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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문학 ① 신세계] "인문학자 힘 빌려 문화 흐르는 매장 탈바꿈"

연 20억 지원해 강연·투어에 번역·출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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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83호 윤지원⁄ 2018.04.13 15:08:26

(사진 = 신세계)

애플의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는 세상에 아이패드를 선보이면서 “애플은 항상 인문학과 기술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는 말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하버드대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예술사,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을 공부했고, 타인과의 연결을 갈망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 집중했다. IT 혁신을 선도하며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 상위권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두 기업은 이처럼 인문학적 토대 위에서 탄생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최근 인문학의 중요성에 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임직원들을 상대로 인문학 강연을 마련하고, 대학 인문학 분야에 후원을 늘이며, 경영 현장과 인재 발굴 과정 등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이에 CNB저널은 국내 기업들의 인문학 경영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첫 회는 신세계그룹이다.

 

신세계, 지식향연으로 한국의 ‘메디치 가문’ 노려

 

지난 4월 7일 토요일, 서울 강남의 대형 쇼핑몰 스타필드 코엑스 한복판에서 북콘서트가 열렸다. 가수 장재인과 피터 한의 공연이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해줬고, ‘문명 탐험가’ 송동훈 작가와 인기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가 윈스턴 처칠의 평전 ‘처칠 팩터’에 관한 대담 형식의 강연을 펼쳤다. 쇼핑몰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열린 인문학 행사였다.

 

행사가 진행된 공간은 스타필드 코엑스 중심에 자리한 별마당 도서관. 신세계그룹이 지난해 5월 오픈한 열린 도서관이다. 1~2층 복층 형식으로 무려 850여 평 규모인 이 도서관은 5만여 권의 책이 진열돼 있고, 앉아서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으며,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가장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현장인 ‘쇼핑몰’에 세계 최초로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을 조성해 화제가 된 곳이다.

 

이날 행사는 신세계그룹이 해마다 진행하는 인문학 중흥 행사인 ‘신세계 지식향연’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프롤로그’ 행사 중 첫 시간이었다. 이날부터 3주간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책 소개를 비롯해 올해의 신세계 지식향연에 관한 주제로 사전행사가 진행된다.

 

지난해 신세계 지식향연 강연에서 송동훈 문명 탐험가가 강연하고 있다. (사진 = 신세계)

올해는 ‘클림트와 합스부르크 제국’ 주제로 강연 및 투어

 

신세계그룹은 지난 2014년부터 인문학 청년인재 양성, 인문학 지식 나눔, 인문학 콘텐츠 발굴 및 전파를 위한 프로젝트인 지식향연을 5년째 진행해오고 있다.

 

지식향연에서는 해마다 한 가지의 인문학적 테마를 정하고 국내 여러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연다. 강연에 참가한 대학생들 중 일정한 테스트를 통해 일부를 선발, 그 해의 테마와 관련된 캠프 및 해외 인문학 여행을 함께 다녀오고, 한 학기 장학금을 지급하며, 향후 신세계그룹 신입사원 채용시 서류전형 및 1차 면접을 면제하는 특권도 제공한다.

 

올해 지식향연은 4월 26일 시작된다. 올해의 테마는 서거 100주기를 맞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합스부르크(Habsburg) 제국을 조명한 ‘천재의 죽음, 제국의 종말’이다. 26일 첫 강연은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진행되며, tvN ‘알쓸신잡’에 출연 중인 유현준 건축가와 지식향연의 간판 송동훈 작가의 강연, 그리고 가수 헤이즈와 에디 킴의 공연 등으로 구성된다.

 

강연은 6월 7일까지 건국대학교, 경북대학교, 강원대학교, 세종대학교, 조선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이어진다. 기존에 대학생들만을 상대로 펼쳤던 강연 행사를 올해는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했다. 다만 이후 인재 선발 프로그램인 ‘청년 영웅’ 선발은 강연에 참여한 대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강연에 1회 이상 참여한 전국 대학생 중 강연 및 필독서를 바탕으로 한 온라인 퀴즈를 통해 100명을 ‘청년 영웅’으로 선발하고, 1박2일의 인문학 캠프에서 그중 30명을 ‘청년 영웅단’으로 최종 선발한다. 청년 영웅단은 8월에 ‘그랜드투어’라고 하는 해외여행에 참가하고, 장학금 및 채용 시 혜택을 받게 된다. 올해의 그랜드투어는 클림트의 조국이자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인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지를 10박11일간 여행한다.

 

2014년 신세계 지식향연 '청년 영웅단'으로 최종 선발된 대학생들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등으로 그랜드투어를 다녀왔다. (사진 =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직접 나서 매년 20억 원 지원

 

연중 5개월에 걸쳐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사회공헌 사업이라기엔 규모가 적지 않은 사업이다. 신세계는 지식향연 사업에 매년 20억 원 가량을 지원하고 있다. 작년까지 전국 38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 3만 5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여했으며, 유홍준 전 문화부장관, 발레리나 강수진,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등 각계 저명인사 40여 명이 다양한 분야에 걸친 수준 높은 강연을 제공해왔다.

 

특히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자신이 직접 강연자로 나서 인문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4년 4월,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던 첫 지식향연 강연에서 첫 번째 강연자로 무대에 오른 정 부회장은 “(높은 스펙을 쌓느라) 지쳐있는 청춘이 안쓰럽고, 그 부분에 대해 사회적 리더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열심히’에 집중하던 우리 청년들에게 제대로 사는 지표를 나부터라도 제시하고 싶다”며 이날 자신의 강연과 지식향연의 취지를 설명했다.

 

정 부회장은 현실이 힘들수록 어떤 환경에서든 인생을 잡아주는 지표인 인문학이 해법이라며 “왜 사는가, 무엇이 내 소명인가를 살피는 게 인문학적 성찰이며, 사람 마음을 읽으려는 관심과 이해가 인문학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또 무의미한 스펙보다는 나 자신과 인간을 이해할 줄 알고 통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춘 인재를 뽑겠다고 강조했다.

 

신세계 관계자는 이처럼 통섭형 인재를 육성하고 발굴하는 것은 지식향연의 중요한 목적이지만, 신세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1단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신세계 지식향연은 지식 나눔, 콘텐츠 발굴 및 전파, 인재 양성 등을 실천하여 인문학 중흥을 일구고, 궁극적으로 전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덧붙였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2015년 신세계 지식향연 서막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 = 신세계)

단순 특강 아닌 테마 따라 깊어지는 사업

 

기업들이 인문학 특강을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사례는 많다. 하지만 신세계 지식향연은 매년 특정한 테마를 정하고 모든 일정이 테마에 따라 기획되는 인문학 사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테마에 맞는 강연이 구성되고 필독서가 선정된다. 또 강연 일정을 마친 뒤 떠나는 그랜드투어도 이 테마에 맞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2014년 지식향연 첫 해의 테마는 아우구스투스 서거 2000년을 기념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였고, 그랜드투어는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진행됐다. 이듬해의 테마는 ‘세상을 바꾼 청년 영웅, 나폴레옹’이었고, 그랜드투어는 프랑스, 벨기에, 영국에서 나폴레옹과 관계된 흔적을 방문하는 데 집중되었다.

 

테마에 따른 강연이 인문학적 지식의 전달이라면, 그해 사업의 마지막 행사인 ‘그랜드투어’는 인문학적 체험의 시간이다.

 

원래 ‘그랜드 투어’(Grand Tour)란 17세기 중반부터 영국 등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말한다. 당시의 교통 여건에서 이 여행을 마치는 데 평균 4년이 소요됐기 때문에 그랜드투어라고 불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부터 지식향연의 핵심 강연자로 참여하고 있는 송동훈 문명 탐험가는 그랜드투어를 “평범한 여행처럼 떠났다 돌아오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배움과 영혼이며, 질문과 관점이고, 변화와 성장”이라고 규정했다. 역사와 문명의 현장을 직접 마주함으로써 시야를 넓히고 안목을 새롭게 하는 엄격한 배움의 과정이라는 것.

 

2018 지식향연 홍보용 포스터. (사진 = 신세계)

강연의 완성은 여행…명저(名著) 발굴도 직접

 

실제로 위인들 중에는 그랜드투어라 할 만한 여행 이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뀐 사람이 많다.

 

2017년 지식향연의 테마 인물이었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도 그런 예다. 케네디는 주색잡기에만 몰두하던 하버드 대학생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유럽을 여행했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1937년 여름 내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을 여행하고 온 케네디는 유럽 대륙의 정세를 전망하는 안목이 생겼고, 전쟁이 다시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식향연이 매년 사업의 마지막을 그랜드투어로 마무리하는 것도 단순히 선발된 인재를 위한 포상 이벤트가 아니다. 여행을 인문학적 인재 육성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지식향연의 관점이 반영된 교육 과정인 셈이다.

 

‘그랜드투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세계 지식향연은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새로 번역해서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괴테 역시 37세 때 아무도 모르게 이탈리아로 떠나 2년 가까이 여행을 한 경험을 자신의 삶에서 두 번째 국면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그랜드투어의 의미를 강조한 인물이다.

 

일찌감치 정치가, 학자, 작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30대의 괴테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괴테는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개인적인 삶에서는 물론 예술가로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이며 ‘파우스트’를 비롯한 풍성한 결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괴테는 당시 여행 기록을 30년 뒤 책으로 출간했고, 12년 뒤 두 번째 체류 기록이 더해져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으로 완성됐다.

 

지식향연에서 '뿌리가 튼튼한 우리말 번역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출간한 두 권의 책.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왼쪽)과 보리스 존슨의 윈스턴 처칠 평전 '처칠 팩터'. (사진 = 신세계)

그 결과 ‘이탈리아 여행’은 지식향연이 진행하는 인문학 사업 중 ‘뿌리가 튼튼한 우리말 번역 프로젝트’의 첫 도서로 2016년 10월 출간됐다. 그리고 ‘뿌리가 튼튼한 우리말 번역 프로젝트’의 두 번째 책으로 나온 것이 지난 4월 7일 북콘서트로 소개된 ‘처칠 팩터’다.

 

이처럼 신세계그룹은 두어 시간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특강을 하고 끝나는 겉핥기 인문학 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룹 스스로 인문학 콘텐츠를 발굴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경영 현장에도 반영…편의점 사업에 인문학자 영입

 

신세계그룹은 최근 이마트를 기반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어왔고, 2016년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국내 10대 대기업에 꼽혔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성과가 정 부회장이 보여준 발상의 전환과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부회장이 2014년부터 활발하게 시도한 ‘유통 실험’은 여러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스타필드는 그 대표적 성공사례다. 쇼핑몰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구매를 권하기보다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암벽 등반장이나 열린 도서관 같은 비(非)쇼핑 문화 활동 구역을 쇼핑 구역보다 넓게 만든다는 발상이 주효했다. 스타필드 하남은 오픈한 지 140일 만에 누적 방문객 1000만 명을 돌파했고, 일본의 테마파크 ‘도쿄 디즈니랜드’의 연간 방문객 1600만 명보다 훨씬 많은 연간 2600만 명이 방문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여성 소비층이 주를 이루는 대형마트에 남성을 겨냥한 가전 양판점 ‘일렉트로마트’와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하우디’ 등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1인 가구 증가 트렌드에 맞춰 피코크와 노브랜드 등 PB 제품 개발 및 개선에 집중해서 얻은 성과도 크다. 이런 사례들은 단순히 모험심과 추진력의 결과라기보다, 고객이라고 하는 현대인과 그들의 삶을 고려하는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타필드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 (사진 = 신세계프라퍼티)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분야에서도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올해부터 국내 대기업 최초로 근무시간을 주 35시간으로 단축하는 파격적인 근무체제 전환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워라밸에 관한 다양한 요구를 포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2015년에 구성한 근무제도혁신 태스크포스 팀의 연구와 분석 결과를 그룹 최고위층이 신뢰하고 받아들인 결과다.

 

워낙 큰 폭의 체제 전환이어서 성공 여부를 우려하는 시선도 많다. 노조를 포함한 업계 일각에서는 워라밸과 노동생산성 제고라는 핑계로 근로시간을 줄임으로써 인건비도 아끼겠다는 꼼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3개월 반이 지난 현재 큰 잡음은 들리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분명하게 확립하겠다는 사람 중심의 본질적 목표에 가장 충실한 결정”이라며, “신세계의 전망처럼 노동생산성이 함께 높아지고 이익이 늘어난다면 주위의 우려는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마트24 스타필드 코엑스몰 1호점. (사진 = 이마트24)

신세계그룹의 아픈 손가락이던 편의점 사업도 인문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국면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정 부회장은 편의점 포화시대라고 여겨지는 이 시점에 편의점 사업을 미래 신성장 동력의 핵심 축으로 규정하고 연간 3000억 원을 3년간 투자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먼저 기존의 사명 ‘위드미’를 ‘이마트24’로 변경했고, 스타필드와 같은 대형 오프라인 매장에 적용했던 문화 중심의 프리미엄 매장 전략을 편의점에도 적용하고 있다. 담배와 맥주 매출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기존의 편의점이 아니라, 음악이 흐르고 숍인숍 형태의 매장 내 식당이나 카페 시설을 이용하며 쉬어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 콘셉트로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특히 김성영 이마트24 대표는 앞으로 편의점 사업의 창의적인 면을 이끌 R&D 조직인 ‘편의생활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있어 경제, 유통, 기술 분야의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지 않고, 오직 미래학자나 인류학자 등 인문학 전문가만 영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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