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남성들의 스포츠’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운동경기는 바로 권투이다. 사각의 링 위에서 트렁크 한 장만 걸친 양 코너의 선수는 글러브를 낀 주먹으로 피땀을 튀기며 서로를 치고받는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선수들의 에너지 넘치는 파이팅을 관람하는 남성들은 마치 자신이 링 위에 선 듯한 쾌감을 느끼며 환호한다. 최근에는 권투가 복싱 에어로빅 등의 형태로 변모해 국민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 자리잡았지만, 아직도 ‘권투’라는 스포츠는 과격하고 거친 인상을 갖고 있어 남성적 성향이 강하다. 또, 국내에도 이인영·김주희·최신희 등 유명한 여성 복서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이 주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권투의 강한 면모는 대별되는 듯 보인다. 이처럼 여성성의 침범이 여전히 허용되기 어려운 권투라는 분야에서 여성 권투 심판인 신경하 씨(38)가 눈에 띈다. 신 씨는 2002년 3월 수습심판으로 복싱계에 첫발을 내딛고, 1년이 지난 2003년 3월에는 `C급 복싱 심판을 획득해 국내 첫 프로 복싱 여자 심판이 됐다. 그리고 입문 3년여 만인 2004년 11월 28일 B급 심판 자격을 따냈고, 2005년 4월에는 A급 심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여성 심판이라는 당당한 직함만큼 신 씨의 말투에서는 소탈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 묻어났다. ■ “여자 심판이 필요하다” 제의에 승낙 신경하 씨가 복싱 심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유명 복싱 체육관에서 복싱 에어로빅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한국권투위원회(KBC)의 A급 심판위원인 김재훈 씨로부터 심판 제의를 받았다는 것. 신 씨의 대학원 후배인 김 심판은 신 씨가 복싱 체육관에 다니는 것을 알고서 어렵지 않게 이 같은 제의를 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여자 권투가 도입됐을 때, 라운드가 끝나면 심판이 양 선수의 가슴 사이에 손을 놓어 둘을 떨어뜨려 놓잖아요. 남자 선수는 괜찮지만, 여자 선수에게는 성적 수치심을 줄 수 있단 말이죠. 실제로 이를 두고 ‘심판이 오래 손을 대고 있었다’는 식의 항의를 하기도 해요. 또, 여자 선수들이 격하게 몸을 움직이면 가슴보호대가 위로 올라가는데, 시합 중에 이를 바로잡을 수 없으니까 심판이 대신 해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여자 심판이 필요한데 할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저도 심판 경력이 여러 개 있으면 유리하니까 선뜻 승낙했죠.” 동덕여대 대학원 스포츠 마케팅 박사인 신 씨는 체육 관련 전공인 탓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려면 여러 스포츠 경력이 필요했고, 자연스레 여러 심판자격증을 취득하게 됐다고 한다. 권투 심판 외에 우드볼(골프와 게이트볼 중간 형태의 구기 스포츠. 나무 공과 스틱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댄스 스포츠, 에어로빅 등 신 씨가 보유한 다양한 심판자격증들은 그의 경력 욕심(?)을 대변한다. ■ 초장에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두 사람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일단 권투 심판을 하기로 했지만, 첫날부터 만만치는 않았다. “여느 자격증을 딸 때처럼 멋도 모르고 석사 후배 한 명과 함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갔지요. 근데 가자마자 시작된 경기에서 코피가 터지고 난리가 난 거예요.” 원래 권투란 경기는 첫 게임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뒷 경기의 흐름이 좌우된다고 한다. 처음에 KO로 끝나면, 나머지 게임도 으레 KO로 승부가 나는 식이다. 하지만 하필 그날 첫 게임부터 코피가 터지는 등 격렬한 장면이 계속된 것이다. “처음 갔는데 선수들이 피를 흘리는 걸 보니 ‘이건 도저히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같이 간 후배는 그날 질려서 그만뒀죠. 그런데 저는 소개해준 김재훈 선생님과 친분이 있고, 막상 발을 들여놓았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신경하 씨는 “잘하든 못하든 항상 도마 위에 있다”고 한다. 첫 여성 심판인데다 빠른 승급으로 항상 눈에 띄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 위에서의 실수가 더욱 부각되곤 한다. 여성 심판에 대한 관중의 반응도 그리 환영적이지만은 않았다. “심판 파이팅”이라며 여자 심판을 비꼬는 관중들이 있는가 하면, 2004년 남자 신인왕전에서는 ‘여자라 어설프다’ ‘여자가 쓸데없이 심판을 하느냐’는 식으로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편도 만류했다는 것. “신인왕전에 짝꿍(신 씨는 남편을 이렇게 부른다)이 같이 갔다가 관중석에서 ‘여자가 쓸데없다’는 둥 욕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심판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심판하면서 욕을 먹으니 마음이 상했을 거예요. 하지만 15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나한테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아니까 이해를 해주더라고요.” ■ 양쪽 선수 난투 말리다가 얻어맞기도 권투 심판이 그리 쉬운 직업도 아니다. 혈투가 벌어지는 앞에서 양 선수를 고루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균형감과 공정성이 중요하지만, 경기에 참여한 선수와 양측 코치가 수긍할 만큼의 공신력을 갖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보이는 경력도 무시할 수 없다. 기실 권투 경기의 판정 이후에는 오판 시비가 자주 붙는다고 한다. “심판은 많이 욕먹는 직업이에요. 선수들은 링 위에 올라서면 일단 자기는 안 맞았다고 생각한대요. 많이 맞았어도 오히려 때렸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중국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출전했는데 엄청 맞고 내려왔어요. 근데 링에서 내려오더니 자기는 한 대도 안 맞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얼굴이 붓고 멍이 드니까 그제서야 많이 맞았나 보다고 하더라고요. 코치도 자기 선수만 보기 때문에 자기네 선수가 더 잘했다고 생각한대요.” 게임을 하다 보면 드물긴 하지만 선수들에게 맞는 경우도 있다. 항상 양 선수의 중앙에 서 있어야 하기에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펀치를 피하는 것도 심판이 해야 할 일이다. 양 선수를 말리다가 턱을 정통으로 맞아 기절한 심판도 있다고 한다. 신 씨는 주먹이 여기저기서 오가는 통에 위협을 느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 적도 많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하남에서 경기를 하는데, 라운드 공이 울렸는데도 선수들이 경기에 몰입한 나머지 난투를 끝내지 않더라고요. 그때에는 심판이 직접 개입해 경기를 중단시켜야 해요. 그래서 둘 사이에 팔을 넣는데 손을 맞은 거예요. TV에는 손을 터는 장면이 잡혔어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수업을 하는데 팔이 들리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잠을 잘못 잔 줄 알았는데, 시합 때 맞아서 그랬던 거죠.”
■ 북한 관중들 응원은 “죽이라우!” 어려운 일이 많아도 재미가 있으면 버텨낼 수 있는 법. 신경하씨는 2005년 3월 30일 중국 심양에서 열린 세계 3대 타이틀매치에서 북한의 최은순-기구치 나나코(일본)의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논타이틀전을 재미있었던 경기로 꼽았다. 북측의 응원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응원이 너무 웃긴 거예요.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이겨라’ 아니면 ‘어퍼컷! 잽 날려!’ 이러면서 응원하잖아요. 근데 북측 관중석에서 ‘죽이라우! 죽이라우!’ 이러는 거예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이쁜 얼굴을 하고 와서는 그렇게 외치는데, 심판 중인데도 너무 웃겼어요.” 2005년 평양에서 국제여자권투협회(IFBA) 밴텀급 세계 챔피언인 북한의 김광옥 선수와 일본의 모리모토 시로가 맞붙었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경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심판들이 갑자기 저를 찾고 난리가 났지요. 가 보니, 일본 선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 오라는 거예요. 외모나 근육이나 완전히 남자더라고요. 다짜고짜 옷을 벗어보라고 할 수도 없고, 목욕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난감했죠. 결국 그날 경기에서는 북한의 김광옥 선수가 이겼죠.” 이날 남한의 한민주 선수와 북한의 한연순 선수가 남북대결을 했는데, 한민주 선수가 압도적으로 두들겨 맞아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한연순 선수가 판정승으로 이겼는데, 말이 여자지 거의 특공대 군인 수준이에요. 바로 앞에서 얻어터지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쓰러져주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도 8라운드까지 버텼는데, 나중에는 북한 선수도 못 때리더군요.” ■ “복싱도 스타 발굴하면 되살아납니다” 신경하 씨는 최근 이종격투기에 비해 인기가 시들해진 한국 권투의 미래를 그리 비관하지 않는다. 스타 발굴에 힘쓴다면 복싱의 부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리핀의 복싱 영웅 파키아오는 현재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 준하는 인기를 끌며 복싱 대중화에 기여한 면이 크다. “국내 축구도 국가대항전의 경우에는 인기를 끌지만, K리그는 관객이 많지 않아요. 야구도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와 한국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흥행 열기가 시들하고, 핸드볼은 영화를 만들어도 상황이 똑같잖아요. 반면, 비인기 종목이었던 피겨스케이트는 김연아가 나오면서 인기를 얻고, 박태환이라는 스타가 배출되니까 수영도 관심을 끌잖아요. 권투도 침체기라고는 하지만, 생활체육으로 이미 피부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스포츠이고, 스타가 나온다면 예전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봐요. 유명우 선수나 장정구 선수같이 파이팅 넘치는 스타가 나와야지요.” 신경하 씨는 복싱의 어두운 이미지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헝그리 스포츠’라는 부정적인 수식어와 누군가 죽어야 이슈화 되는 국내 권투계의 상황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저는 솔직히 미국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주인공인 여자 선수가 죽으면서 끝나잖아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권투 선수를 꼽을 때에도 김득구나 최요삼 등 요절한 선수만 나오잖아요. 언론에서도 폭력사건에 연루된 권투 선수를 집중 부각시켜 ‘무식하게 주먹질하는 사람’인 듯한 이미지를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권투 선수 중에는 성실한 사람이 대다수인데, 이를테면 유명우 씨는 성실한 면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잖아요.” 신 씨는 어떤 심판이 좋은 심판인 것 같으냐는 질문에 ‘융통성 없이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심판’이라고 주저없이 얘기한다. “심판은 공정하게 심판 업무만 보는 것이지, 사적인 감정에 이끌려 융통성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돼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