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2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06.29 11:21:56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1 명륜동 작업실(캔 파운데이션) 입주 작가인 최수정은 작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회화를 중심에 놓은 형식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미묘하게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는 듯한 작업은 역으로 회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작품과 공간, 관객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게 한다.
- 스스로 작가 최수정을 소개한다면?
그동안 회화를 주 매체로 회화와 공간, 서사와 서사를 작동시키는 이미지 사이를 탐구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지금과 같은 작업의 시작점에는 이미지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나는 다양한 매체의 이미지들과 내가 바라보는 것들을 기록, 분석하고 관련된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이미지 라이더, 즉 이미지를 타고 노는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미지를 만들고 드러내는 물리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작가와 회화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 작품 안에 존재하는 거리, 관객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거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 최수정의 작업은 회화와 설치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서 살짝 떨어진 채 걸린 회화, 빛과 그림자의 작용이 독특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미술관을 좋아했고 지금까지 수많은 회화 작품을 봐왔다. 회화를 마주하면 우선 프레임 안으로 빠져들어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몰입하고,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와 작품이 존재하는 현실 속의 물리적 공간, 그 공간에 놓인 물리적 회화, 그리고 나의 신체를 자각하게 된다.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몰입과 빠져나옴,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공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비해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은 짧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회화의 표면, 시간이 물리적으로 축적된 사각의 프레임 앞에 좀 더 머무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나에게 회화의 표면은 마치 가면의 구조와 유사하게 느껴지기에 회화 작품이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얼굴로 느껴지길 원했다. 그리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그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 같은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관객을 향해 나의 작품이 얼굴을 더 들이미는 것처럼 느껴지게 설치했다. 시선의 대상이라는 수동성을 벗어나 능동성을 넣게 된 것이다.
그런데 회화의 표면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빛의 작용이 필요하다. 회화를 벽에서 떼어 공간 속에 매달면 회화의 표면을 비추는 빛은 뒤편으로 사각의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 때문에 드러난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 회화 작품이 그 자체로 신체성을 발휘하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이트(Bertolt Brecht)가 말한 소격효과 같은 것인데,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는 순간 현실적인 장치들을 보이게 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해준다. 빛과 그림자를 통해 회화가 표면과 프레임뿐 아니라 이미지와 공간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 수많은 이미지를 그려 회화적 환영을 극대화하면서도 자수로 표면을 강조하여 평면성을 드러낸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특성이 공존하는 작업이다.
보통 회화와 관련해 물감의 물성이 중요하게 이야기되는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물감이 얹어지는 천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바탕이기도 하다. 실은 캔버스의 천과 같은 재료이기에 이질감 없이 캔버스 위의 이미지와 합쳐질 수 있다. 이미지에 섞여 들어가는 실이 만들어 내는 촉각적인 효과는 나 혹은 관객이 회화의 표면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 본인의 작업을 설명할 때 ‘연극적 회화, 회화적 연극’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작품과 달리 전시는 전시 기간이라는 일시성이 있어서 나는 전시를 프로젝트라 부른다. 프로젝트 안에서는 회화가 주연이다. 회화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프레임 안에서 완결성을 가져야 하지만 나의 현실, 전시의 주제, 전시장의 상황 등에 따라 이야기 생성의 가능성과 맥락이 조금씩 바뀐다. 회화와 회화가 놓이는 공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구조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그림 하나가 놓이면 공간의 이야기가 바뀐다. 작품의 표면을 가면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표면 위의 물리적 이미지인 회화를 통해 그 표면 너머를 볼 수 있는 기억과 서사를 자극하고, 관객들은 회화가 놓인 공간을 감각하게 된다. 결국 전시는 일종의 회화적 연극이다.
- 전반적인 작업 진행 과정을 설명해주면 좋겠다.
프로젝트별로 ‘확산희곡_돌의 노래’, ‘야반도주’, ‘과거의 현재의 미래’, ‘무간(無間)_Interminable Nausea’, ‘이중사고_Homosentimentalis’, ‘현현_불, 얼음 그리고 침묵’ 등의 표제가 있다. 표제의 의미 구조, 이미지의 구조를 생각하면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자연히 당시 내가 겪고 느꼈던 것들이나 내가 주목하는 키워드들이 작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무간’은 간격 없음, 지옥, 열반이라는 뜻으로 당시 내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간격 없음에 대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관객과 작품(의 표면) 사이의 간격 없음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이렇게 구조적인 틀이 잡히면 유희가 시작된다. 집을 지었으니 그 안에 생태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 이미지들을 그려 넣는다. 구체적인 이미지가 채워질수록 환영이 만들어지고, 가짜인 환영을 벗어나 물리적인 속성들을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바느질을 한다. 촉각적으로 바느질된 실은 이미지의 부분인 동시에 표면의 부분으로 작동한다. 자수 부분에 굴곡이 생겨 입체적이고 촉각적인 표면이 만들어지고 전시장의 빛을 표면에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면 외부의 빛까지 회화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자수를 한 뒤 다시 이미지를 그리기도 하는데 화면 속 미세한 공간들이 계속 보여 질려서 멈출 때까지 이미지를 쌓아간 작품이 ‘homosentimentalis’(2017)이다.
- ‘초상풍경’(2020)에 대해 ‘동굴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 누군가의 초상, 색과 풍경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작업’이라 말했다. 누구의 초상화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허구의 인물도 있긴 하지만 ‘초상풍경’은 대부분 실존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초상이다. 누군가를 얼굴의 이미지가 아닌 그 사람의 목소리, 성향, 취향, 가치관들이 종합된 구조로 떠올려 동굴의 풍경으로 그려냈다. 사용된 색은 매우 즉각적으로 강하게 인물의 인상을 전달한다. 이 작업에서도 거리가 중요하다. 작품마다 동굴 풍경의 거리감이 다르다. 여기에는 나와 초상 주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거리도 담긴다. 누군가는 초상으로 읽고, 누군가는 풍경으로 읽을 텐데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 ‘현현_쌍둥이’(2018), ‘현현_불, 얼음 그리고 침묵’(2018) 등에는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균형을 맞추는 남자_Man Balancing_CCW’(2020)에는 SF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동굴그림동굴_All the world is green’(2019)은 우주 공간을 그린 것 같다. 화면에 그려질 이미지들은 어떻게 선택하는가? 또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 작품에는 실재하는 이미지와 상상의 이미지가 함께 한다. 예를 들어 ‘현현_불, 얼음 그리고 침묵’에는 내가 이란에 갔을 찍은 풍경 사진과 다양한 경로로 모은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큰 그림인데 프레임 없이 그림의 가운데부터 바깥으로 그려나갔다. 눈으로 어림잡아 그렸기 때문에 수직과 수평이 잘 맞지 않아 물리적으로 약간의 어지러움을 발생시킨다.
개인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사이키델릭한 것을 좋아한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도 좋지만 예민하게 심리적으로 무언가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를 보면 굉장히 몰입하게 되고 그만큼 허구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강해진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극한이나 본성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고, 사이파이(Sci-fi) 영화의 특성이나 색채를 매력적이라 느낀다. 또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처럼 과거에 만들어졌는데 현재보다 더 먼 미래를 이야기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과거에 만들어졌기에 과거의 시간성이 드러나지만, 그 이야기는 미래를 향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현재의 시간까지 뒤섞인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내 회화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고,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는 뒤죽박죽인 시간성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장치라 생각한다.
- ‘초상풍경’이 전시장에서 군상이자 풍경으로 읽히길 원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인체상을 인식하듯 작품을 인식하길 원해서인가? 작품의 크기도 이와 밀접할 것 같다.
누군가의 초상들이 공간에 모여 있으니 말 그대로 군상이고 동굴의 풍경들이 재현되어 있으니 풍경이기도 한 작업이다. 작품의 크기는 매우 중요한데, 내 작품은 대부분 150 x 150cm 크기의 정사각형 모습이다. 나는 정사각형이 단호하게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개체로 오브제의 속성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초상화가 그려지는 캔버스는 세로로 길고, 풍경화는 가로로 길다. 그런데 내 작품은 가로와 세로가 같아 초상도, 풍경도 아닌 비율이다. 150 x 150cm는 내가 좋아하는 크기이다. 내 키보다 조금 작지만 벽에 걸면 나보다 조금 커진다. 앞서 말한 얼굴을 들이미는 듯한 적극적인 회화와 연결할 수 있는데, 그저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인체처럼 혹은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작용할 수 있는 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