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필요 이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삶은 빛이 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노래처럼 꾸며지는지 모른다. 반면에 궁핍한 시대의 그림에는 치열함이 있었다.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일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기에 그림에도 노동과 같은 치열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궁핍한 시대의 그림들에게서 받는 감동이 훨씬 크고 진하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런 궁핍한 시대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역시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한 영향이지 싶다.
이영박의 그림 속에서는 삶에 대한 치열함과 진지함이 감지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과연 삶이란 달콤한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한 정서가 포진하고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무거운 덩어리가 가슴에 들어와 앉는 듯하다. 단순히 감동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미흡한, 아니 언어로 형용키 어려운 그런 뭉클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필경 치열한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림에 대한 진정한 사랑, 아니 삶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만이 그런 표현을 가능케 하기에 그렇다. 그는 밀물같이 밀려오는 감동의 여운을 담은 그림을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의 중심에 자신을 세우고 있다. 그러기에 조금은 외롭고 막막하다는 인상이다. 무언가 무거운 짐을 들지 않으면 왠지 허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는 순전히 그 자신의 신념에 의한 선택일 뿐이다. 쇠를 강하게 만드는 담금질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수록 예술가의 정신의 빛은 더욱 빛나기 십상이다. 그의 그림은 그런 정신적인 포만감을 나누어주는데 인색하지 않다.
우리 시대의 그림들은 밝고 맑고 경쾌한 색채 이미지가 지배하는 경향이다. 그런데다 붓 터치는 곱고 부드러우며 따스한 감촉을 느끼게 한다. 그림의 소재 및 내용 또한 대체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따른다. 거기에서는 아름다운 꿈과 사랑 그리고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시대의 정서에 적합한 이미지인 셈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젖어 있는 한국 화단의 풍조를 역류하는 듯한 그의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의 그림은 소재 및 주제 또는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시각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의 본질적인 가치의 하나인 아름다움을 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조형세계 그 본질을 추구하는데 한 치도 소홀하지 않다. 찬찬히 뜯어보면 점이나 선, 색채, 어느 것 하나 오직 아름다움으로 귀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닉되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란 확실히 시각적인 즐거움과는 다르다. 어쩌면 문학적인 감수성 및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나 그 진면목에의 접근이 가능한지 모른다. 왜냐하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밝고 경쾌한 색채 이미지나 곱고 부드러운 붓 터치를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충족시키는 조형적인 특색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렵다. 붓으로 선을 긋고 명암을 덧붙이는 일반적인 기법과 달리 물감이 질척이면서 엉키는 듯한 색다른 표현기법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화면의 바탕은 마치 고목의 껍질처럼 두텁고 견고한 질감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감정의 진폭이 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고뇌없이 아름다운 형태을 재현하기에는 세사에 대해 할말이 너무나 많은 것은 아닐까. 소재에 대한 형태해석을 보면, 절반은 묘사적이고 나머지 절반은 물감과 오일이 엉키는 물리적인 현상에 맡기는 듯한 식이다. 한마디로, 그린다는 행위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부묘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세계에 목표를 두고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물감이 질척이고 엉키는 듯한 표현기법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감소시킨다. 어느 면에서는 고통스러운 얼굴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뗄 수 없는 어떤 흡인력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그와 같은 표정이 되레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의 끈을 놓아주지 않는 까닭이다. 형태를 만들어 가는 붓 자국이며, 물감 자국 하나 하나를 찬찬히 뜯어보지 않을 수 없도록 유인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것은 아마도 숙성된 감정의 표현이기에 그런지 모른다.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두는 동안 어디선가 침입한 효소가 감정을 발효시켜 묵은 이미지, 즉 숙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처럼 농익은 이미지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왜 이런 방식으로 그리는 것일까. 굳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회피하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가 만들어내는 표현기법은 세상에 대한 그만의 이해방식이자 해석, 그리고 선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만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독창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의무이다. 조형적인 개별성이란 화가에게는 궁극적인 세계이자 이상세계이다. 아무리 시선을 현혹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할지라도 독자적인 조형공간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그림에 불과하다. 시각적인 즐거움 또는 쾌감을 회피하는 까닭은 마음을 울리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시각적인 즐거움이 평면적인 영역이라면, 마음의 감동은 입체적인 영역일 수 있다. 입체적인 상이 만들어지지 않는 그림은 아무리 시각적인 유혹이 강할지라도 감동을 나누어 주기에는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 시지각을 통해 마음에 비치는 이미지, 즉 감동을 야기하는 이미지야말로 입체적인 영역일 수 있다. <上>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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