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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환상과 서정의 감성언어 -김일해(金一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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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호 ⁄ 2008.01.07 16:15:25

자연연령 40을 넘기면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안개가 걷히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인생살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40대 중반으로 다가서고 있는 김일해(金一海 )의 최근 작업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한다. 30대 중반에 남다른 감성적인 그림으로 주목받아온 그는 재현적인 구상회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데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과슈화처럼 부드럽고 밀착력이 강한 독특한 표현기법으로 유화의 잠재적인 표현력을 일깨워 줌으로써 독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타고난 감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리드미컬한 터치가 뒷받침되고 있다. 주저함이 없이, 한달음에 완결되는 듯한 매끄러운 호흡으로 만들어내는 그의 유화는 한마디로 감칠맛 나는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더러는 춤추는 듯한 흐름을 가진 붓 자국이 선명히 남아 감점선의 실체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미적 감각은 순수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엇보다도 색채 선택에서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풍경이든 정물이든 현실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의적인 색채 배열로 현실로부터 독립된 회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색채 이미지는 패셔너블한 세련미로 요약된다. 보색대비의 강렬함은 물론이요, 중간색조의 은근한 조화 그리고 미점(美点)의 활용 등에서 패션의 감각을 발휘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색채 이미지는 한마디로 현대라는 시대감각에 일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그는 확실히 남다른 미적 감각으로 구태의연하고 진부하다고 치부되는 재현적인 구상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의 그림은 형태 해석 이전에 색채배열이 주는 아름다움만으로도 우리의 미각을 현혹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지난 수년간 정체기에 있는 듯했다. 일부에서는 매너리즘에 빠져든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도 있었다. 그간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변화시켜온 사실을 주시해온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감성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확인 시켜 주고 있다. 최근 1년간의 작업은 그같은 주변의 우려를 일소하고 있다. 예전의 감각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로부터 한 걸음 진전된 세계로 진입하려고 한다.

지난 수년간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시련기였다. 일상적인 삶과 관련된 문제들 속에서 부대낀 탓인지 삶을 응시하는 자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삶에 대한 예기치 않은 고뇌를 통해 오히려 생각의 깊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삶의 내연(內延)에 관계된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한층 단련되고 또는 순화된 의식을 갖게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어둡고 긴 시련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의 미적 감성은 새로운 얘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새로운 얘기, 그것은 새로운 표정이기도 하다. 그림의 표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련을 직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결삭은 표정을 얻게 되었다고 할까. 그의 최근 작업은 이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섬세하며 온화한 느낌을 지어낸다. 밖으로 드러나던 붓 자국이 현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유연한 인상을 준다. 그런가 하면, 색채 이미지에서도 강렬한 대비에서 오는 시각적인 긴장감보다는 중간색조의 고상한 분위기로 이행하고 있다. 감각적인 부분을 억제하려는 의지의 결과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거의 모노크롬(단색)에 가까운 극히 절제된 색채로 한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게 보이지 않는다.

단색조만으로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같은 단색조의 작품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감각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의미로 시선을 돌리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단색조의 풍경은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실제를 재현하고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이미 시지각만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세계가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지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 그것은 내면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복잡한 현실사로부터 내적인 욕구의 완곡한 표현인지 모른다.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차단된 세계를 꿈꾸는데 따른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해,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줄곧 회화적인 이상 세계를 모색해 왔다. 현실에 근거하면서도 우리의 감정이 즐거움을 얻고, 우리의 의식이 자유를 맛볼 수 있는 회화적인 화상의 공간을 탐닉해 왔다. 그의 미의식이 탐조하는 순수미의 시계는 현실로부터 차단된 영원의 세계였다.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그림에 투척하는 이유는 영원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미적 감각을 신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미적 감각은 순수미에 이끌리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형의 문제 즉 형태 해석 및 공간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차츰 구체적인 성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작업은 형태해석과 관련하여, 사실적인 이미지를 점차 소거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형태를 지워 나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각적인 단조로움인 동시에 사유 공간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현실공간의 이면에 자리한 의식세계로야말로 우리의 정신이 기거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그림에서 구하는 것은 순수미에 대한 시각적인 감동과 그 감동의 여운으로 음미되는 내적인 세계, 즉 그림의 내용이 지시하는 정신의 세계의 환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에 표현되는 일체의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미지는 그같은 환희를 공유하는데 필요한 시각적인 이해의 열쇠가 된다. 물론 시각을 통해 인지되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정신의 세계가 만들어 내는 환희까지 도달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각적인 이해의 열쇠가 적으면, 즉 구체적인 형태가 감소하면 사색과 사유의 필요성이 증가하게 마련이다. 최근 작품에서 구체적인 형태가 감소하는 현상은 시각적인 이해의 폭을 좁히는 대신, 뚜렷하지 않은 형태를 뚫고 들어가 만날 수 있는 사색 및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현실적인 공간개념에 전혀 개의치 않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는 어쩌면 의식의 자연물로서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는 이제 보이는 풍경 그 자체에 매혹되지 않는다. 그 풍경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래서 설명적인 표현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한다. 집이 있는 풍경 같으면 그 집의 외형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집과 주변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정서를 포착하는 데 힘쓴다. 그러다 보니 형태는 점차 감추어지고 필요 최소한의 이미지만 남긴다. 아울러 형태가 사라진 부분에서 자연히 추상적인 공간이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으니 색상의 내왕이 자유롭다. 투시되고, 투과되며, 동시에 투영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상상의 여지가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는 무엇을 나타내는 일로부터 무엇을 감추고 내포시키는 일로 조형적인 사고를 진전시키고 있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실제를 통한 회화적인 환상의 서정적인 아름다운 물체로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의 그림에는 문학적인 은유가 담겨 있다. 눈으로 읽혀지는 감각적인 표현에서 의식을 투영시키는 내면적인 표현방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운이 길다. 간단히 시지각만으로 간취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은 우리들 개개인의 지식과 체험과 상상에 의해 조합되는 내적 의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현실 너머 저쪽에 존재하며,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회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글 ·신항섭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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