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출신의 작가 쿠쉐밍(Ku Xueming·雪明·47)이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현대미술 세대 전-뿌리와 꽃의 대화>에서 우관중을 비롯한 중국의 원로작가 5인과 세계 미술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특히, 쿠쉐밍은 숭례문 전소 사건 당시 추운 겨울 날씨에도 숭례문에 나가 그림을 그려 자선 전시 경매에 작품을 기증하여 언론과 시민의 관심을 받은 화가이다. 웨민쥔·장샤오강·팡리쥔·왕광이 등 중국의 ‘사대천왕’ 작가들과 같은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쿠쉐밍은 20대 초반에 이미 중국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베이징을 비롯하여 톈진·상하이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고, 1990년대 초반에 호주·프랑스·영국 등 해외에서 그룹전을 개최하며 전업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동생이 암에 걸리면서 수술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쿠쉐밍은 1991년부터 14년 간을 베이징 차오양구의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쿠쉐밍 동생의 수술비 마련 자선 전시회를 개최했던 팡리쥔은 “쿠쉐밍이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면 지금의 ‘사대천왕’ 못지 않은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고 그를 평가할 정도로 쿠쉐밍은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작가였다. 8월 20일부터 9월 9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이엠아트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쿠쉐밍 전의 테마는 ‘인간군상(人間群像)’이다. 쿠쉐밍은 인간의 모습을 직접적이고 해학적으로 그리는 화가이다. 그가 그리는 작품의 단골 소재인 인간의 두상은 때론 공허하고 때론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쿠쉐밍의 그림은 작가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달하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기분이 즐거울 때는 기쁘게, 분노할 때는 어둡고 침침하게,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한다. 동세대 중국 작가들이 앞 다퉈 그림으로 냉소적 사실주의나 정치 팝 등 무언가를 표출하려 할 때, 쿠쉐밍은 예술가의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쿠쉐밍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사상을 직접적으로 노출한 작가의 그림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답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쿠쉐밍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로 굳이 해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쿠쉐밍에 대해, 중국의 시인 겸 사진작가 모페이는 “쉐밍은 보기 드물게 천진난만하고 수줍음이 많은 예술가이다. 그의 그림 속에 밀집해 있는 두상들은 만물을 망라하는 인생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예술가의 언어로 동양적인 배려와 존엄을 캔버스 위에 펼쳐 놓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8월 22일 전시회 오프닝 참석차 내한한 쿠쉐밍을 만나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일문일답 작품의 단골 소재인 두상을 그리기 시작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할 때, 정해진 시각에 출근하고 회의를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곤 했습니다. 두상 그림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장면을 묘사한데서 출발했구요. 당시 제게 회의란 ‘과장되고 형식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림 속에 모여 있는 머리들은 그에 대한 조롱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의미도,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머리가 아닌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재를 그리느냐보다, 그림 자체가 표현해 내는 본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쿠쉐밍이 생각하는 그림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요? 이를테면, 88 서울 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는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즐겨 부릅니다. 가사의 내용은 모르지만, 이 노래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집니다. 그리면 그릴수록 표현하기 어렵지만, 표현하기 어려울수록 예술의 본질에 가까워지거든요. 회의시간에는 사람들이 마주 보기 마련인데, 그림 속의 두상들은 마주 보지 않고 시선을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숨은 의도가 있습니까? 우선, 화가도 관람객과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굳이 말하자면, 얼굴을 마주 볼 때는 회의가 막 시작될 때뿐이구요. 회의로 인해 사람의 머리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리는 두상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두상은 저에겐 이미 머리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일종의 표현 방식이 됐구요. 앞으로는 이런 표현 방식들을 점차로 변화시킬 생각입니다. 그림을 본 관람객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질문을 할 때 당혹스럽지 않은가요? 당연한 반응 아닐까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제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오히려 기쁩니다. 게임처럼 하나하나 다른 감상이 나올 때마다 작가로서는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들의 생각은 정말로 천차만별이더군요. 어떤 기분일 때 그림을 그리게 되나요? 확실하진 않지만, 기쁠 때와 분노할 때 주로 그린 것 같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성격이라 변덕스럽게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진 않습니다. 유독 검은 얼굴 일색인 <요란하고 화려한 고독>(2008년 작)을 그릴 때의 기분은 어땠습니까? 또, ‘요란하고 화려하다’와 ‘고독’은 상반된 느낌이 드는데, 어째서 이런 제목을 짓게 되었나요? 기분이 우울할 때 그렸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겨울 한국에 왔을 때, 검은 의상을 즐겨 입는 한국 여성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은색이 화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한국 여성들을 보고 검은색에 대해 다른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그리기 전에 짓습니까? 먼저 그림을 그리고 제목을 짓는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제목이 떠오르기 시작하죠. 그리는 도중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명확한 제목으로 굳혀집니다. 뭔가를 표현했다지만, 쿠쉐밍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슬픔·분노 등 좋지 않은 느낌보다는 마냥 즐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질문인가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언제나 유쾌했으면 합니다. 그림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림은 시(詩)에 가깝습니다. 시는 직접적이지도, 명확하지도 않지만, 시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읽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기보다, 그냥 듣고 느끼면 됩니다. 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이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설명해 달라”고 자주 말하지요. 이러한 그들의 반응은 정상이지만, 그림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힘듭니다. 옛날에 있던 일까지 끄집어내서 그림에 맞게 설명하곤 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죠. 설명은 하고 싶은데 말로는 표현이 안 되고, 답답하거든요. 중국 노자의 말 중에 “대음희성 대도무형(大音稀聲 大道無形·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도는 보이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 더하기 1이 2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에 말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도리는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림 또한,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보는 대상입니다. 예전에는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그림에 직접 표현하다 지금은 표현하지 않는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여 그만뒀다 하셨는데, 지금의 그림에는 어떤 변화를 주고 있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립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제 경험은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많이 그릴수록 표현되는 메시지가 늘어나는 것 같아, 앞으로는 될수록 적게 그리려 합니다. 팡리쥔 씨와 함께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한 자선전을 열었을 때의 에피소드를 듣고 싶습니다. 제 동생을 위해 30명의 중국 작가가 작품을 기증하여 전시회를 열었는데,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시 팡리쥔 씨가 그림 두 점을 줬는데, 그 중 한 점이 팔렸어요. 지금처럼 그때도 이미 유명한 화가였지만, 상업적으로 작품을 판 일이 그 자서전 때가 처음이라 더욱 뜻이 깊었죠. 작품을 가득 채운 두상은 복사한 것처럼 너무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두상 하나를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시간을 재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은 상품처럼 똑같이 복사할 수 없어요. 제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 중 하나죠(웃음). 혹시, 두상을 그리다 지겨워져서 붓을 던지고 싶을 때는 없었나요? 하하하. 어쩔 땐 진짜 던져버리고 싶죠. 스스로 짜증날 때도 있구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불쾌함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림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쁘고 유쾌할 때 그린 그림은 깊이가 없거든요. 반면에, 머리가 아프고 복잡할 때 그리면, 아무래도 마음의 무언가가 그림에 표출됩니다. 인터뷰 내내 쿠쉐밍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겸손을 보인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재현하듯, 막상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려 했다. 쿠쉐밍이 풀어 놓는 이야기들은 정돈되진 않았지만, 뭔가 달관한 사람처럼 철학적이다. 이야기가 어렵다고 인상을 쓰자, 그는 “말은 하면 할수록 철학적으로 빠지는 것 같다”며, “그래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