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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할 수 있는 난관은 행복입니다″

[인터뷰] 북한의 절박한 현실 고발한 <삶은 어디에>의 저자 리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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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1·102 이우인⁄ 2009.01.20 15:57:20

지난해 12월 출간된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탈북 작가 리지명이 약 6년에 걸쳐 쓴 소설이다. 1953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리지명은 북한의 사회주의 통치체제에서 40년이 넘는 고난의 삶을 헤쳐 왔다. 북한에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한 리지명은 한국의 신춘문예에 해당하는 ‘정맹원’에 등극하며 전문작가로 촉망받는다. 하지만, 영화로 제작된 자신의 작품 세 편에 ‘리지명’이란 이름 석 자를 내세울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1998년에 탈북을 감행한다. 자작농(부농)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이었다. “북한은 만5천평 이상의 땅을 소유한 사람을 지주라고 부릅니다. 지주는 타도의 대상이기 때문에 평민들과 함께 살 수 없죠. 그런데, 부모님이 중국에 약 9천평의 농경지를 소유한 부농이었습니다. 당국은 부농을 언제든 당에 반(反)할 수 있는 위험요소라고 여깁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부농의 자식은 이미 당에 기쁨을 줄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어 출세할 수 없구요.” 중국으로 건너온 리지명의 떠돌이 생활은 6년 동안 이어진다. 먹고살기 위해 중국에서 안 해본 일이 없다며 무참히 절단된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마디마디가 잘린 그의 손이 외롭고 고달팠을 타국살이의 고통을 짐작케 한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탄광이든 산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불법체류자의 신분 때문에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겼다. 이렇듯 괴로운 나날이었지만, 리지명은 천직인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삶은 어디에>는 리지명이 중국에서 인부로 일할 때 밤을 새며 쓴 소설이다. <삶은 어디에>는 300만 명의 인민이 아사(餓死)한 ‘고난의 행군’ 시절의 북한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외화벌이사업의 일환으로 당국이 비공식적으로 진행하던 마약밀매에 뛰어든 사람들의 절박한 이야기가 소설 속에 절절히 담겨 있다. 소설 속에는 권력의 암투와 사랑·복수·증오, 등장인물 각자의 안타까운 사연 등이 얽히고설켜 있다. 하지만, 리지명은 이들 모두가 권력의 희생양임을 밝힌다. 겉은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지만, 그 와중에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이용만 당하다 비참하게 죽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전에도 북한에 대한 서적은 많았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는 북에서 나고 13년 동안 군 복무를 경험하고 ‘고난의 행군’을 거쳐 온 리지명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욱 현실적이다. 1월 13일 서울 성북구의 출판사 사무실에서 소설가 리지명과 만났다. 유난히 숱이 많은 검은 머리와 눈썹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소설 표지 안쪽의 자화상과 흡사한 외모였지만, 사진이 아닌 자화상으로 약력을 대신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리지명은 “아직 북에서는 내가 남조선에 있는 줄 모릅니다. 리지명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닌 가명이구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북에 있는 친척과 측근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사진기자에게 “정면사진은 찍지 말아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 예술가, 출신성분에 좌절하다 1971년부터 인민군 제1군단(강원도 회양군) 사령부에서 군 복무를 시작한 리지명은 극 작품을 조선인민군 신문에 투고한다. 인민군 군인계급 교양물로 대상을 받은 리지명의 작품은 이후 김일성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에 따라, 그는 1974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추천을 받고 입학한다. 당시 스무 살, 그의 앞날은 밝았다. “입학 후 신원조회가 시작되더군요. 부농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결국 한 달 만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퇴학처분을 받고 다시 군 부대로 돌아가 제대한 리지명은 대학을 나온 후, 1984년 조선작가동맹후보맹원, 1992년 ‘정맹원’으로 등극하면서 전문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정맹원은 국가에서 월급을 받고 글을 쓰는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만일, 작품이 지정도서로 평가되면, 많게는 글자 한 자당 3전도 준다고 한다. 책 한 권의 수당으로 10억 원(한화 기준)을 받는 사람도 있다. 리지명의 창작품은 세 편이나 영화로 제작됐다. 하지만, 단 한 편도 그의 이름으로 나간 적은 없다. 이 역시 출신성분 때문이었다. “영화가 나오느냐 마느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최종인가로 결정됩니다. 영화가 완성되면 수령과 배우·스태프가 나란히 앉아 함께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갖는데, 내 출신성분은 수령 옆에 앉을 자격이 못 됐어요.” 하지만, 불만을 내세우면 그 자체로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찍히고 만다. 수령을 기쁘게 하고 조국을 위하는 일에 개인의 이름 따위가 중요할 리 없다. 같은 맥락으로, 북한의 영화나 책 등에는 작가의 약력이나 사진, 배우의 이름 역시 명시되지 않는다. 이 모두가 수령에 대한 충성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1991년 3월에 중국의 친척집에 한 달 간 머물면서 머리가 깨이기 시작했어요.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그때 처음 알았죠. 그 전까지는 대한민국을 가난하고 썩어빠진 자본주의 국가로만 알았으니까요(웃음).” 남한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이후 그가 출신성분에 걸려 작품 활동에 회의를 느낄 때 탈북을 감행하게 만드는 데 힘을 줬다. 하지만, 6년 간의 긴 중국 생활에서 리지명은 한국에 가기 위해 특별히 애를 쓰진 않았다. “북한을 떠날 때 남한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더 빨리 왔겠죠. 하지만, 조국을 버리는 반역자가 되는 길을 택하는 데 고민이 컸고, 남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들었기 때문에 더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가 완성 단계에 이르자, 리지명은 월남을 결심한다. ■ <삶은 어디에>를 내기까지 우여곡절 끝에 2004년 12월 3일 남한 땅을 밟은 리지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국가에서 2,000만 원의 정착금이 지급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 돈을 한꺼번에 주면 좋겠지만, 5년에 나눠 석 달에 100만 원 꼴로 주니, 집세와 전기세·수도세 등을 빼면 수중에 남는 건 먼지뿐”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직업 알선 역시 없었다고 한다. 리지명은 낯선 땅에서 직접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가 뿌리도 없는 탈북자를 직원으로 써주겠습니까? 더구나 나같이 늙은 50대 중반을요(웃음).” 결국, 리지명은 사업을 시작했다. 2년째 야채상을 하고 있지만, 최근 경기가 너무 나빠 곧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다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2년 전에는 도와주는 손길도 많았지만, 불경기가 도움의 손길을 모조리 거둬갔다. 고달픈 남쪽 생활, 하지만 배운 것이 더 많다며 그는 스스로를 다잡는다. <삶은 어디에>는 한 탈북자가 운영하는 북한 현실 문학 사이트에 연재된 글을 지금의 출판사 ‘아이엘앤피’의 이호림 대표를 만나 출간한 소설이다. 그리고, 지난 1일부터는 드라마 작가 박길숙에 의해 총 31부작으로 한민족 방송 <라디오극장>에서 방송되고 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북한의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불경기가 있으면 호황기도 있는 거 아닙니까? 호황기일 때 미리 대비를 해 놓으면, 불경기에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구요. 있을 수 있는 고난을 가지고 어째서 죽는 소리를 내는 건가요? 극복할 수 있는 난관이잖습니까?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서 죽음과 싸웠습니다.” 리지명은 “삶을 살래야 살 수 없는 북한의 그릇된 사회제도를 폭로하고 싶어 <삶은 어디에>를 썼다”며 독자들이 북한의 잔인한 현실을 공감하고 하루빨리 북한 동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기를 바랐다. 북한이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 될 때까지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패배자들이나 하는 변명”이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 해방 후 북한 사람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며,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도 바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든 고향과 가족을 놔두고 남한으로 4,5백만 명이나 이주하는 일 역시 망상에 불과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현재 리지명은 김정일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해 <범죄자는 행복하다>는 제목의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그리고 탈북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깨우치는 책도 쓸 생각이라고 한다. ■ <삶은 어디에> 속 북한 인민의 삶 이 소설엔 주인공이 없다.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비공식적인 마약밀매를 하는 북한 정부의 리영식·한태규·박광태 등과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강기수·장신미, 한태규의 복수 대상인 김춘희·최문기·김행우,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한 인물이라도 빠지면 내용이 전개되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삶은 어디에>는 ‘고난의 행군’ 시절의 북한 인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리지명은 “실화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소설에 반영된 실존 인물·사건·사고 등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극중 ㄱ시의 해안경비 담당 군 부대 소속 외화벌이 소장인 한태규는 한때 아내였던 김춘희를 죽이고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최문기와 김행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간다. 한태규가 정치지도원이던 당시 갓 시집온 김춘희는 잠을 자다가 병사 김행우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실을 목격한 보초병 최문기는 상사인 김행우를 부대에 고발한다. 결국 김행우는 상사에서 전사로 강직되고, 출당 처벌과 동시에 생활제대를 하게 된다. 생활제대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주홍글씨와 같은 족쇄로, 그 한 번의 실수는 김행우의 인생을 불행으로 치닫게 한다. 한편, 김춘희는 한태규에게 임신한 몸으로 쫓겨난다. 당시 19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녀는 몇 달 뒤에 딸 한은순을 낳는다. 한태규에게 쫓겨난 김춘희에게 연민을 느낀 최문기는 8년의 구혼 끝에 김춘희와 결혼한다. 한태규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김행우를 미행하며 고통을 준다. 더욱이 평생 불행할 줄 알았던 김행우가 재일귀국민인 송영숙과 결혼해 두 딸의 아버지가 되자, 한태규는 김행우를 비롯하여 송영숙과 두 딸에게도 저주를 퍼붓기로 결심한다. 강간 사실을 고발하고 보란 듯이 김춘희와 결혼까지 한 최문기는 더 죽일 놈이다. 한태규는 강기수에게 김춘희를 죽이도록 지시하고, 강기수와 닮은 최문기에겐 마약밀매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할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갈등의 정점에 놓인 세 인물 한태규·최문기·김행우 등의 설정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며 리지명은 당시를 회상한다. “내가 복무했던 군 부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군 제대가 코앞인 김행우(가명)와 최문기(가명)는 같은 동네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김행우가 정치지도원의 아내를 강간한 사실을 술에 취해 최문기에게 털어놨죠. 이미 4~5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최문기는 이를 대대 정치부에 고발했습니다. 이 일로 김행우는 생활제대를 하게 됐고, 그 정치지도원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말았죠.” 또, 극중 열차 위에서 2만 볼트의 고압전선을 움켜잡고 자살한 재일귀국민 송영숙도 이웃 아주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재일귀국민 출신인 그 아주머니는 같은 재일귀국민과 결혼해 살았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후 남편은 굶어 죽고, 자신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재일귀국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1959년에 ‘귀국의 문’이 열릴 때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와 공민이 된 재일귀국민들은 처음에는 일본에서 보내주는 용돈으로도 부자처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북한에서는 엔화를 외화상점의 돈표로 환전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외화상점은 워낙 물건 값이 비싸 웬만한 사람들도 사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일본의 가족들 역시 돈을 부쳐주지 않게 됐다. 재일귀국민은 ‘고난의 행군’ 때 가장 먼저 죽은 무리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살기 위해 미역으로 연명하는 북한 인민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 여성들 등 소설 속의 모습 대부분이 북한 사람들의 현실을 옮겨 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 극복할 수 없는 땅, 북한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리지명은 목청을 높이고 가슴을 때렸다. 특히, 김정일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김정일을 나쁜 놈이라고 욕하면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들이나 하는 뻔한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북한 인민 대부분은 겉으로만 말하지 못할 뿐이지, TV에 김정일이 나오면 ‘재수 없다’고 꺼버릴 정도로 미움을 받는 대상이 됐습니다.” 김일성이 집권할 때는 충성심으로 충만했던 북한이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정권을 잡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김정일과 북에 대한 원성 역시 높아졌다. “친한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죽는 건 시간 문제일 뿐, 죽음은 늘 곁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20명을 땅에 묻었다는 리지명은 한 가지 일화를 생각해 냈다. 한번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장례를 치러주던 기업소에서 리지명을 포함한 일꾼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그러자, 일꾼들은 식사를 하면서 “내일 또 한 명 죽었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굶주림이 인간에 대한 동정심마저 빼앗아간 북한의 슬픈 현실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3년만 참고 견디자던 ‘고난의 행군’은 10년이 넘게 지속된다. 배급이 나오던 시절에는 당국이 하라는 대로 했지만, 배급도 없으면서 노역은 해야 하는 현실에 인민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북한에서 자살은 반역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면 가족들이 죽음을 당하는 이상한 나라였다. 리지명은 “북한 사회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하루빨리 북한과 남한이 힘을 합쳐 살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기자 선생에게 꼭 북한의 함흥냉면을 사드리겠습니다”라며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1시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한 인터뷰는 인근 음식점으로 장소를 옮겨 4시간이 넘도록 진행됐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라고 말하자, 리지명은 “내가 말이 많지요?”라며 미안해한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북한의 음주문화·예술 등 북한 관련 이야기에 오랜만에 신이 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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