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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후쿠시마 방사능 생선, 한국인이 먹어라”가 美 입장? 美는 왜 100년 넘게 日 편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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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9.04.17 16:31:00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15일 아침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김어준과 출연진을 잠시 멍하게 만든 발언이 있었다. 바로 민변 송기호 변호사가 밝힌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WTO 제소 분쟁에서 미국 측이 1심에도, 2심에도 ‘한국이 패소하는 게 맞다(Korea's claim must fail)’는 의견서를 제출했다”는 전언이었다.

방사능에 오염됐을지도 모르는 후쿠시마 근해 수산물을 수입 금지한 나라가 50여 개 국이나 되는데도 일본은 그중 한국만을 콕 찝어 WTO에 제소했고, 1심에서는 승소를 거뒀다.
 

'후쿠시마 수산물'을 한국에 강권하는 일본 아베 총리의 모습을 연기하는 시위가 작년 3월 19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터 앞에서 열리고 있다. 당시 한국은 WTO 심판에서 일본에 패소했다.(사진 = 연합뉴스)  

 

그 승소의 배경에는 박근혜 정권 당시(2014~2015년)에 구성됐던 ‘일본 방사능 안전관리 민간전문가위원회’가 2015년 6월 5일 뚜렷한 사유 없이 갑작스레 활동을 중단했고, 1심에서 WTO 재판부가 ‘왜 위원회 활동을 중단했느냐’고 묻는데도 한국 정부 측이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면서 결국 한국 측이 패소했다는 전후사정을 송 변호사는 이 방송에서 설명했다. 기껏 만들어 놓은 민간전문가위원회가 약속했던 보고서도 내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활동을 중지해버린 배후에는 이런 미국의 입장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어볼 만하다.

 

4월 1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발언하는 송기호 변호사(오른쪽). 사진 = tbs


미국이 한국의 손해가 불 보듯 뻔한 데도 불구하고 일본 편을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명한 사례로 일본의 조선 병탐을 미국이 눈감아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이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의 의문투성이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일본은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한국 국민들은 “도대체 왜?”라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때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대체로 “아주 잘 타결된 협상”이라며 일본 편을 들어줬다. 그래서 그 배경에는 미국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아직도 맴돈다.

 

일본인은 환호하고, 한국인은 어이없어 한 박근혜 정부 때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미국 측의 관여가 있음을 시인한 브루스 클링너 전 CIA 한국 지부장의 발언 내용을 jtbc가 보도한 화면. 

 

독도 문제 역시 미국이 일본 편을 들어준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에 패전국 일본과 승리한 연합국 측(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사이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도 원래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표기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로비를 받은 당시 주일 미국 대사이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정치 고문이었던 윌리엄 씨볼드(부인이 일본계 영국인)가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낸 뒤에 결국 최종 강화조약에는 독도가 빠져버렸다. 결국 미국의 결정으로 독도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영원한 분쟁 대상으로 남게 된 것이다.

미국이 독도를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것처럼 처리해버렸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독도를 놓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미군이 개입해 일본 편을 들어줄 것이므로, 전투만 일어나면 일본 것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일본인 저자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미-일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시다 시게루 일본 수상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이 강화 조약은 독도가 한-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문안을 작성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전직 외교관인 마고사키 우케루는 ‘일본의 영토분쟁’이란 책에서 “독도로 한일 전쟁 벌어지면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5쪽)이라고 썼다. 그런 믿음이 일본인 사이에 존재하기에 ‘그런 헛된 기대를 말라’고 저자가 경고한 것이다.

일본인 사이에 이런 믿음, 즉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일본 편을 들어왔던 미국이 일본 편을 자동적으로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역사적 증거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범한 가장 큰 죄는 남북 분단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모두에서 전쟁을 일으켜, 미국, 영국, 네덜란드, 중국 등과 싸우면서 2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범은 일본이다. 그런데 종전 뒤 국토가 두 동강 나면서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전범 국가 일본이 아니라 식민지 피해 국가 조선(한국)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전쟁을 일으키며 살인 잔치를 벌인 건 나치 독일인데, 독일이 패망한 뒤 독일 땅과 독일 왕(히틀러)은 온존시키고, 침략을 당한 피해국 프랑스를 두 동강 낸 것과 마찬가지다. 유럽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지만, 한반도에서는 대낮에 눈뜬 사람 코 베어 가듯 실현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전범국이 분단 안 되고, 피해 식민지가 두동강 난 희안한 케이스


분단의 과정을 도올 김용옥은 신간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선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차이다.

 

소련은 북한을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남한을 군정 military government을 통하여 “직접지배”를 꾀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소련은 “군정”이라는 개념을 내세우지 않았다. 공산주의국가 사이에는 동료의식이 있고, 그것은 코민테른Cominterm,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Communist Intermational(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러시아 공산당 주도 인물들이 설립하여, 1943년 스탈린에 의하여 해체됨)의 원칙과 협력관계에 의하여 계승되어온 것이다.(143쪽)

미국은 한국에 무지했다. 오직 미국의 괴뢰정권을 세워 한국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친미 세력권 내에 있게 만든 지배영역적인 관심만 우선했고, 인민의 삶이나 가치나 지향점에 대해 아무런 본질적 관심을 갖질 않았다.(144쪽)

미국은 오직 한국을 영토적 관심에서만, 즉 군사기지적 관심에서만 바라보았다. (145쪽)

즉 조선인과 함께 항일전을 펼친 경험이 있는 소련은 조선에 대해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공산주의 강령이 있기에 북한 땅을 직접 지배하려고 들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구 소련은 물론 현재의 러시아까지도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욕심은 거의 없다는 것이 여러 역사 자료를 통해 증명되지만, 일본 측의 집요한 선전, 즉 “소련 또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집어삼키면 일본의 배 앞으로 칼이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이를 선제적-예방적으로 일본이 막아야 한다”는 논리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인들의 뇌리에 새겨진 탓인지, 아직도 한국인들 중에는 러시아라는 북방 나라에 대해 공포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조선인 세뇌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상 중 하나다.

 

조선총독부가 전쟁 패배를 예상하고 '유사시 在조선 일본인의 안전 귀환'에 대해 협의했던 대상인 몽양 여운형은, 그러나 미군정의 진주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국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결국 암살되고 만다. 

 

"일본보다 더 무지하고 막강한 별종 양아치 미국"


더군다나 당시 미군정의 성격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수십만 명을 죽게 만든 뒤에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한반도 남부에 입성한 것으로서 폭력적이었다고 도올은 설명한다.

미국은 일본과도 전혀 다른, 일본보다도 무지막지하게 막강하고 창으로 무지스러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전혀 별종의 양아치라는 것을 일찍 알아차려야 했다. 탱크를 밀고 들어오는 양아치 앞에서 재크나이프 가지고 깐죽거려봐야 뭔 소용이 있을까? 막강한 양아치에게는 이승만의 접근이 어느 누구의 접근보다도 의미있는 접근이었다. 그래서 거룩한 사기꾼 승만 리Syngman Rhee가 무서운 것이다. (156~157쪽)

깡패 같은 무력을 갖추고 들어오는 미군정(하나의 정부) 앞에서,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은 “우리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하고 싶어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이 패전을 앞두고 “在조선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라”며 정권양도 방안을 논의했던 상대방인 몽양 여운형은 전국인민위원회 단계를 지나 조선인민국화국 수립을 선포해버린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정치적 욕망이 결국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게 도올의 판단이다. 한 나라에 두 정부는 있을 수 없고, 미군‘정’은 하나의 정부인데,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이 용납할 수 없는 제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도올은 ‘탱크 앞에서 재크나이프 깐죽거림’으로 비유한 것이다.

 

맥아더와 포옹하는 이승만. 미국유학-기독교라는 출신 성분을 갖는 이승만은 미군정 지배 상황에서 미국 측에 적극적으로 접근해 결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반면 미국의 생리를 잘 아는 ‘미국 박사’ 이승만은 이 기회에 편승해 정적들을 몰아내거나 죽임으로써 남한의 권좌에 올라탔다는 것이다.

해방 공간(남북한에 분단국이 생기기 이전의 1945~1948년 용광로와 같던 시기)에서 우익과 좌익을 찢어지듯 갈라치고, 분단의 계기를 만든 것으로 도올은 친탁-반탁 대소동을 든다.

신탁통치라는 게 발음상 식민지 통치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후원guardianship을 통해 독립을 보장하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는 게 도올의 의견이다.

 

1945년 전국을 휩쓸면서 분단의 계기가 된 신탁통치 찬-반 일대 소동은 동아일보의 왜곡뉴스에서 비롯됐다는 내용을 보도한 KBS 방송 화면. 


그런데 당시 일본의 느닷없는 패망에 놀라 숨을 죽이고 있던 친일 조선인들(대개 돈 많고 식민 치하에서 재미를 단단히 본 사람들)은 미국의 반공 노선에 기대어 살아날 길을 암중모색 하고 있었고, 당시 ‘한민당(지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정당)의 기관지’(172쪽)였던 동아일보는 이 신탁 통치 방안에 대한 가짜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당시(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의 가짜뉴스 내용은 이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이 보도에 대한 도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신탁통치안의 실내용은 38선 중심의 분할점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문제의 핵심인 남·북이 단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테제를 완전히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치 신탁통치안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있는 것이다.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 미국은 그러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으며 그 대신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중략) “오보”라기보다는 의도된 대중선동이었다. (172쪽)

 

"소련은 물러가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서북청년단 단원들.


반공을 통해 살아날 틈을 찾던 친일 모리배들은, 신탁통치를 마치 소련이 38도선 분단을 위해 북조선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주장했고, 반대로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팩트와 전혀 상관없는 가짜뉴스를 보도함으로써 친탁 = 빨갱이-반민족주의자, 반탁 = 반공주의-민족주의자 진영 형성을 꾀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민당의 당수 격이었지만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던 고하 송진우는 비록 동아일보의 사장이었지만 친탁-반탁 편가르기에 엄청난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는 1945년 12월 29일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을 찾아가, 각 정당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반탁운동엔 정당성이 없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암살 당하기 며칠 전 한민당사를 나서는 고하 송진우. 그는 "친탁이 맞다"는 걸 김구에게 주장하다가 다음날 암살 당한다.  

그러나 김구는 목멘 소리로 “우리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라고 절규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합리적 대화가 통할 수 없는 자리였다. 김구의 우직한 눈물의 배경에는 "이 기회에 민중의 데모의 힘으로 미군정의 통치권을 중경임시정부가 이양받아야 한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177쪽)

도올은 김구의 정치적 식견에 대해
“어떻게 이 정도의 나이브한 사유를 가지고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일까?”(163쪽)라고 낮게 평가한다.

새벽까지 김구 등을 설득하다가 실패한 송진우는 바로 그날 새벽에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암살 당한다. 짝퉁 보수가 힘을 발휘하는 한국에서는 송진우처럼 합리적인 대화를 하자는 양심적 보수는 바로 암살 당한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도올은 이후의 사태 진전에 대해
송진우의 사후, 한민당은 급속히 이승만을 향해 기울었고, (중략) 건강한 보수세력은 우리나라의 폴리티칼 아레나political arena에서 표류하면서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 격 있는 보수가 없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178쪽)
고 썼다.

 

양복 차림의 이승만과 한복 차림의 김구. 두 사람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한 장의 사진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선인들의 작태에 미군정은 치를 떤다.

한편 미국은 자기들을 지원해야 할 우파들이 격렬하게 미국의 정책을 반대하는 모습에 경악했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반탁의 광란을 바라보면서 합리적 후견 방안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었고, 조선민족의 자치능력을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되었다. 결국 무분별한 반탁운동이 미국과 소련이 분도양표分道揚鑛(같이 가다가 다른 길로 갈라서면서 제각기 철퇴를 휘날린다)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분단을 정당화하게 된 것이다.(179쪽)

 

1945년 얄타회담에서도 미국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앉은 이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오로지 자신들의 국내 정권다툼을 위한 요소로 활용하면서 가짜뉴스 동원과 암살을 서슴지 않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미국은 조선 민족의 자치능력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를 가리지 않는 정권 탈취 욕구는 7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아닐까?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국체를 살려야 한다"는 상주문을 1945년 2월 천황에게 올린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 그는 일본의 항복 뒤 자살했다.  

조선인들이 이렇게 미국인들을 경악시킨 반면, 일본인들은 미국과의 전쟁 초반에 놀라운 승전 퍼레이드로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인에 대해 ‘내심 존경심을 품었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또한 패배가 임박해서는 ‘천황 제도에 흠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핵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던 일본 지배층이 노력들이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 말기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일본 총리는 패전이 확실해지자 1945년 2월 주요 정치인들과 협의해 천황에게 상주문을 올린다.

내용은 “패전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필지라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패전을 확실히 예견했다. 그리고 “국체호지의 방침에서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패전보다도 패전에 동반하여 일어날 공산혁명입니다”라고 하는 입장에서, 혁명에 의해 천황제가 붕괴된다는 최악의 사태를 회피하기 위해서도 바로 전쟁의 종결에 들어가야 한다고 결론을 맺은 것이다.(요시다 유타카 저 ‘아시아 태평양전쟁’ 227쪽)

물론 이 상주문을 천황이 거부해 결국 원자폭탄까지 얻어맞고 나서야 항복을 한다. 그러나 그 세계적 분탕질을 하고도 영토(일본 열도)와 자기들 나라의 ‘근본’이라고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천황제를 지켜냈으니, 일본이나 미국이나 참 대~단한 나라들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앞에서 예를 든 마고사키 우케루(전직 일본 외무성 관리)의 책 ‘일본의 영토분쟁’ 등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은, 일본 외무성의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깊숙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외무부에 과연 이러한 스터디 그룹이 있는지는 아직 들어본 바가 없다.

일본 관료 사회에도 이러한 스터디 그룹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이유는, 일본 사회 자체가 ‘한 분야를 깊이 파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 번 판-검사는 영원히 판-검사로 일생을 마무리하기 때문에, 판-검사가 정치가가 되는 경우는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인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 외무성의 전 국제정보국장 출신으로서 퇴임 뒤에 비중있는 저서를 내고 있는 마고사키 우케루. 그의 책을 보면 일본 외무성 직원들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담당 사안을 깊이있게 천착해 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도올은 자신의 강연에서 “일본의 내 도쿄대학교 동창들은 내가 한국 정치 문제 등에 대해 발언하고 그 내용이 TV 강연 등으로 방송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줄 몰랐는데 너는 정말 천재구나’라고 감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자기 전문 영역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본 대학 교수 등 지식인에선 금기이기에, 일본 지식인은 한 분야를 깊이 파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리는 관리대로, 기자는 기자대로, 법조인은 법조인대로 외길을 깊이 파면서 걸을 수 밖에 없다. 전문성이 극도로 높아지는 사회다. 일본뿐 아니라 대개의 선진 사회가 이렇다.

반면 한국에서는 법조-기자 출신의 정치인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대법관을 지낸 인물이 정치를 하겠다고 명함을 거리에서 돌리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풍경(왜냐면 미국 대법관은 거의 ‘걸어다니는 지혜’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그런 대접을 받기 때문에 전직 대법관 출신이 거리 유세에 나선다는 풍경을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한국에서는 수시로 펼쳐진다. 그만큼 엘리트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넓고, 한 분야를 깊게 팔 필요는 없는 게 한국 사회다.

 

지난 2016년 총선에 출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 관련 뉴스를 전하는 연합뉴스TV 화면. 전직 대법관이 선출직 후보로 나선다는 그림은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상상 초월의 장면이지만 한국엔 법관 출신의 정치인이 적지 않다.


전문가가 부족한 채, 아니 전문가라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 기준으로 보면 형편없이 실력이 부족하면서도 누리는 권한은 세계 최대 수준인 ‘짝퉁 전문가들’이 활개치는 게 한국 아닌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근현대사에서 한국과 일본의 이익이 부닥치면 미국은 그래도 말이 통하는 일본 편을 줄곧 들어왔고, 실력 면에서 몇 단계 쳐지는(최근에는 그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 밑으로 편입해 들어가라니까 그래”라면서 불이익을 준 것이 미국의 기본 태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덩달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한국인들, 특히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세력들 중에는 “우리는 더욱더 미국을 추종해 일본보다 우리가 더 미국 말을 잘 듣는 친구 또는 부하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다. ‘한미동맹에 금 간다’는 소리를 이들 또는 한국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려면 최소한 실력이 비스무레는 해야 한다. 실력이 형편없이 쳐지는 사람이, 친구가 되겠다고 밀착하려 들면,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고역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존경심 비슷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듯이, 국가 사이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이른바 ‘숭미주의자’들, 또는 걸핏하면 성조기를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은 한번쯤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왼쪽)에 대드는 일본을 미국(오른쪽)은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고, 영국은 말리는지 미는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일본 뒤에 서 있는 모습을 그린 만화.


일본은 개화기 불과 수십년 사이에 나라의 면모를 일신해 일약 세계 열강 중 하나로 떠올랐다. 1895년에는 당시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청나라를 이겼고, 10년 뒤 1905년에는 당시 세계 양강(영국과 함께) 중 하나였던 러시아까지 이기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존경심을 품게 만드는 나라와, 국내 정치에서의 패권 탈취를 위해서라면 지배층이 가짜뉴스 생산과 유포 등을 꺼리지 않는 나라 중에 어떤 나라와 더 친하게 지낼 필요성을 미국 엘리트들이 느낄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미국 성조기. (사진=연합뉴스)


후쿠시마 방사능 수산물을 한국인이 먹어야 된다는 듯한 미국의 WTO 한-일 분쟁에 대한 의견서 제출은, 전적으로 미국 측의 잘못이다. 그러나, 일본 측이 50개국이나 된다는 수산물 수입 금지 국가 중에서 한국을 콕 찝어 제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필승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바탕에는 한-미-일 사이의 ‘역사 경험치’들이 반영돼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근현대사에서의 세 나라 사이의 편들기 역사를 대략 살펴봤다.

도올 선생의 책은 훌륭하고 읽을 만하지만,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도올은 ‘우린 너무 몰랐다’는 과거형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과거에 몰랐지만 지금은 제대로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라는 반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는 책 제목이 더욱 현실적이 되려면 이랬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제안해본다. ‘우린 너무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앞으로는 알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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