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10일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을 때, 독서 광풍(狂風)이 불겠구나, 짐작했었다.
솔직히 말해보자. 책보다 폰이 더 익숙하지 않나. 바스락바스락 책장 넘기며 소설을 읽는 것보다 검지로 쓰윽 쓰윽 올리는 웹소설이 더 편하지 않나. 그래서 궁금했다. 한강이 쏘아 올린 열풍이 금세 식진 않을지, 결국에는 미풍(微風)으로 그치고 말지.
1년이 훌쩍 지났다. 며칠 전 동네 도서관을 들렀다. 이제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는 빌림 예약을 걸어놓지 않아도 된다. 사서는 “그래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고 했다.
그 1년 새 ‘텍스트힙’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모르는 이 있을까 싶어 덧붙이면,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다는 의미의 ‘힙(Hip)’을 합친 조어다. 독서하는 행위를 멋지게 받아들인다는 뜻일 텐데, 책 읽는 일은 원래 멋진 일이다. 평소 안 해서 그렇지.
소셜미디어(SNS)는 좋은 도구가 됐다. 자신이 읽은 책이나 멋진 문구들을 그것으로 소통하고 소비한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는 이도 꽤 늘었다.
셀럽이 추천하니 MZ가 읽는다
셀럽(유명인)을 닮고 싶은 젊은이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본다. 그런 샐럽이 책 한 구절, 한 문장에 감명받았다는데, 가만있을 수 있을까?
올 초 인기 걸그룹 ‘아이브’ 장원영의 말 한 마디가 출판가를 뒤흔들었다. 한 예능·교양 프로그램에 나와 〈초역 부처의 말〉을 추천했는데, 눈 깜짝할 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은 일본 승려 코이케 류노스케(小池龍之介)가 부처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번짐 효과도 상당했다. 이 책이 인기 끌면서 불교와 관련한 서적이 덩달아 주목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타르타’의 판매량도 급증했다.
4년도 더 된 얘기지만, BTS(방탄소년단)의 RM은 사라졌던 책도 다시 살려냈다. 2002년 출간된 〈요절: 왜 죽음은 그들을 유혹했을까〉. 조선시대 선비 화가 윤두서부터 근대서양화의 거목 이중섭, 시대를 앞선 천재 조각가 류인까지 요절한 국내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예술인문서다. 청주교대 조용훈 교수가 썼다.
있는 지도 몰랐던 이 책을 세상에 끄집어낸 건 BTS의 팬덤 ‘아미’다. 그들은 BTS의 2020년 활동 당시 뒷이야기를 모은 DVD ‘BTS Memories of 2020’의 한 장면에서 이를 발견했다. RM이 공연 도중 짜장면을 먹고 있다. 테이블 한 귀퉁이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겉면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알아냈다. 팬들은 출판사(효형)에 끊임없이 출간해달라고 요청했고, 효형은 결국 재출간을 결정했다. 글로벌 스타의 영향력이 이 정도다.
읽는 것으론 만족 못한다, 이젠 쓴다
텍스트힙은 현재 ‘라이팅힙(Writing Hip)’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역시 조어다. 단어 그대로 글 쓰는 행위를 즐기는 현상이다. 필사(筆寫)라든지 손글씨로 텍스트힙에 동참한다. 가만 보면, 이제 읽기에서 쓰기로 넘어가는 중이다. 좀 더 능동적으로 텍스트힙에 참여하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권용진(49·의사)의 취미는 ‘만년필’이었다. 처음엔 저렴한 제품을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점차 개수가 충족되니 어느덧 글쓰기로 넘어갔고, 마침내 성경 필사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 행위가 “따뜻하다”고 했다. 만년필을 손에 쥘 때의 느낌부터 스르륵 미끄러지듯 써 내려갈 때, 오늘의 ‘할당량’을 끝내고 문장을 한눈에 넣을 때, 그 느낌이 그렇다고 했다.
셀럽들도 필사에 한창이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틈틈이 책을 읽거나 필사하는 모습을 보여 관심을 모았다. 걸그룹 AOA 출신 가수이자 배우 설현은 필사 노트만 여섯 권이 넘는다.
배우 문가영에게 책은 ‘쉼터’다. “생각이 많아지거나 우울할 때 안정과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독서법 중 하나는 독서노트를 작성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구절과 문장을 기록한다. 나름의 방법도 있다. 노트를 펼쳤을 때 오른쪽 면은 빼곡히 쓰고, 왼쪽 면은 비워둔다. 언젠가 그 책을 다시 읽을 때 처음에 놓쳤던 문구를 채우기 위해서다.
교보문고는 해마다 손글씨 대회를 연다. 11회째를 맞은 올해는 역대 최다 참가자가 참여했다. 작년 4만4993명보다 67% 늘어난 7만5134명이 참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처음 시작한 2015년부터 올해까지 누적 참가자만 18만5000명에 이른다.
교보문고는 여기에 더해 매년 손글씨 대회 수상자 중 한 명을 선정, 그의 이름을 담은 폰트를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한다. 그중 ‘2019년 폰트’는 가장 많은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2020 박도연’과 ‘2022 김혜남’ 폰트는 주로 드라마 자막이나 페스티벌의 타이틀 폰트로, ‘2021 성지영’과 ‘2022 우선아’ 폰트는 이름표 등에 쓰이고 있다.
텍스트힙이나 라이팅힙은 느리다. 모바일은 빠르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느림의 미학을 빠름의 상징인 SNS에 올리고 공유하는 트렌드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