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더 갤러리 이번 회는 최우람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 ‘하나(One - 이박사님께 드리는 답장)’(2020)는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미지의 생명체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꽃의 형상을 보여주는 이전의 작품과도 달라 보인다. 이 작품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가 시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말했는데,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 제작했는지 설명을 부탁한다.
조각을 전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나의 작품이 어디에서든 형태를 갖춰 오랫동안 유지되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단단한 물질로 이뤄진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영구적이지 않아 보이는 구겨지고 낡은 것 같은 재료를 써봤다. 아마 금속보다는 빨리 변하겠지만 재료가 주는 느낌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더 가깝다면 사용하기로 마음을 많이 돌렸다. 참고로 사회나 군중심리, 유행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표현한 ‘핑크 히스테리아(Pink Hysteria)’(2018)도 비닐로 제작했으니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변화라 하겠다.
‘하나’는 세월에 닳고 닳아 곧 소멸할 것 같은 오래된 책과 유사한 재질을 보여주는 천(방호복)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찢은 효과가 한지와 비슷한 데에서 착안했다. 나는 시간의 흐름이 꽃잎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코로나 시대에 보내는 헌화이기도 하다. 한편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한 덩어리로 묶으려 하다 보니 시간을 담은 역사의 페이지를 담고 싶었고, 꽃의 형상을 한 그동안의 작품보다 더 많은 꽃잎의 층(layer)이 필요했다. 역사의 페이지는 실제 꽃잎보다 더 많은 무한대의 페이지를 갖고 있을 테니까. 그 페이지들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들을 반복하려고 하다 보니 더 풍성해질 수밖에 없었고, 아마 그래서 어떤 존재로 느껴질 만큼 강하게 다가왔나 보다.
- 부제인 ‘이박사님께 드리는 답장’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설계에 엄청난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는 작품을 구상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많이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술애호가인 이 박사님을 만나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하나’가 그분과의 대화에 대한 답장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부제를 붙이게 되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그때의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만 제목에서의 이 박사님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로 상정하고 사용했다.
- 소리는 작품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최우람의 작품에서는 더욱 그렇다. 관련해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혹시 특정 작품을 위한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해볼 생각은 없는가?
음악까진 아니었지만 ‘URC-1’(2014)에 위성에서 수집한, 지구에서 나오는 전자 파장을 음으로 변환한 소리를 틀었다. 음악은 ‘회전목마’(2012)에서 사용했다. 아는 작곡가에게 의뢰해 서커스에서 들었던 것 같은 음악을 바탕으로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미니 파이프 오르간 연주곡을 만들었고, 컴퓨터로 연동해서 회전목마가 빨라질수록 음악도 빨라지게 만들었다. 그밖엔 별도로 연출된 음악을 튼 적이 없지만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사실 작업하며 소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하는 작품에서 기계음이 너무 날카롭게 들리면 감상하는 데에 거슬리기 때문에 보통 내가 하는 일은 기계적인 소리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야 기계로 보이는 부분이 최대한 사라지고 작품들이 자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자연스러운 모터 소리가 나도록 한다. 음악은 그 자체로 강력해서 시각적인 감상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 사람이 무언가 눈으로 볼 땐 그것이 뭔지 판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각한 뒤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음악은 듣는 순간 감정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밀어 넣게 될까봐 조심스럽다.
- 작가의 유튜브(YouTube)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의 경우 배경 음악이 있다.
전시장이었다면 음악을 틀지 않았을 거다. 영상은 아무리 큰 모니터로 봐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상을 끝까지 잘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음악을 넣었다. 선정한 음악에 굉장히 특별한 의미가 있다거나 작품을 위해 작곡한 것은 아니지만 작품과 어울릴만한 것으로,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분위기에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찾으려 노력한다.
- 작품 대부분에 빛이 등장한다. 빛은 소리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다.
내 작품뿐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빛은 중요하다. 나의 경우 빛은 맥박이나 살아있음을 전달하는 요소 중 하나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빛은 기계이지만 살아있고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좋은 재료이다.
- ‘Orbis’(2020)는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가지 않고 현장 팀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설치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여러 부분으로 이뤄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Orbis’는 현재 대만에 설치되어 있는데, 우리 팀이 직접 가게 되면 대만에서 2주,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2주, 총 4주를 격리해야 했다. 그래서 현지의 스태프들과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를 하면서 설치했다. 사전에 작품이 부분별로 어떻게 조립되어야 하는지 기록하고, 분해할 때는 부품에 번호를 붙인 뒤 조립에 필요한 공구까지 작품과 함께 넣어 보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현지 스태프와 브리핑을 하고, 동영상으로 촬영한 작품의 조립 과정을 보여주면서 완성했다. 팬데믹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가 자신이 직접 가지 않아도 설치가 용이한 방법들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 팬데믹 이전에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특히 내 작품은 조립과 설치가 부담스럽고 까다로울 수 있으니까. ‘하나’의 경우도 그렇고 작품 대부분 설치와 철수를 위한 매뉴얼이 정리되어 있다.
- ‘Orbis’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느끼는 부분인데, 최우람의 작품은 키네틱 아트임에도 정적이란 인상을 준다. 물리적으로 움직임과 정지함이 함께 한다는 차원뿐 아니라 움직이는데도 고요하게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 어딘가에 위치하는 작품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연출된 작품 안에서 움직임뿐 아니라 멈춰 있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으려면 멈춤의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 없이, 끝없이 움직이는 것은 감각적으로 멈춰 있는 것과 같다. 멈췄다 움직였다, 어두웠다가 밝았다 하는 변화가 있어야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내 작품을 정적이라 느낀 것은 내가 의도한 대로 집중해서 봐줬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일상에서 못 보던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면 심리적으로 그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드는 것도 새로운 존재에 가깝고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것일 테니 거기에 집중해 보는 순간 고요해질 것이다.
- 최우람의 작품은 전기 장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조금 황당한 상상일 수도 있지만, 만약 전기가 사라진다면 어떤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을까?
‘서바이벌 패밀리(Survival Family)’(2017)라고 전기가 사라진 삶에 사람들이 적응하는 영화가 있다. 전기가 사라졌다고 멸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펌프가 멈추니 물이 안 나오고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자동차도 운행할 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과학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내 생각에 시골보다는 도시에 몰려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심각할 것 같다. 작품이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을 세우고 작업하는 것은 아니니 만약 그와 같은 상황이 현실이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세계로부터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작동하는 것들이 필요했고, 전기가 가장 효율적이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 최우람의 초기작은 기계생명체와 함께 살아갈지도 모르는 미래를 보여준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작품이 어둡게 느껴질 때가 있다. 팬데믹이 1년 넘게 이어지다 보니 인류 문명을 되돌아보려는 시도도 많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문학이나 영화가 주목받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혹시 앞으로의 인류 문명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말해줄 수 있는가? 과학 기술과 긴밀한 작업을 오랜 시간 하다 보니 관련해서 보다 많은 생각을 할 것 같다.
전혀 알 수 없다. 그걸 몰라서 작업하는 것 같다. 때때로 앞날에 대한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살아왔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현재를 살아왔다. 먼 미래에 대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그렇게 밝기만 할 것 같진 않다. 욕망하고, 욕심내고, 권력을 향하고, 아주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변한 게 없다. 원대한 꿈을 가지는 것은 개인의 자유고, 인간이 멋진 문명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모두 인간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하는 일이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굴러가다 보면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바뀔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일은 많았다. 극단적 예로 경제적 이윤을 위해 정치적 긴장 상태를 조성하고,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원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테크놀로지가 500년, 100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작업 구상을 위한 드로잉을 할 때 그런 느낌들이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전면에 보이는 것보다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또, 나의 작업에 생성과 소멸의 의미가 함께 하기에 밝게만 다가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활짝 핀 꽃은 그 안의 죽음(시듦)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은 조화보다 생화를 좋아한다.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사라질 것을 알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생명을 가진 존재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