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화 화백 -약력 1943年 京畿 加平 生 서라벌 藝術大學 美術科(現 中央大學校) 弘益大 産業美術大學院 履修 -경력 木友會 公募美術大典 大賞受賞 2007韓國具象美術大祭典 特別賞 大韓民國 美術大展 特選(’82, ’88) 韓國 現代美術 招待展(國立現代美術館) 藝術의 殿堂 開館 現代美術 招待展 서울美術大展 招待作家, 運營委員 歷任 서울國際美術祭(藝術의 殿堂) KOREAN PEACE ART FAIR(日本) 300餘回 EROTISM 그 美學의 言語展, 靈魂을 담은 아름다운 그릇展 個人展 6回(朝鮮日報美術館, 서울갤러리 外) 스페인, 홍콩, 중국 상하이, 뉴욕, 모스크바, 배이징 ART FAIR 大韓民國美術大展 審査委員, 運營委員 歷任 韓國美術協會 諮問委員, 木友會 副理事長 歷任 서울아카데미 諮問委員, 大韓民國 繪畵祭 代表 歷任
그림은 화가 스스로의 인품을 반영한다. 이는 정신세계를 추구한 동양의 문인화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그림은 어떤 경우에라도 화가 자신의 내면세계, 즉 정신 및 감정의 한 표현이기에 그렇다. 설령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적인 표현양식의 그림일지라도 소재선택을 포함하여 색채 이미지 구성 구도 명암 또는 정서적인 측면 어느 곳에든지 화가 자신의 성정이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그림은 단순히 손의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내면세계가 담긴다는 뜻이다. 내면세계는 그림에 내재된 의미, 즉 제재 또는 내용을 뜻한다. 내용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다 보면 그림이란 한 화가, 즉 예술가의 개인적인 인생관의 총체적인 표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김인화는 화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따스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세상사에 대한 일체의 고민을 놓아버린 듯 항상 즐거운 표정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따라서 그 자신에게 도무지 나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편하게 보이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서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유추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다. 그림이 인품을 반영한다고 한다는 관점에 서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추측은 실제와 다르지 않다.
그의 그림을 보면 소재 및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감상자에게 아주 편히 다가온다.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부드럽고 따스하며 정제된 듯한 색채 이미지 및 묘사기법에서 비롯되리라는 생각이다. 붓 터치는 곱고 부드럽다. 공격적이지 않고 순응하는 쪽이다. 그와 같은 붓 터치가 지어내는 형태는 나긋나긋하여 흡사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포근한 기분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도 없지 않다. 한마디로 차가운 현실적인 감정과는 달리 꿈꾸는 듯한 낭만적인 표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감각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그림은 세상과의 소통, 즉 대화를 위한 제안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고수한다. 다시 말해 그림이란 어떤 경우에라도 감상자와 편안한 대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림이 주는 정서적인 효과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아름답고, 그래서 정서적으로 편안해야 하며, 또한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일반적인 요구에 성실히 답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창의성이란 문제와 관련해 항상 새로운 조형세계를 모색하고 탐구한다. 사실적인 형태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대입하는 것도 창작의 윤리성에 대한 그 자신의 입장 천명이다. 그의 그림은 대략 산을 포함한 자연풍경 및 연과 수련 그리고 누드와 소수의 인물로 요약되는데, 한결같이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의 순화된 이미지로 연관한다. 물론 그 숫자는 많지 않으나 정물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의외로 시야가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산과 연 수련이 압도적으로 많다. 숫자로 비교할 때 산과 연 그리고 수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 제재를 반복적으로 그린다. 어찌 보면 소재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법하다. 수십 년 동안 이들 제재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무엇때문일까? 이처럼 한정된 제재를 탐닉하는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 또는 성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그 자신의 일상생활은 물론이요, 예술활동과 관련한 행동반경을 의식적으로 넓히지 않으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화려하고 번다한 생활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소박한 성격인 그로서는 시선을 좁히려는 태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내적인 충실 쪽을 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이 그림에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과 수련이라는 소재의 경우 다채로운 조형적인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에서 변주곡이 오리지날 곡보다도 아름다운 경우는 얼마든지 있듯이, 그의 그림에서도 이미지 변주가 만들어 내는 시각적인 즐거움은 적지 않다. 소재 배치에 따른 구성의 변주는 물론이요, 표현기법 및 표현방법 그리고 색채 이미지의 변주는 음성언어의 동어반복과 같은 지루함과는 완연히 다른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한마디로 조형언어로서의 그림의 묘미란 바로 구성이나 구도 그리고 채색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데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는 사실주의 미학으로 화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적어도 재현성이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손의 기술이 언제나 자유롭게 응답한다. 덧붙여 조형적인 상상에서도 자유롭다. 이 정도라면 사실적인 묘사에 관한 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데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조형세계는 언제든지 견고한 사실적인 형태미를 근간으로 한다. 아무리 다양한 형태변조 즉, 조형적인 변주가 이루어질지라도 구체적인 형태를 외면하지 않는다. 설령 사실적인 형태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버리지 않는다. 추상적인 이미지 가운데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고 있다. 이는 그의 그림에는 사실성과 추상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론적으로는 상충하는 이들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하나의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유채화인데도 마치 수채화와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선염기법이 이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감을 오일에다 물처럼 희석하여 사용함으로써 물감이 번져나가는 발묵 또는 선염과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유채라고 해서 반드시 겹겹이 쌓아올리듯 진득하게 발라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어쩌면 현대회화가 공헌하는 바는 재료 사용에 대한 전통적인 방법을 타파하고 다양성을 찾아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랜 동안 누드 소묘작업을 해왔다. 크로키와 소묘를 병행함으로써 선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작업에서 누드 소묘는 담채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본격적인 유채 누드화를 그리는 일이 거의 없다. 인물화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도 한 이유이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은 풍경 속의 일부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물이 중심이 되는 그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아마도 그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그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되리라는 생각이다. 정태적인 대자연의 그 신묘한 아름다움에 취하다 보면 동적인 인물은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가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실제에 대한 아름다움이지만, 그의 눈을 거쳐 마음속에 투영되는 이미지에는 이미 감정이 개입된다. 그리고 그 마음속의 이미지가 손의 기능을 거쳐 캔버스에 투사될 때는 이미 현실성은 사라지고 만다. 대신에 거기에는 회화적인 환상만이 자리할 따름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현실을 빙자한 회화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들 어떠랴. 그가 꾸며내는 가공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예술가의 감동적인 진술에 다시 감동하면 그 뿐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런 감동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려는 것이다. <글·미술평론가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