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도기천 기자)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고 구본무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승계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주력 계열사인 ㈜LG와 LG유플러스의 수장 자리를 서로 맞바꾸는 매머드급 인사를 단행해 눈길을 끌고 있다. 재계에서는 예상보다 빠른 구 회장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갓 마흔을 넘긴 젊은 구 회장이 추구하는 ‘미래 LG’의 그림은 뭘까.
구광모 시대가 속도를 내고 있다. LG그룹 지주회사인 ㈜LG는 지난 16일 이사회를 열고 LG유플러스 권영수 부회장을 최고운영책임자(COO)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권 부회장의 이동으로 비게 되는 LG유플러스 대표이사 부회장 자리에는 ㈜LG 하현회 대표이사 부회장이 가게 됐다. 두 주력 계열사의 대표이사가 서로 자리를 맞바꾼 셈이다.
재계에서는 권 부회장의 자리 이동을 두고 새 총수에 오른 구광모 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구광모 체제’를 하루빨리 안착시켜 사업 혁신에 속도를 내기 위한 그룹 차원의 포석이라는 것.
권 부회장은 1979년 LG전자에 입사한 이후 LG디스플레이 사장, LG화학 사장(전지사업본부장), LG유플러스 대표이사 등을 맡는 등 주력 계열사를 두루 거쳐 ‘LG그룹 리베로’로 통한다. 특히 LG전자 재직 시절 금융·경영지원 담당 상무보, 재경팀장,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을 거쳐 ‘재무통’으로도 불린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변화의 속도가 예상보다 상당히 빠르다. 대대적인 사업·인적 재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투트랙 개혁’ 본격 시동
구 회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인적 분할을 통한 그룹 지배구조 개편과 신성장 동력 강화다.
우선 이번 인사로 구 회장 취임 직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구본준 부회장(고 구본무 회장의 동생)의 독립이 조만간 현실이 될 전망이다.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을 모태로 하는 LG그룹은 7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장자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장자가 경영권을 승계하면 총수의 형제들은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퇴진하거나 분사하는 게 LG가(家)의 전통이다.
실제로 구인회 창업주가 장남인 구자경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자 구 창업주의 동생들은 스스로 회사를 떠나 창업에 나섰다. LIG그룹, LS그룹이 모두 이렇게 탄생한 기업들이다.
구자경 회장이 첫째 아들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을 때(1995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LG반도체를 이끌던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그룹 내 유통사업을 담당하던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등 구자경 회장의 두 동생들은 조카(구본무)를 위해 그룹 경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구본준 부회장 역시 장자인 구광모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만간 계열 분리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구 부회장은 현재 ㈜LG의 지분 7.72%를 보유한 2대주주다. 이 지분을 활용해 따로 회사를 차릴 가능성이 높다.
현재 LG그룹은 LG화학과 LG전자가 각각 주도하는 바이오와 AI에서 새로운 성장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LG이노텍 등은 함께 자동차 전장(전자장비)부품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한발 비켜난 LG상사와 판토스 등 상사 부문이나 구 부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쏟은 LG디스플레이의 사업부문 중 하나가 분리 독립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공들인 전장사업, 트럼프 장벽 ‘위기’
경영권 문제가 정리된 후에는 미래먹거리 육성에 방점을 둔 사업재편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구 회장은 미국 로체스터 공대 시절 IT(정보기술) 분야를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밟다가 인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으로 옮겨 공부 대신 사업 실무를 익히는 쪽을 택했다.
따라서 구 회장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로 꼽히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5G(5세대 이동통신), 빅데이터, 로봇 등 분야에서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찾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미 LG전자, LG유플러스, LG CNS 등이 이 분야에 치중하고 있는 만큼 M&A(인수합병) 등을 통해 사업확장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그룹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전장사업도 주목된다. LG전자는 지난 4월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헤드램프 업체 ZKW를 1조4440억원에 인수했으며, 네덜란드의 히어, 미국의 헬라 등 글로벌 업체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원·달러환율 급등, 중국·일본 기업과의 경쟁 심화 등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져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맞닥트리고 있다.
특히 미국 트럼프 정부는 자동차에 대해 ‘무역확정법 232조’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외국산 수입 제품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긴급하게 수입을 제한하거나 고율의 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수입승용차에 대한 관세를 현재 2.5%의 10배인 25%로 상향조정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출의존도가 높은 현대차동차는 물론이고 자동차 전장사업에 뛰어든 LG전자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LG는 최근 미국 상무부에 자동차와 자동차부품 수입이 미국 자동차 산업의 생존과 국가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19~20일 워싱턴에서 열린 관련 공청회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
구 회장이 이처럼 미중 무역분쟁 등 보호무역 장벽이 본격화된 시기에 그룹을 이끌게 됐다는 점에서 그의 글로벌 리더십이 첫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구 회장은 오랜 실무경험을 살려 주요수출국들과의 물밑협상, 우리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선택과 집중’ 만년 2위 극복할까
삼성전자의 반도체처럼 확실한 ‘1등’이라 할 만한 사업이 없다는 점도 구 회장이 풀어야할 숙제다.
LG전자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매출 60조원 시대를 열었고, LG화학·LG생활건강이 지난해 중국 시장 악화에도 불구하고 최대 실적을 낸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LG화학이 LG생명과학과의 합병을 통해 강화한 바이오사업은 아직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AI 기술들도 아직은 초기 단계라 막대한 투자비가 투입되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LG전자 스마트폰은 만년 2위를 못 벗어나고 있으며, LG유플러스는 KT, SK텔레콤과의 제살깎아먹기식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의 보편요금제 도입 등으로 통신료 수익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미 몇년 전부터 구본무 회장과 구본준 부회장이 수시로 ‘위기론’을 꺼내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LG맨들이 ‘젊은 리더’와 어떻게 호흡을 맞춰가며 위기를 돌파할지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CNB에 “LG의 주요계열사들이 수출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구 회장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그룹을 이끌게 됐다”며 “그룹을 먹여 살릴 확실한 캐시카우가 없다는 점이 오래전부터 LG의 최대약점으로 꼽혀온 만큼, 과감한 투자를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