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서부 지방 일리노이 주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정치인이 있었다.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지만 일리노이 주 바깥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가 어느 중요한 정치 집회에 연설 초청을 받더니, 그곳에서 단 한 번 열정적인 웅변으로 유명해져 하루아침에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서는 거물이 되어 버렸다. 그 정치인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2008년 오늘, 이번에도 유창하면서도 열정적인 단 한 차례의 연설로 유명해진 정치인이 또 등장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백악관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버락 오바마의 연설문은 그것 자체로 설득력 높은 철학이자 문학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를 ‘대중 연설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이유는 탁월한 웅변 능력에 있지 않다. 흑인 혼혈 출신으로 미국 사회의 소수 인종을 대표하면서도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의 정밀한 상황 인식과 막힘 없는 대안 제시가 그를 이 시대 최고의 명연설가로 만든 것이다.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과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역사상 최고의 대중 연설로 꼽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꿈꾸는 ‘변화’와 ‘희망’의 기수 오바마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한술 더 뜬다. 그의 연설이 케네디 전 대통령과 킹 목사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며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렇듯 그가 타고난 웅변가로 전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바마식 설득력의 비결 오바마 이전의 명연설가는 단연 클린턴이었다. 그런데 그 달변가 클린턴조차 오바마의 연설을 칭찬하고 있다. 오바마의 연설은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유세를 펼치는 장소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는 지지자들의 모습은 가히 ‘컬트’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 스타 탄생을 ‘오바마 매직’이라고까지 부르며 환호한다. 윌 스미스보다 잘 생긴 외모, 흐르는 듯한 말끔한 스타일, 정확한 발음과 카리스마 가득한 바리톤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최고로 좋은 대학과 로스쿨을 나왔다. 지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다. 이만하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그게 전부인가? 이번 선거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철저히 캐릭터 중심으로 간다는 사실은 오바마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논리적인 정책 대결을 무력화시켜버렸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청중들에게 충분히 전달했다. 사람들은 외모나 스타일보다는 일단 그의 연설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 있어.” 그의 낙관주의에는 신뢰가 가고 미래는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빌 클린턴은 그에게 동화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그의 입을 거치면 미국은 전쟁이나 일으키는 ‘강대국’이 아니라 ‘벽난로 앞에 둘러앉은 가난한 이주민이 꿈을 이루는 나라’라는 따뜻한 조국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준다. ■직접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힘 오바마의 연설이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유는 좋은 연설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바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연설의 소재로 즐겨 사용한다. ‘미국은 희망의 땅’이라는 내용을 말할 때는 아프리카 인의 혈통을 받은 자신도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부모님은 저에게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주셨습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선 이런 이름도 성공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밤 그들이 저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처럼 연설 내용이 말하는 이의 정체성과 일치할 때 청중은 연설자에게서 진정성과 호감을 느낀다. 오바마는 또 정책을 시시콜콜 소개하지 않는다. 비전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핵심어는 ‘변화’와 ‘희망’이다. 힐러리는 반대로 자신의 정책을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듣기에는 지루하다. 그러나 오바마의 연설은 아무리 들어도 두루뭉실하다. 좋다는 이야기인 줄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뭐가 좋은지는 모호하다. 그래서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군중들의 호응을 얻는데는 오바마 스타일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시적인 운율이 풍부하다는 것도 오바마 연설의 장점이다. 그는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문장을 연이어 반복하는 기법을 쓴다. 연설이 끝날 즈음에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청중들은 리듬을 타고 나오는 이 소리를 같이 반복하면서 환호한다. 오바마 연설의 이 같은 흡인력은 젊은 유권자들을 정치와 선거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바마니아(오바마와 마니아의 합성어)’들은 오바마가 연설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연설이 대통령 선거를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식 연설법의 다섯 가지 요체 1. 단순하게 표현할수록 힘이 있다 일반적으로 짧은 문장이 가장 좋다. 말은 시간의 예술이다. 계속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앞으로 끌고 가야 한다. 쓸데없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면 그 자리에 정체된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은 자꾸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길게 늘이거나 반복하지 말고 가장 쉬운 언어로 압축해서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러면 연설이 쉬워진다. 오바마의 문장은 힐러리보다 짧고 명료하다. 긴 설명보다 짧은 한마디 문장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어렵거나 긴 이야기는 그 내용이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청중이 일단 피하게 된다. 2. 리듬감 있게 반복하고 반복한다 오바마 특유의 반복적 언어는 청중의 감성을 자극한다. 어느 연설에서는 ‘우리는 고대하고 있습니다.(We cannot wait.)’를 반복 사용하면서 청중들의 머릿속에 이 구절을 완벽하게 심어놓았다. “우리는 좋은 직장을 얻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을 고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이 끝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10번 이상 반복되면 듣는 사람은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연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맞아요, 우린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 청중은 환호하지만, 오바마의 말에는 정확히 어떻게 하겠다는 표현은 없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하면 정말 그럴 것처럼 믿게 된다. 게다가 ‘변화와 희망’ 그리고 ‘할 수 있다’ 같은 표현은 청중들이 정말로 바라고 있는 말들이다. 오바마는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오바마처럼 청중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그 해답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반복해서 말하게 되면 정말로 사랑이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3. 새롭고 신선한 단어를 사용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나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식의 정치 연설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틀에 박힌 표현의 전형성 때문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보수적인 부모님의 슬하에서’로 시작되는 자기 소개의 결말은 보나마나다. 오바마라는 초보 상원의원을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게 한 것은 바로 신선한 연설 덕분이다. “미국은 민주당의 미국도, 공화당의 미국도 아니고, 미합중국일 뿐입니다. 미국은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도, 아시아계의 미국도 아니고, 미합중국일 뿐입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왔으면 공화당을 비난하고 민주당을 지지해야 당연하다. 그런데 편 가르는 소리는 전혀 안 하고 그는 ‘우리 모두’를 말했다. 청중들은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4. 진심이 담긴 말의 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은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똑같은 말이라도 힐러리의 말과 오바마의 말은 무게와 색깔이 다르다. 후보들은 누구나 교사의 봉급 인상과 대학생의 학자금 대출과 가난한 계층의 의료 보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홀어머니와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빈민운동과 민권 변호사를 거친 흑인 오바마의 말과, 부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법조계와 정계에 머물렀던 힐러리가 하는 이야기는 같은 무게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진심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느낌도 달라진다. 상대 입장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어야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전에 상대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려야 한다. 본인이 직접 연설문을 쓰고 ‘우리’를 강조하는 오바마의 설득력도 이 진정성에 있다. 5. 질문을 부메랑처럼 던진다 자신의 주장만 열거하기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져 청중의 환호성을 이끌어 내는 게 오바마이다. 커뮤니케이션 도중에 질문을 던지면 청중의 반응을 쉽게 끌어낼 수 있다. 반응은 당연히 상호 교감으로 이어진다. 듣는 사람은 일방적으로 설득당한다는 불쾌감 대신, 함께 만들어간다는 주체 의식 때문에 적극적이 된다. 청중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나온 결론이므로 그것에 확신을 갖는다. 이때 상대가 반응할 시간을 주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오바마가 어느 연설에서 강조했던 핵심이 ‘워싱턴을 바꿔야 한다.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였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며 질문하고 반응을 기다린다. 힐러리가 “나는 이것을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오바마는 “누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