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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차이나 광주’와 ‘재팬 부산’ 중 누가 더 재미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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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63호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2017.11.24 12:51:28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현재 북한 핵을 둘러싸고 동북아 국제정치에서는 미-일과 중국 사이에 ‘한국 끌어당기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일 입장에서는 한국을 끌어들여 미-일-한 군사 동맹을 맺어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할 수 있는 반면, 중국 입장에서는 이런 봉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끼인 한국 신세를 흔히 ‘샌드위치 신세’라고 자조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정세를 잘못 판단하는, 즉 상황을 수세적-비관적으로만 보는 견해라고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미-중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입장이기 때문에, 두 초강대국 모두로부터 존중받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깨달음은, 임진왜란 연구자인 김시덕 교수의 책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서 얻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한반도의 발언권은 극히 미약했다. 그러나 일본이 등장하면서 한반도 국가는 비로소 대륙세력과 교섭할 수 있는 카드를 갖게 되었다. [중략] 신숙주는 사실 탁월한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해동제국기’에서 앞으로 일본이 대두할 것이고 이는 장차 한반도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견했다"(10쪽)고 썼다.

일본의 발흥 이전만 해도 한반도는 그저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대륙의 끄트머리에 불과했지만, 일본이라는 신흥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샌드위치의 두 빵 사이에 낀 달콤한 크림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는 해석이다.  

서세동점 시기에 한중일을 본 서구인들의 시각은?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19세기에 당시 동북아를 찾아온 서유럽 사람들의 방문기 등을 보면 중-일-한 3국을 그들이 각기 다르게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중국은 전통의 강대국이자, ‘18세기까지 물질적으로 선진이었던 아시아’(박홍규 저 ‘세상을 바꾼 자본’ 46쪽)이었기에, 영국-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을 흘리긴 했지만, 한 입에 집어삼킬 마음을 먹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강대한 나라였다. 

영국은 [중략] 중국으로부터는 여전히 대량의 차와 도자기를 수입했다. [중략] 그래서 중국에게 지불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해 중국에 수출했고 (‘세상을 바꾼 자본’ 147쪽)

중국과의 무역수지가 만성 적자였지만, 영국 물건 중 중국에 수출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인도에서 아편을 키워 팔아야 했다니, 아편전쟁이 일어난 1840년까지만 해도 적어도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 측면에서는 영국은 중국의 상대가 안 되는 경제 후진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니, 군사력 측면에서만 영국이 강자였다.   

중국은 "너무 큰 떡", 일본은 "딱딱한 떡"

중국이 너무 크고 경제적으로도 강한 나라였기에 서구 강대국들은 ‘여러 나라가 연합해 공격해 조금씩 나눠 먹자’ 전략으로 덤벼들기 시작했음은, 그 뒤 1900년의 의화단 사건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이 ‘너무 큰 떡’이었다면, 일본은 ‘먹기엔 너무 딱딱한 떡’이었다고 할만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책 ‘더 콜디스트 윈터’를 쓴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이 책 97쪽에 ‘일본에 대한 감정에는 존경과 두려움이 교차했다’고 썼다. 
 
일본 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자신의 책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에서, 개화기 이전의 중국과 일본을 유럽인들이 어떻게 봤는지를 아래처럼 전했다.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들에게 중국과 일본의 관료제-가족제도 등은 경탄의 대상이 되고 변혁의 모범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18세기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중국을 이상적인 문명국으로 존중하는 중국 예찬(chinoiserie)이 유포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크리스트 교회나 구 체제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157쪽)  

18세기까지만 해도 동북아가 유럽보다 선진국이었다는 소리이고, 특히 일찍이 1543년부터 포르투갈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해온 일본은(이 루트를 통해 들여온 조총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반도는 쑥밭이 됐고), 벌써 16세기 당시부터 시장경제가 꽤 발달한 나라였다.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만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무사(사무라이)들이 칼을 차고 다니고 그 칼에 맞아 죽은 서양인들이 서구와 일본의 접촉 초기부터 등장하면서 서구인들이 겁을 먹을 만한 요소가 있었다.

▲1862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에 일본대사관 직원으로 파견된 후쿠자와 유키치. "근대 국가를 만들지 못하면 서구에 먹힌다"는 그의 강력한 경고는 일본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 일본은 짧은 시간에 면목을 일신하고 제국주의 대열의 막차에 올라탄다. (사진=위키피디아)

더구나 일본에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년) 같은 좋게 말하면 선각자, 나쁘게 말하자면 국가주의자들이 나타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서양에게 먹힌다”며 부국강병을 역설하고, 근대국가로의 체제전환을 서둘러 1867년 메이지유신 뒤 짧은 기간에 일본을 제국주의 반열의 마지막에 올려놓는다. 

후쿠자와의 탈아론(脫亞論: 아시아를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도 “중국이나 조선처럼 보이면 일본도 서구 열강의 밥이 되니, 이웃나라와의 유대를 끊고 우리는 서구 열강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재촉이었고, 언론을 틀어쥔 후쿠자와 등의 몰아세움에 따라 일본은 근대국가로 모습을 일신한다. 

한국엔 떡 자체가 없었다고?

중국과 일본이 한 입에 먹기엔 너무 크거나 너무 딱딱한 나라였다면, 당시 조선은 어땠을까? 대표적인 뉴라이트 학자인 안병직은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일본 주재 영국 영사관이 조선에 대해 본국 정부에 올린 보고서 가운데 "저 나라에는 무역을 할 만한 것이 없다" [중략] 당시 서양인들은 동양의 차와 실크에 관심 많아 [중략] 조선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으니 [중략] 조선 왕조의 개항이 중국보다 36년, 일본보다 22년 늦어진 이유… (97쪽)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1492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도착 이후,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아시아로 달려온 이유는,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역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무역의 대상은 ‘작지만 비싼 것들’이었다. 수송에 경비가 많이 들었기에 가볍고 비싼 것이 아니면 무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찾기에 혈안이 된 것은 황금이었고, 아시아에서 탐낸 것은 중국의 차(tea)나 비단, 고가의 도자기 등이었다. 그런데, 상품경제-시장경제가 뒤처진 조선에서는 그런 고급 상품을 찾기 힘드니 서구 열강들은 ‘먹을 것 없는’ 조선 땅을 그냥 비켜지나갔다는 소리다. 이렇게 서구 열강이 비켜지나간 20~30년 뒤에야 조선은 탐심을 품은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흔히 한국인들은 한반도를 식민통치한 일본의 발흥을 원수처럼 여긴다. 아니 그렇게 여기도록 교육(세뇌)받아왔다. 그러나 일본의 발흥이 없었다면 한반도의 가치가 높아지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김시덕 교수의 지적은, 지금 2017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한-중-일 3국 방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샌드위치에선 양쪽의 빵보다 가운데 끼인 잼이 맛나잖아?" 

11월초 일-한-중 연쇄 방문에서 트럼프는 일본인 특유의 극진한 대접을 일본에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일본 총리를 노골적으로 홀대했다. 미국 언론조차 “아베는 트럼프의 조수役…전략적 노예상태”(워싱턴포스트)라고비판했다. 반면 특유의 튀는 발언으로 문재인정부에 타격을 가하지는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던 방한 일정 중 트럼프는 일본에서와는 정반대로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방일한 트럼프에게 극진한 대접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홀대만 받은 아베에 대해 ‘트럼프의 조수役…전략적 노예상태’라고 혹평한 워싱턴포스트의 온라인 지면.


18~19세기에 모든 걸 중국에 기대는, 중국의 속국이랄 수밖에 없는 조선이 존중을 받지 못했듯, 미국에 기대지 않고는 중국을 당해낼 수 없는 일본이 당하는 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트럼프의 문재인-한국 우대는 미-중 양강 사이에 알박기를 한 형세인 한국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위아래로든 아니면 양옆으로든 중간에 끼인 신세를 흔히 “샌드위치 신세”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조한다. 그러나 중간이 끼인 신세가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중간에서 제정신을 못 차리면 등 터진 새우 꼴이 되지만, 영특한 중간이라면 황금좌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덕분에 큰 부산은 일본인이 제발로 찾아오는 곳

이런 가운데, 한반도 남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위치한 부산광역시와 광주광역시가 자기 지역에서 가까운 중국 또는 일본을 상대로 활발한 유치-경협 활동을 펼치고 있어서, 그 귀추가 관심을 모은다. 

우선 부산이야말로 일본의 발흥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 대표적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부산포가 개항하면서 왜관(조선 시대에, 입국한 일본인들이 머물면서 외교적인 업무나 무역을 행하던 관사)이 개설된 것은 1423년(세종 5년)이었고, 이는 당시 발호하던 왜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상륙 포인트가 부산이었고, 전쟁 종결 뒤에도 일본과의 관계개선-무역을 위해 부산에 왜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1900년대 초의 부산항 모습. 일제강점기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이 대규모 투자를 하기 전의 모습이다.(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의 조선 강점 이후에 부산은 ‘일본인 최대 거주지’로서 철도 등 최신 시설이 지어지면서 한반도 최대-최신의 교통 요지가 된다. 특히 이런 현상은 일본이 만주국(1932~1945년)을 세운 뒤 더욱 두드러진다. 다음은 한석정 동아대 총장의 책 ‘만주 모던’에 나오는 1930년대 부산의 모습이다. 

당시 '동아의 관문'이라 불렸던 부산은 매년 각각 대륙과 일본으로 가는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열차와 배로 실어 날랐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특급열차 노조미와 히카리는 매년 속도를 경신해 펑텐, 신징, 하얼빈으로 향하며 동북아판 국제화 시대를 열었다.(64쪽) 

1936년 3월 '후산닛포'가 지령 1만호 기념사업인 '항港 릴레이', 즉 동군과 서군 기자단이 부산을 출발하여 동해안과 서해안 끝인 웅기와 진남포 항구들을 거쳐 항해하는 릴레이는 부산이 반도의 중심이란 걸 과시하는 행사였다. '후산닛포'도 조선과 일본 각지, 만주, 상하이로 지사를 늘려가며 국제적 신문사로 부상했다. 1932년에 부산을 통과하는 만주행 화물은 전년도보다 9배나 뛰어올랐다.(83쪽) 

총독부는 20세기 초부터 30년간 줄곧 부산의 도로, 항만, 상수도 기반을 닦았지만, 만주국 건국 후에 시작된 공사는 규모와 속도에서 그 수준을 능가했다.(85쪽)  

부산은 조선의 여타 도시와 다르게 총독부 소재지 경성을 우회하고 도쿄, 오사카, 펑텐, 신징 같은 대도시와 직접 접촉하기를 꿈꾼 제국 속의 '글로벌 시티'였다.(86쪽)  

1930년대에 부산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을 한 덩어리로 만들려는 노력이 해상, 육상, 해저, 상공에서 무서운 속도로 추진됐다.(87쪽)  

만주국-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일본제국 영역의 한가운데에 부산이 위치하고 그래서 일본제국주의는 부산을 철도와 해운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다는 증거들이다. 한반도의 도시 가운데 ‘영원한 수도’(“관습법으로 서울이 수도”라는 요상한 판결까지 있었으니) 서울의 위치를 넘봤던 유일한 도시가 부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다.

▲11월 22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대한민국 균형발전박람회'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왼쪽 다섯번째)가 전시물을 돌아보고 있다. 이에 앞서 11월 8일에서 부산시의 특별한 추진으로 이 장소에서 전국 3000여 대표가 모인 가운데 '지방분권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기도 했다.(사진=연합뉴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분권 개헌’을 약속한 뒤 지방 곳곳에서 지방분권 촉구 결의대회들이 연이어 열리고 있지만, 11월 8일 부산시의 특별한 추진으로 전국에서 3000여 대표가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었다는 데서도 ‘서울을 넘보려는 2인자 부산의 프라이드’가 느껴진다. 일제강점기에 부분적으로 서울을 능가하는 경험을 했던 부산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200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부산에서

부산과 일본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행사가 11월 25일 열린다. 부산시와 일본 나가사키현이 개최한 ‘조선통신사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행사다. 

조선통신사(조선시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의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의 국사 수업시간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을 찾아간 조선통신사들이 글씨를 써주니 일본인들이 감탄했고 유교 사상을 배우기 위해 조선 사신 숙소를 뻔질나게 찾아왔다”고 가르친다. 반면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를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정반대 해석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타고 간 배의 모형. 부산 해양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사진=위키피디아)

그러나 전쟁에 진 조선이 승전국 일본에게 최신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도 있으니 들어볼만도 하다. 즉, 조선 사신들의 서예 솜씨에 감복해 일본인들이 너도나도 써달라고 했다는 데 대해선 “당시 일본인들이 서예를 보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독일 최고의 성악가가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할 때 한국에 그 성악가의 실력을 알아볼만한 대중이 없다면 공연이 무산될 수밖에 없는 사정에 비견할 만하다는 얘기다. 일본인 일반에 서예에 대한 감식안이 있지 않고서야, 즉 일본인 일반이 무식한 무지랭이들이었다면, 아무리 명필이라도 그것을 알아볼 리 없기에 “써달라”는 주문이 쇄도할 리 없었다는 해석이다.

조선 사신들이 일본에 전해줬다는 성리학에 대해서도 한국 내의 통설과는 다른 이런 해석도 있으니 들어볼만 하다. 

(일본인들이) 퇴계 이황은 존중하지만 주자학은 조선 고유의 것이 아니며 조선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206쪽)

조선 사신단으로부터 일본인 학자들이 주자학을 전수받은 것은 ‘조선판 주자학’을 들어본 것이지, 주자학을 입수할 경로가 오로지 한반도였기 때문에 사신단에 매달린 건 아니라는 해석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은 중국과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한반도를 통하지 않으면 주자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난센스라는 지적이다.  

"일본의 모든 문물은 한반도가 준 것"이란 시각 수정해야

하여튼 이렇게 의견이 엇갈리는 조선통신사지만 한-일 두 나라가 임진왜란 이후 200년이 넘도록 통신사를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니, 그 평화의 노력을 두 나라가 축하할 만도 하다. 통신사를 보낸 건 부산이 아니라 서울이었고, 부산은 그저 출항지였지만, 통신사의 출항지로서 부산문화재단과 일본의 NPO법인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는 2012년부터 조선통신사 관련 한-일 유물을 ‘한일 양국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공동 등재’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성취를 기념한 것이 이번 축하 행사다. 

▲일본 화가가 1655년에 그린 조선통신사 행차도.(사진=위키피디아)


그래서 일본에서는 요사코이 공연단 10개 단체 170명이 부산시의 공식 초청이 아니라 ‘자비로’ 부산을 방문해 축하 행사를 펼친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는 나가사키, 쓰시마, 시즈오카, 시모노세키, 세토우치 등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고 지역 자치 단체장들 역시 참석한다니 부산과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이날 행사에 대해 “이번 유네스코 공동 등재는 한일 양국의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 추진했다. 이는 지방분권 시대에 한일 양국 미래 관계의 청사진을 제시한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방분권 시대를 맞아 부산 입장에서 일본 등 환동해권 국가들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문 연 광주의 '차이나센터'…전기차 분야 협력도 가시화

부산에서 일본 관련 행사가 잦다면, 반도의 서남쪽 광주에서는 중국 관련 행사가 잦다. 

사드 갈등으로 얼어붙었던 한중관계가 해빙 무드로 접어들자 광주광역시가 그동안 역점적으로 추진해왔던 ‘중국과 친해지기’ 정책의 고삐를 다시 당기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를 위해 광주에서 11월 21일 친 중국 거점 공간인 ‘광주광역시 차이나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날 오픈 행사에는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 등이 참석해 중국측 역시 높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광주시 차이나센터는 중국 문화 행사, 중국어 교육, 중국 문화 체험, 소식지 발행 등 광주와 중국의 상호발전과 우호증진에 기여하고 민간교류의 핵심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서남권의 중국 교류 거점 도시로서 광주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는 게 광주 시 측의 설명이다. 

광주에는 중국의 총영사관이 있고, 광주시와 중국 총영사관 측은 차이나센터 개설에 긴밀히 협조해왔다고 한다. 중국총영사관 측은 차이나센터에 전시품을 제공했고, 주한 중국 대사관은 책과 DVD 1000여 점을 기증했다. 오픈을 기념해 이곳에서는 21~26일 한·중 국제 도자 교류전이 열린다. 

또 다른 행사로는 11월 24~25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17 광주․칭화 포럼’도 있다. 이번 포럼에는 슝청위 칭화대 국가문화산업연구센터장 등 중국 측 인사 10명이 참석한다. 중국과 광주 시의 교류로는, 올해 1월 베이징에서 열린 전기차 관련 ‘EV100 포럼’에 윤장현 광주 시장이 연사로 초청돼 광주의 친환경 자동차 정책에 대해 강연한 바 있다.

▲윤장현 광주시장(오른쪽 세번째)과 추궈홍 주한중국대사(오른쪽 네번째) 등이 11월 21일 광주 서구 호남대 공자아카데미 1층에서 열린 '광주광역시 차이나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광주광역시 제공)


또한 지난 6월에는 중국 다롄에서 열린 ‘2017 하계 다보스 포럼’에서 광주시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스마트 휴먼시티 광주’의 비전을 소개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의 협력도 빨라지고 있다. 광주시는 지난해 3월 중국 조이롱자동차와 오는 2020년까지 광주에 2500억 원을 투자해 연 10만 대 규모의 완성차 생산 공장을 건립한다는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사드로 인한 관계악화로 그간 부진한 진전을 보여왔으나 최근 한중 해빙 무드에 따라 광주시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이에 지난 11월 16일에는 윤장현 광주시장이 세계 굴지의 배터리 제조 기업인 초위그룹 양신신 총재를 만나 전기차 부문에서의 협력방안을 논의했다고 광주시 측은 밝혔다. 이 자리에서 양신신 총재는 “광주가 가고자 하는 친환경 자동차 산업, 에너지 신산업, 스마트 시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시와의 기술적․창업적 협력 방안을 찾겠다. 전기 자동차 부문에서 가능한 것부터 상호 투자와 협력을 기대하며 광주에 R&D센터를 설립할 생각도 있다”고 밝혔다.

광주시 관계자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세상은 바뀌어도 이웃은 바꿀 수 없다는 진리처럼 양국 관계가 깊은 신뢰 속에 형제, 이웃, 친구로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며 “광주의 중국문화 사랑방인 차이나센터를 많은 시민들이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백제-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유대…이제는 "중국과 손잡고 성장"

사실 전라도는 과거 백제 시절에 일본과 유대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이는 일본의 원수인 신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적의 적’인 백제와 일본이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라도는 일본강점기 시절에도 일본과 강한 경제적 유대관계를 맺기도 했다. 일본의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의 쌀을 대대적으로 반출해간 이른바 식량증산계획(1920~1934년)의 수출항이 바로 군산과 목포였기 때문이다. 일본이 쌀 반출을 위해 목포와 군산항의 시설을 얼마나 잘 조성해 놓았는지는 해방 뒤 1960년대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당시 “부산의 항만시설은 일제강점기부터 가꿨던 군산이나 목포의 항만시설보다 나은 게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고속도로를 지으려면 한반도에서 횡으로 지어야지, 종으로는 철도개발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윤장현 광주시장(오른쪽)이 11월 21일 오전 서구 호남대 공자아카데미 1층에서 열린 '광주시 차이나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추궈홍 주한중국대사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있다.(사진=광주광역시 제공)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부산의 철도-항만 시설에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시점에서 볼 때는 군산과 목포의 항만시설이 부산에 뒤지지 않았다는 점은, 쌀 반출을 위해 군산-목포에 일제가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쌀 수출을 통해 떼돈을 번 것은 당연히 일본 상인들이었지만, 그 과정의 하부구조에 동참한 호남 지역의 지주나 상인 중에서 큰부자가 생겨나는 계기도 됐다. 이른바 민족자본의 출발점이 바로 호남을 통한 쌀 수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일본과 가까운 적도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황해시대’를 열어보려는 광주와, 반대로 전통적으로 가깝고 교류도 지속적으로 많았던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환동해 경제벨트’(부산을 중심으로 중국-러시아-일본을 한 경제권으로 엮는다는)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부산의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지방분권 시대를 맞아 더욱 눈길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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