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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장 김학준

나라 사랑, 겨레 사랑 기리며 계승 발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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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8호 심원섭⁄ 2008.05.26 15:03:32

오는 6월 21일이면 중국 상하이 홍커우(上海 弘口) 공원에서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의거를 펼친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탄신 벌써 1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윤 의사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윤 의사는 19세 때 이미 고향인 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32년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의거를 펼쳤던 것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와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모자란 제가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걱정이 앞서지만, 그러나 많은 임회원들이 동참해 주신다면 과오 없이 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본회는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과 상하이 의거 76주년을 맞아 상하이 의거를 가장 먼저 알린 동아일보사 그리고 사단법인 월진회 등 윤 의사와 관련된 유관 단체들과 전임 대통령, 국무총리 등 고문님들과 함께 앞으로 거국적인 기구로 발전시켜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아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열혈남아 윤 의사 삶 되새겨보는 계기 이어 김 회장은 “당시 25세의 조선 청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점령 승전 기념식장에 던진 폭탄은 일제 침략군 수괴를 순식간에 처단해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백만 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조선 청년 한 사람이 단행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굳건히 하고 항일 운동의 기치를 더욱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역설하면서 “여러 가지 특별 기념사업을 통해 열혈남아 윤 의사의 삶을 되돌아보며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은 무엇이고, 특히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김 회장은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과 상하이의거 76주년을 온 겨레와 함께 경축하고 거국적인 특별 사업을 펼쳐 나감으로써 살신성인하신 윤 의사의 숭고한 나라 사랑-겨레 사랑 정신을 기리며 계승 발전시켜 21세기 위대한 통일 선진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매헌 윤봉길 의사 탄신 기념사업회’ 김학준 회장과 5월 23일 오전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매헌기념관 2층 회장실에서 가진 일문일답이다.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벌써 1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매헌이 태어난 1908년은 조선의 마직막 임금인 순종 2년,으로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움을 실감할 수 있는 시대였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빼앗는 이른바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정치가 실시되었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백성들의 항일열을 더욱 들끓게 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던것이다. 일본은 고종으로 하여금 황태자인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한일협약(丁未7條約)을 맺게 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내치권(內治權) 마저 박탈해 사실상 조선의 주권을 형해화하한 시기였다. 매헌은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매헌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누가 뭐라고 하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형성한 것도 시대의 고통과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 의사가 이 시대에 주는 교훈은 어떤 것인가? 매헌은 어둡고 괴롭던 일제 치하에서 농민운동가로 몸을 일으켜 마침내 항일 독립투쟁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에 바친 절세의 애국자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재하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사상적 영향 아래, 중국 상하이(上海)의 홍커우(弘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 기념일인 천장절(天張節) 식장에서 물통폭탄을 던져 일제 고위 관리들을 살상함으로써 승승장구하던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만약 윤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국제사회는 우리가 독립혼을 잃고 아주 잠든 것으로 여겨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국군 100명도 해내지 못할 역사적 대사를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경탄하며 중국 국민당 당수이던 장개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 의사의 대담무쌍한 의거와 거룩한 순국은 우리 겨레의 해방 투쟁을 소생시킨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윤 의사는 만고의 위대한 애국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사업들을 펼칠 계획인가? 24년 7개월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다 갔지만, 윤 의사의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없었을 것이며, 또한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윤 의사의 생애를 많은 국민들에게 올바르고 자세하게 알려주는 사업을 한다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그래서 윤 의사에 관한 평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6월 3일 새로 발간할 예정이며, 일본에서도 평전을 발간하고, 영문으로도 발간하여 일개 테러리스트로 평가절하됐던 윤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고 국제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작업을 할 것이다. 끝으로,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과 상하이 의거 76주년을 온 겨레와 함께 경축하고 거족적인 특별 사업을 펼쳐 나감으로써 살신성인하신 윤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겨레 사랑 정신을 기리며 계승 발전시켜 21세기 위대한 통일 선진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예산이 만만찮게 들어갈텐데, 어떻게 마련하고 있나? 현재로서는 정부에서 나오는 예산은 없다. 많은 회원들이 일정하게 회비를 내고 있고, 이사들도 성의껏 회비를 내고 있어 사업을 하는데 큰 어려움 없이 해 나가고 있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 씨가 상하이 총영사 시절부터 현재 국가보훈처장으로 있으면서도 많은 신경을 써주고 있다. 특히 김 처장은 상하이 총영사 시절 홍커우(虹口) 공원 안에 있는 매헌의 기념관 명칭이 ‘매정(梅亭)’이라고 돼 있는 것을 윤 의사의 아호인 ‘매헌’ 내지는 ‘매헌정’으로 고치려고 하는데도 많은 힘이 되어 주신 분이다. 중국 정부에서도 윤 의사의 의거를 대단한 행동으로 생각하며 많은 신경을 써주려 하고는 있으나, 많은 소수민족들이 있는 바람에 그들의 요구를 전부 충족시킬 수 없어 조금 늦어지고 있다. 늦어도 내년에는 해결되리라고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회장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직전까지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계시다가, 대통령 당선 이후 매헌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던 내가 겸임해서 나머지 임기를 맡고 있다. 이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 윤 의사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며 그 의미를 존중하는 분이다. 그래서 서울시장 시절에 오히려 자원하다시피 회장직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기념사업회 회장은 아니셨고, 92년 민자당 대표시절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 제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을 맡으셨다. 당시 나에게 윤 의사 평전을 맡겨 유일하게 평전을 발간한 것이다. 이 대통령께서 이번 중국 방문에서 중국 고위층과 이 문제에 대한 해결 가능성은 없는가? 공식적으로는 아직 들은 바 없다. 그러나 이 대통령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입장이니까, 어떤 식으로 든 얘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해본다. 기념사업회의 구체적인 조직은 어떻게 짜여 있는가? 기념사업회는 윤 의사 탄신 100주년과 상하이 의거 76주년을 맞아 상하이 의거를 국내에 가장 먼저 알린 동아일보사 그리고 사단법인 월진회 등 윤 의사 유관 단체들과 역대 전임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등을 고문으로 모시고 거국적인 기구로 발전시켜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이 무려 7년 동안 기념사업회장을 맡는 열성을 보였으며, 현재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매헌기념관도 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김 의원이 적극 나서 건립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김 의원의 열정으로 기념관 근처에 올해 개교한 초등학교 명칭을 매헌초등학교로 명명하였으며, 곧 개통될 예정인 신분당선에 신설될 역 이름을 매헌역으로 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가지 특별 기념사업 등을 통해 열혈남아 윤 의사의 삶을 되돌아보며,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은 무엇이고, 특히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 대통령과 김덕룡 의원이 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은 남다른 이유가 있는가? 두 분은 같은 6-3 세대로서 64년 대학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하면서 옥살이까지 같이 한 동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윤 의사의 의거에 감복하여 숭배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김 회장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으셨는지… 92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윤봉길 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나에게 평전을 내보라고 천거하셔서 그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윤 의사 평전으로는 유일하게 나온 것이어서 계속 내 이름이 오르내렸고, 기념사업회에 간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생기면서 회장직을 맡았으며,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자연히 기념사업회장직도 겸직하게 되어었다.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감히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임회원들이 동참해 주신다면 과오 없이 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 의사와 동아일보와의 특별한 인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윤 의사께서 의거에 성공한 소식을 동아일보가 이틀에 걸쳐 호외를 발간하면서 알렸던 것이다. 당시에 기사를 송고하기 위한 통신수단이나 전송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까닭에 소식이 더딜 수밖에 없었으나, 동아일보에서 재빠르게 보도하는 바람에 조선총독부에서 보도관제를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5일 후에 친일언론인 매일신보에서 윤 의사 의거 사실을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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