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이 있다. 여럿이 모이면 수다떨기(?)를 좋아하고 목소리가 고음인 여성들인지라, 이들이 셋만 모여도 접시가 깨질 정도로 시끄러워진다는 데에서 유래한 속담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성차별적 인습으로 인해 생긴 말이지만, 남자들이 모인 곳보다 여자들이 모인 곳이 더 소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대 국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언어의 포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 같다. 총선을 전후로 17대 국회 말엽부터 각 당의 대변인에 여성이 하나 둘 임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서 특출난 외모와 절제된 언어로 여성 대변인 전성시대를 열었던 나경원 의원과 당시 자유선진당 당적을 가지고 지역구에 출마해 대변인으로 전격 발탁된 신은경 전 KBS 앵커가 그들이다. 친박연대의 대변인에는 국회 국방위원을 지낸 호방한 성격의 송영선 의원이 발탁됐다. 진보진영에서도 여성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서는 이정미 대변인을 발탁했으며, 진보신당은 소설가 송경아 씨와 민노당 여성위원장을 역임한 이선희 씨를 공동 대변인으로 내세운 바 있다. 여성 대변인 일색의 당시 분위기에서는 유일한 남성 대변인이었던 창조한국당 김석수 대변인이 어색해 보이는 형국이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치 패러다임 전환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대변인 여인천하’ 시대가 열렸을까? 여성 대변인 시대의 시작은 통합민주당의 전신격인 새천년민주당의 김현미 대변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정사상 여성 대변인이 처음 임명된 것은 2002년 국민의 정부 말엽, 민주당 박선숙 의원이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된 것이 그 시작이다. 여성 대변인이 주류를 이루는 지금의 정치 현실 속에서 여성 대변인의 ‘비조’격인 박 의원에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대변하는 최적의 인물이었다는 호평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2002년 당시만 해도 여성 대변인은 매우 희귀했던 탓에, 박 의원은 집요하고 거친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숱한 애를 먹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남성형에서 여성형으로 정치소비자인 국민들의 감성이 섬세하고도 민감해졌다. 여야가 당의 얼굴이자 입 역할을 하는 대변인에 여성을 앞다퉈 기용하는 것은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을 의식한 여성 중용 방침과 함께 당의 이미지를 좀더 부드럽게 하려는 취지다. 여야가 극한으로 대립하는 정치현실 속에서는 남성이 주도하는 힘의 정치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지만, 정치 분위기가 유화적으로 흐름에 따라, ‘육탄전’도 불사하는 치열한 대립보다는 이성적인 논리를 갖춘 대변인상이 사회적 호응을 얻게 됐다. 이에 따라 부드러운 느낌의 여성 대변인이 각광을 받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같은 거친 언사가 오가더라도 남성 대변인의 발언이 여성 대변인의 그것보다 강경하고 부정적으로 보인다는 점도 고려됐다. 이유야 어쨌든, 정치가 수사(修辭), 즉 ‘말발의 잔치’라는 전제만으로 생각하자면, 정치에 더 적합한 성별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아닐까? 정치적 배포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입심대결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따라가기 힘든 까닭에 그렇다. 크고 작은 각 정당의 대변인이 18대 총선의 불안한 정국 속에서 여러 번의 교체에 교체를 거듭한 결과, 원내 주요 3당의 대변인 자리는 여성 정치인 3인으로 채워졌다. 한나라당의 조윤선 대변인과 통합민주당의 차영 대변인,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대변인이 그들이다. 속담처럼 접시야 깨지지는 않겠지만, 개원 전부터 이들의 설전으로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위세당당한 원내 1·2·3당 대변인 여성 3인방의 이미지만큼이나, 이들의 프로필 또한 무언가 한 가지 직군으로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경력들로 채워져 있다. ■조윤선-법조인, 차영-미디어, 박선영-학자 조윤선 대변인은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캠프 선대위 대변인이라는 정치 경력과 변호사로서의 법조 경력, 한국시티은행의 부은행장 겸 법무본부장으로서의 금융 경력 등 다방면의 경력을 소유한 ‘팔방미인’이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해 변호사가 된 그는 국내 최대 법무법인인 김앤장과 뉴욕의 로펌 경력을 비롯해 워싱턴 법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차영 대변인의 가장 최근 경력은 KT마케팅전략담당 상무이다. 탭댄스를 추는 고양이가 나오는 메가패스 광고를 만든 장본인이 그이다. 또한, 차 대변인은 미디어 컨설턴트로서 1995년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를 ‘포청천 시장’으로 이미지 메이킹해 당선시켰다. 1992년에는 김대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미디어 컨설턴트로도 활약했다. 그는 다소 선동적이던 김 전 대통령의 어투를 방송에 맞는 톤으로 바꾸는 등 이미지 메이킹을 함으로써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밑바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선영 대변인은 1977년 MBC 아나운서를 거쳐 동국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난 총선 기간에는 선관위 주관 토론 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박 대변인은 비례대표 의원들이 으레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에 도전하는 것과는 달리,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헌법학자에게는 입법부 경험이 곧 실무를 겪는 ‘실습’이라는 의견이다. 결국 이번 18대 국회의원의 경험을 강의 교재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원외 vs 비 원외 - 조윤선 대변인과 박선영 대변인은 비례대표로 선출된 초선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차영 대변인이 원외인사인 점은 정치를 하는데 핸디캡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당인으로서 국회의원인가 아닌가는 정치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대부분의 낙선 대변인들은 총선이 끝남과 동시에 당직을 그만두고 정치무대를 떠났다. 자유선진당 신은경 전 대변인이 그랬고, 민주당 우상호 전 대변인이 그랬다. 당 선대위 대변인은 당선권에 있는 비례대표가 하는 관례에 따라 처음에 당선권에 배정되기도 했으나, 당시 민주당이 겪은 공천 홍역으로 인해 명단에서 아예 배제된 것이다. 그러나 차영 대변인은 대변인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저소득층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죽은 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치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8대에서의 계획에 대해 “우선 내게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할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든, 사회봉사를 하든 우리 아이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법률 전문가 vs 비 법률 전문가 - 민주당 차영 대변인과 달리, 조윤선 대변인과 박선영 대변인은 둘 다 법률 전문가 출신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에 의해 대변인으로 발탁된 케이스이다. 조윤선 대변인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91년 사법고시에 합격, 지난 1994년부터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활약한 바 있다. 그는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캠프의 선대위 대변인을 맡아 이 총재와 함께 활동한 바 있다. 박 대변인은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헌법학회에서 이 총재와 인연을 맺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경원 전 한나라당 대변인도 조 대변인과 함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캠프에 영입돼 여성정책특보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는 점이다. 언론인 vs 비 언론인 - 통합민주당 최재성 전 원내대변인은 대변인직을 물러나면서 “대변인은 50%는 정치인이고 50%는 언론인”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대변인이라면 기자를 상대하는 만큼 언론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언론인 경력이 대변인 업무 수행에 십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1년 9개월 최장수 대변인 기록을 갖고 있는 전여옥 의원도 KBS 보도국 기자와 도쿄 특파원을 역임한 바 있다. 민주당 이낙연 전 대변인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1977년부터 MBC에서 12년간 기자생활을 했고, 1년 6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한 바 있다. 차영 대변인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광주 MBC 아나운서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카메라에 익숙한 만큼 조윤선 대변인에 비해 장점을 가질 수 있다. 경영인 vs 비 경영인 -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과 민주당 차영 대변인이 일반 기업체 경험을 지닌데 비해,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기업체 경력이 전무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정치와 경영은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인 듯이 보이나, 경영학의 ‘마케팅’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든 기업행위든 자신을 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을 지닌다. 차 대변인은 마케팅 방면에서 특출난 면모를 보인 실무 전문가이다. 그는 스포츠 신문과 패션·영화 잡지를 비롯해, 2002년에는 월드컵을 마케팅하는 등 다양한 실무경력을 쌓은 바 있다. 조 대변인은 시티은행과 김앤장 등 로펌에 근무하면서 조직에 따라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지 공부를 했으며, 고객을 대하는 시각과 의사결정 절차, 의견 조율과정 등을 실무를 통해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