대결까지 펼친 내용입니다. 당시 테네시 주 법률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지만 스콥스는 이를 어겼고 벌금형까지 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은 미 전역에 라디오 생중계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고, 유럽인들은 이 어이없는 재판을 대형 코미디로 구경했다는 얘기지요.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의 야외에서 열리고 있는 이른바 '원숭이 재판' 장면. 미국인의 관심과 열기가 너무 뜨거워 재판은 법정을 벗어나 넓은 야외에서 개최될 정도였다. 그러나 유럽의 버나드 쇼 등은 '세계적 조롱거리'라며 비웃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 재판의 결과 미국 교과서에서는 창조주의가 사라지고 진화론만 기술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무지한 촌사람들과 동의어가 됐다”고 토마스 프랭크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갈라파고스 출판사, 2012년)에서 소개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문필가 조지 버나드 쇼는 이 재판에 대해 “단 하나의 주 때문에 미 대륙 전체가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또한 단 한 사람 때문에 미국이 진정 문명화된 나라인지 아닌지 유럽이 의문을 갖게 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테네시 주와 브라이언은 이 두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비꽜습니다. 이처럼 창조주의라는 주장과, 진화론이라는 학문 사이의 대결은 미국 법정을 거쳐 이미 100년 전에 판가름이 났습니다.  

▲진화론을 발표한 뒤 '원숭이 인간'으로 조롱받은 찰스 다윈에 대한 캐리커처(1871년).(사진=위키피디아)

앞에서 찰스 다윈 얘기를 했지만 다윈은 진화론 체계를 완성해 놓고도 21년이나 이를 발표하지 않고 숨겼다고 합니다. 이유는 샹폴리옹처럼 기독교가 무서워서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정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설이었으며, 하나님이 한 번에 다 만들었으므로, 개면 개, 소면 소 식으로 딱딱 종별로 계획표대로 만들어냈어야 맞지, 늑대를 만들었는데 그로부터 개가 나왔고, 늑대는 다시 뭍으로 기어 올라온 물고기에서 진화했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완전히 부정하니 미친 짓으로 저주받기에 충분했다는 것이지요. 

다윈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신이 세상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해 가면서 자신의 기독교 종교심이 엷어져가는 것을 괴로워했답니다. 

다윈(1809~1882년)의 고민은 19세기의 것이고, 미국의 원숭이 재판이 유럽인들에게 희대의 웃음거리가 된 게 벌써 100년 전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여의도에서는 “창조과학 관련 세미나를 하고 소개를 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연구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고 아리송한 대답을 하는 장관 후보자를 놓고 여야가 싸우고 있으니, 참으로 이 나라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버릇(DNA)만큼은 확실히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화론과 창조주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틀리며, 어느 정도 틀리는 게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회복 불가능하게 틀리다”고 주장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 “믿기는 하지만 연구하지는 않는다”든지, “그것도 틀리지 않지만, 이것도 틀리지 않은 거 아니냐”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런던의 무신론 홍보 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한 리처드 도킨스(오른쪽). 그는 "진화론과 창조론 중 어느 하나만 택할 수 있지 양다리를 걸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사진=위키피디아)


박성진 후보자는 2013년 미국에서 열린 ‘ICC(국제 창조론 콘퍼런스)’를 소개하는 글을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노아 홍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근래 들어서는 노아 홍수가 많은 비로 인한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큰 지질학적, 더 나아가서는 우주적 격변이 있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고 썼으면서도, 인사청문회에서는 “기독교 신자로서 ‘창조론’을 믿는 게 아니라 ‘창조 신앙’을 믿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창조과학을 연구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도킨스가 이 말을 듣는다면, “역시 한국은 술 마시고 운전해도 음주운전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 때 정치에 개입해도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판결을 받기도 하는 참으로 창조적인 나라”라고 할 것 같으니 그저 얼굴이 뜨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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