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는 그림의 기초이자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체소묘는 인물화의 골격인 셈이다. 인물화에서 소묘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소묘는 비록 연필이나 목탄 따위를 이용한 단색화이지만, 명암기법을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평가한다. 소묘와 더불어 크로키 역시 인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양식이다. 크로키, 즉 속사화는 움직이는 인체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묘사방법인데, 불과 몇십 초에서 길어야 2~3분 사이에 끝난다. 속사화는 인체의 개략적인 형태, 즉 윤곽을 잡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렇듯이 소묘와 크로키는 동적인 존재인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단색화로서 한 작가의 기본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김인화는 인물화보다는 풍경을 위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체 소묘 및 크로키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무척 드문 일인데, 학구적인 태도로 초지일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읽혀진다. 다시 말해, 그림에 대한 그의 겸허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은 그 동안 간헐적으로 발표해왔을 뿐, 그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랫동안 병행해온 소묘 및 크로키를 포함하여 누드화 소품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이다. 더불어 누드 작품집을 간행함으로써 인체소묘 및 크로키에 대한 그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된 셈이다. 연필화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의 누드화는 소묘 및 크로키를 포함하여 소묘 위에 채색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채색을 가미한 작품일지라도 담채화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더러는 유채를 사용하는 일도 있으나 그 숫자는 많지 않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누드화는 소묘 및 크로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소품에 국한하고 있는 것도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본격적인 누드화에 대한 열망은 적어 보인다. 소묘와 크로키를 지속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누드화로서의 성격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누드화는 오히려 인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수사 없이 인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묘 및 크로키에 바탕을 둔 세미 누드 형식의 작품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의상이나 커다란 숄이나 천 따위의 소품을 이용한 작품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 누드보다 더 에로틱하게 보인다. 물론, 에로틱하다는 말은 성적인 매력을 의미한다. 성적인 매력이라고 하더라도 관음증을 유발하는 그런 값싼 것과는 다른, 품격이 따르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포즈가 대담한 작품도 적지 않다. 설령 그런 대담한 포즈의 작품일지라도 난하게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독특한 작품일 뿐이라는 인상을 줄 따름이다. 이처럼 담백한 느낌은 그 자신의 표현감정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자극을 유도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그런 의도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단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솔직한 찬미의 마음만이 있을 뿐, 성적인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있지 않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이야말로 소묘 또는 크로키라는 단색화의 순수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키는 요인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누드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자 특색은 누드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소묘와 크로키에서 느끼게 되는 내적인 정서에서 비롯된다. 소박하고 단출하게 보이는, 그래서 수줍은 듯이 느껴지는 선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선은 무르익어 있으나 자기과시가 없다. 기교적인 화려한 맛이 없는 대신에 진솔하게 형태를 잡아내는 선에서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
이는 오랜 동안 지속돼온 작업과정에서 얻어지는 세련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과시나 과장법을 쓰지 않고 오직 누드가 가지고 있는 그 내적인 아름다움을 들추어내려는 의지의 소산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의 누드화는 새삼 인체의 아름다움을 포함하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격미를 표출하는데 중점을 두는 듯한 인상이다. 설령 직업 모델이라고 할지라도 단순히 그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는데 머물지 않고, 한 인격체로서의 이미지에 합당한 내적인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그의 누드화가 보여주는 특징 중의 하나는 담채의 아름다움이다. 연필 소묘 위에 덧입혀지는 담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명암 및 피부색의 표현에서 남다른 시각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순수하고 순정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수채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투명한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미적 감각 자체가 그런 표현기법에 특출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러한 맑은 이미지는 수련 및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통해 익히 미적 감각의 한 증표인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소재에 탐닉해온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만큼 맑다는 얘기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천적인 그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또한 순수하고 맑은 세계를 구현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어떤 연유로든 그의 누드화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기에 누드화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허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누드화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정서 및 시각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자연미에 의탁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발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