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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 -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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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03호 편집팀⁄ 2009.02.03 13:58:19

눈 속에 동굴을 만들어 놓고 살 만큼 눈이 많이 오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 사이 내린 눈이 천지에 하얗게 쌓여 햇빛에 반사되면 마치 신기루처럼 눈이 부셨다. 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신나게 들판 가운데를 달려오고, 나는 개실(털실의 종류)로 짠 연두색 벙어리장갑과 노란색 방울이 달린 연두색 털모자로 한껏 멋을 부리고는 아침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눈 덮인 들판 가운데로 내달렸다. 시루떡 가루처럼 고운 눈을 한 움큼 입에 넣고, 이내 살살 둥글린 눈을 눈밭으로 굴려 나가면 주먹 만하던 눈뭉치는 점점 부풀어 어느새 커다란 눈덩이로 변한다. 곧바로 외딴집 정식이와 현화·영기가 뒤질세라 달려 나와 저만치서 호호거리며 눈을 굴린다. 장난기 많은 정식이 간간이 눈뭉치를 던져 차가운 눈가루가 내 가슴팍으로 새어 들어와 몸서리치며 발을 동동거리면, 무엇이 좋은지 정식은 키득키득 웃으며 뒤로 자빠져 눈 위에 사진을 찍었다. 이때다 싶은 현화와 영기는 나자빠진 정식의 얼굴에 눈을 담뿍 쏟아 붓고 도망치면, 삽살이는 덩달아 긴 꼬리를 흔들어대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아직 마을 지붕 위에는 모락모락 아침상을 위해 피어나는 굴뚝 연기가 구름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굴린 눈덩이로 눈사람을 만들어 세운 다음 눈사람의 얼굴에 숯 검댕으로 눈·코·입을 그렸는데, 현화가 눈사람의 한쪽 눈을 피터팬에 등장하는 애꾸눈 선장으로 그려 우리의 웃음소리는 또다시 동네가 떠나갈 듯 자지러졌다. 그때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하신 봉팔이 할아버지가 긴 대나무빗자루를 들고 동네 어귀에 나타나 우리를 부르셨다. “야들아~, 인자 그만 놀고 이 할애비랑 눈 좀 치우지 않을라냐?” 한마디 덧붙이신다. “누 집 아들내미가 기중 착실헌지 보았다가, 이 할애비가 방패연을 맹그러 줄거고만~.” 우리는 연에 욕심을 내서가 아니라 당연히 어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단숨에 동네 길로 달려 나가 할아버지와 같이 눈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한바탕 눈을 치우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거리고 볼은 발갛게 물들어 모두 싸움 끝이라도 된 듯 숨소리는 쌕쌕거렸다. “어이구~고넘들 밥값을 톡톡히 허내 그려~허허. 암먼 누 집 자슥들인디 허허~. 근디 정식아, 아빠는 아적 안 일어나셨느냐?” 왠지 모르게 정식은 기가 죽어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어젯밤에도 새마실서 늦게 오셨어라오.” “뭐시여? 아직도 그 화투판서 손 못 뗀 거여?” “엄니허구 밤새 쌈(싸움)혔어라오.” “엄니한테 말햐. 아빠 밥을 주지 말라고!” 할아버지는 이내 실망스런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나와 정식은 다 알아듣고 있었다. “허~, 그 사람 어쩔라고 그러는고~ 가실(가을)내 고생들 혀서 쌀 댓 가마 들여놓고 놀음판에 다 날리믄 여름엔 뭐 먹고 살라고들~ 허헛!” 할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하시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돌아서서 가래침을 눈밭에 “떽!” 하고 뱉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정식이 보이지 않았다. 정식이네 초라한 울타리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인기척도 굴뚝의 연기도 끊어져버린 것을 알았다. 전날 밤에 정식 아버지가 놀음판에서 쌀을 스무 가마나 따서는 야밤에 서울로 온 가족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오후를 넘기지 못하고 산골 작은 동네에 파다하게 떠돌았다. 나는 안도감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겨울이면 그나마 간식거리가 제법 풍족한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온 정식은 구멍이 숭숭 난 양말을 두세 켤레 껴 신고 부끄러운 듯 발을 움츠렸다. 손등은 어찌나 까칠하게 텄는지 윷놀이 판에서도 나를 의식하여 어색한 태도로 곧잘 낭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정식이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는데, 정말 서울로 갔다면 얼굴도 손도 깨끗해질 것이고, 좋은 옷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정식 아버지는 노름으로 서너 마지기 전답을 다 날리고, 같은 반 장수네 집에서 머슴 일을 하여 일년에 겨우 쌀 댓 가마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늘 정식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정식이 정말 운이 좋아 서울로 가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았다. 서울 물을 먹고 뽀얗게 달라질 정식의 땟국 흐르는 얼굴을 그려보며, 멋진 모습으로 언젠가 고향 땅에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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